리뷰
생각하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잠언(箴言)은 마음을 끄는 바가 크다. 생각이 궁극에는 삶의 진정성과 직결된다는 자각에 이르다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 잠언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자아 주체가 직면하는 무수한 아포리아(난관)를 해소하려면 우선 이 잠언에 귀기울이라는 충고 또한 흔하다. 혹자는 분별심을 넘어서라 하고 혹자는 무의식을 돌보라 한다. 또 혹자는... 최근 올려진 백진주의 〈켜〉는 무의식 측면에서 존재의 실체를 파헤치기를 시도하였다(아트스탠드, 서울 왕십리, 7월 21~22일). 영화에서 종종 그리고 다양한 소재로 접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춤으로 그려내는 경우는 드문 줄로 안다. 다만 춤에 담긴 또는 춤을 단서로 무의식의 세계를 주목하는 연구는 적지 않으나, 이는 춤으로 무의식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그려내는 공연 작업과는 결이 다르다.
〈켜〉에서 켜는 겹겹으로 쌓인 어떤 층위를 뜻한다. 공연 전단에서는 자아, 방위, 억압, 프로이트, 무의식, 꿈, 감정, 욕구, 충동, 과거, 에스 등이 키워드로 열거된다. 말하자면 〈켜〉는 프로이트를 계기로 보편화된 무의식 개념의 관점에서 개별 존재의 근원을 환기해내려는 몸짓 및 영상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공연은 스탠드가 없는 가변 무대에 객석이 좌우로 갈라져 각각 두어 줄씩 배치되고 좌우 편 객석 사이에 놓인 기다란 무대 공간에서 진행된다. 이런 설정에 따라 관객은 세 사람 출연자의 숨결(또는 자아의 실체를 찾아가는 몸부림)을 퍽 가까이서 호흡하게 되는데, 이런 무대 설정에 관한 구체적 의도는 공연 전단에 별도로 적시되진 않았다.
백진주 〈켜〉 ⓒ김채현 |
두 여성과 한 남성, 세 사람이 등장하는 〈켜〉는 크게 다섯 정도의 부분들로 나뉜다. 각 부분들은 일련의 전체 흐름 속에서 조금씩 구분되는 양상을 보이며, 그 전체 흐름은 자신의 실체에 접근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압축된다.
백진주 〈켜〉 ⓒ김채현 |
공연 도입부에서 두 남녀가 어두운 바닥에 엎드린 모습으로 보이고 그들은 굵은 탯줄을 연상시키는 동아줄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숨죽이며 정지해 있는 동안 무대 정면 스크린에는 어떤 사람의 영상 이미지가 비춰진다. 한 사람의 여러 모습을 담은 이 영상은 두 개의 거울에 비치는 식의 좌우 대칭 이미지 위주로 같은 사람을 하나 또는 둘로 나누거나 중첩시키기를 빠르게 반복하였다. 한 인간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왕래하는 무질서한 순간들을 묘사한 이미지들로 수용된다. 인간을 의식 일변도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그 무의식의 차원도 주목할 것을 강하게 환기하는 서론격에 해당한다.
백진주 〈켜〉 ⓒ김채현 |
이후 두 남녀의 활동이 개시되는데, 공연 전반에 걸쳐 젠더 구분은 감지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 접근한 다음에 지나치다가 접촉하고 다시 거리를 두어 떨어지는 관계를 거듭하는데, 두 사람을 연결한 동아줄 길이가 두 사람이 떨어질 수 있는 최대 거리이다. 탯줄 같은 동아줄에 결박되어 그들은 엉키고 뒤척이며 떨어지기를 무수히 반복하며 그동안 바닥에는 날카로운 수정체 막대들 모양이 얽힌 무늬가 조명으로 어지럽게 투사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동아줄은 풀려지다 감겨지곤 하는데, 적대적인지 동지적인지 분명찮은 두 사람이 엉키는 이유는 제시되지 않으나 엉키는 단서는 동아줄에서 찾아질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 교환은 엿보이지 않으며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멍한 느낌이 강하다. 여기서 두 사람의 역할은 각자 의식의 존재 아니면 무의식의 존재 가운데 하나로 해석된다. 뒤엉켰다가 떨어지려 하고 그러는 상대방을 뒤쫓는 두 존재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좀체 분리되지 않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백진주 〈켜〉 ⓒ김채현 |
두 사람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하면서는 곧장 상체를 뒤로 젖히고 서서 그 무엇에 취하거나 홀린 듯한 자세로 몸을 부르르 떨어댄다. 그러다 바닥에 쓰러지자 바닥에는 아메바 모양의 유동하는 무늬가 투사된다. 바닥에 무릎꿇어 앉거나 누운 자세에서건 선 자세에서건 실성한 듯한 분위기가 역력하며, 때로 선 상태로 오래 상체를 굴신하기를 반복하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서는 점차 접신(接神)의 경지가 연상되었다.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그 무엇에 씌인 듯한 몽환의 순간이 집중적으로 연출된다.
