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창작 산실의 ‘2022 올해의 신작’에서는 중견과 원로의 공연작도 보게 되었다. 이 기획 프로그램에서 주로 신진들의 것을 보아온 상례에 비추어 좀 이색적이다. 창작 산실이 창작력을 진흥하기 위해 개발된 사업인 만큼 이미 창작력을 검증받은 사람은 이 사업과 무관하다는 인식이 들 만도 하고, 그래서인지 신진 위주로 흘렀을 것이다. 2018년도처럼 중견들의 비중이 높은 해도 있었고 또 중견 무용가들의 것을 간간이 보게 된 이전에 비하여 올해는 중견과 원로를 신진과 더불어 접하게 되었다. 창작에서 나이가 문제될 수 없다시피 창작력 진흥을 위한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신진, 중견, 원로를 고루 안배해서 ‘올해의 신작’의 춤 열기를 드높이는 방안이 적극 개발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서울발레시어터 〈클라라 슈만〉 ⓒ서울발레시어터/옥상훈 |
‘2022 올해의 신작’에 서울발레시어터의 제임스전은 〈클라라 슈만〉을 출품하였다(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 17~18.). 19세기 독일의 클라라 슈만은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이자 역시 음악가였다. 클라라는 당시 신동 피아니스트로 불린 데에다 그 시대에는 더욱 드물었던 여성 작곡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하였다. 만인의 기억에 전하는 음악가의 사랑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 슈만 부부의 사랑이다. 낭만주의 작곡가로서 지명도가 대단했던 슈만 못지않게 피아니스트로서 이미 그러하였던 클라라였건만 남편이 정신이상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남편의 제자였던 요한네스 브람스가 클라라를 사모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슈만 사후에도 브람스가 클라라를 돕되 친구 관계로 있었고 그가 훗날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혔던 때문에 클라라의 사랑은 더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전설적이라는 말도 나온다. 지금도 세 사람의 관계(삼각관계라 하기는 어려운)를 소재로 한 영화나 공연물이 종종 나오는 이유도 그러하겠다. 이번 공연 〈클라라 슈만〉에서도 클라라, 슈만, 브람스, 세 사람의 관계가 뼈대를 이룬다.
서울발레시어터 〈클라라 슈만〉 ⓒ서울발레시어터/옥상훈 |
〈클라라 슈만〉은 제목대로 클라라에 초점을 맞춘다. 클라라만한 여성이었기에 세 사람의 관계가 세간의 이목을 모을 수 있었던 대로 적절한 설정이다. 작품의 첫 신에서 군무진들이 서서히 줄을 지어 입장한다. 그들이 곧장 대열을 원형으로 바꾸자 원형의 대열 중심에서 클라라(이윤희 역)가 모습을 나타내며, 바로 군무진이 사라지면서 혼자 남은 클라라가 사지의 움직임을 서거나 앉는 다양한 자세로 펼치고 몸 동작들은 서울발레시어터 특유의 곧은 느낌을 발산한다. 이어 등장하는 슈만(정운식 역)과 잦은 리프팅을 중심으로 이인무를 전개하는 클라라의 표정은 매우 밝으며 사랑의 춤 분위기가 완연하다. 두 사람이 사라지면 조역들이 둘씩 등장하는데, 그 커플들 역시 클라라 커플과 엇비슷하게 제각각 사랑의 춤을 곧고 경쾌하게 진행한다. 일테면 클라라 커플의 사랑을 다져주는 춤일 것이다. 이 사랑의 춤은 다시 클라라 커플의 이인무로 마무리된다.(공연 내내 클라라 커플의 춤은 열연이었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듯하다.) 이처럼 첫 신에서 이인무를 여러 형태로 등장시키는 데서는 제임스전의 노련한 안무 기법이 녹슬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서울발레시어터 〈클라라 슈만〉 ⓒ서울발레시어터/옥상훈 |
이어지는 부분들을 보면 곧 브람스가 등장하여 세 사람의 관계가 형성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분위기가 저변에 흐르기 시