백진주 〈켜〉 ⓒ김채현 |
이와 같은 전개를 기조로 하여 계속해서 〈켜〉는 혼자서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배역을 등장시킨다. 이 부분에서는 손바닥을 뺨에 대고 머리를 흔들며 그 무엇을 뿌리치는 동작, 무릎꿇어 앉아 몽환에 사로잡힌 듯 싶게 천장을 쳐다보거나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전개된다. 잇달아 등장하는 스크린 동영상에서는 꿈꾸며 혼자서 뒤척이는 장면이 나오면서 자막에는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등등의 소개글이 떠오른다.
백진주 〈켜〉 ⓒ김채현 |
그런 다음에 세 사람이 모두 누운 상태에서 두 남녀 위를 한 여자가 몸을 접촉하며 지나가서는 사라진다. 남은 두 남녀는 서로 엉켜 바닥을 기며 이동하다가, 엎드린 남자 위를 여자가 올라타고 여자를 태운 채 남자가 기어다니다가 여자를 목마 태운다. 연속하여 서로 가까이 마주 서서 행하는 대무, 서로 하나가 되는 엉킴이 반복되다가 떨어져서 한 사람이 쓰러져 뒤척일 동안 상대방은 여러 기형적인 자세로 뒤뚱대며 무대를 누비고 다시 상대방과 하나로 엉킨다.
백진주 〈켜〉 ⓒ김채현 |
이어지는 장면에서 여자 하나가 등장하더니 누운 여자를 발길질로 구르게 한 후 두 여자는 선 자세에서 엉킴과 물리침을 반복하면서 상대방을 격하게 다루다가 서로 어울려서는 다시 엉켰다 빠져나가고 달아나는 양상을 보이는데, 그 사이에 부들부들 떠는 순간들이 삽입된다. 반복되는 밀치기와 떨어지기, 대거리, 그리고 온힘을 다해 떨어지려고 시도하는 모습은 퍽 공격적인 유도 대련을 연상시킨다. 끝내 한 여자가 상대를 제압한 듯하나 제압당한 여자가 일어나 접근해서 상대방에게 매달리지만 제압한 여자는 이를 뿌리치고 제 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공연은 마무리된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의식이고, 어느 쪽이 무의식인지는 분명찮으나, 분명찮지 않아 여운을 남긴다.
공연에서는 하얀 나무 막대(얇은 각목)를 얼기설기 붙여 입체감을 갖춘 조형물이 천장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이 각목 조형물은 앞서 묘사된 날카로운 수정체 막대들과 모양이 유사하며, 이로 보아 조형물은 의식과 무의식의 복잡한 뒤엉킴 또는 무의식 세계의 복잡다양한 켜를 상징한 것으로 수용된다.
전체 전개를 요약하자면, 〈켜〉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인간의 실상, 무의식 세계에 접어든 몽환의 모습, 꿈의 세계, 무의식과 의식의 얽힘, 무의식과 의식의 분리(또는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이탈)의 양상들이 그려졌다. 이렇게 정리되는 〈켜〉의 내용 서사는 개괄적이며 일단 원론적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서사에서 원론적인 담론을 넘어서는 안무자 특유의 시각은 모호해 보인다. 그러함에도 우리들의 존재가 일상 상식과는 달리 심층적이며 생각보다 훨씬 치열한 켜를 품고 있음을 〈켜〉는 말하는데, 이 치열한 켜를 〈켜〉는 특히 움직임의 서사에 치중해서 캐내어갔다. 요컨대 원론적 내용의 서사와 전개되는 움직임 서사 간의 불균형은 손질되어야 할 점이다.
〈켜〉에 자주 나오는 치열한 움직임들은 두 사람의 뒤엉킴을 비롯하여 격렬한 대거리, 부들부들 떨기, 바닥 구르기, 무릎꿇어 앉기, 바닥 기어다니기, 굴신, 그리고 기형적인 자세의 동작들이 들어지며, 몽환에 젖는 자세도 종종 등장한다. 거의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이들 움직임은 그 강도가 아주 높고 때로는 억세고 거칠며 맹렬한 느낌마저 던진다. 고강도 움직임을 덮어놓고 수긍할 일도 아니고 고강도 움직임에 내재한 위험성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켜〉 안무자가 한국무용 계열 창작자임을 고려해보면 다소 흥미로운 양상으로 당분간 눈여겨볼 부분임이 분명하다.
그 흥미로운 점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컨템퍼러리한 조류 면에서 한국무용 특유의 기교를 고집하며 내세우는 방식이 자칫 후진스러운 인상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 현상황이라는 것을 〈켜〉에서 뚜렷이 관측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무용 계열에서 무의식과 원형 의식을 조명함에 있어 이전에 흔하게 기대온 무속적 소재의 스토리텔링보다는 〈켜〉가 무의식이나 자아의식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 역시 어떤 변화를 말하고 있다. 이른바 MZ세대의 춤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흐름을 〈켜〉는 강도 높은 구성으로 소화해내었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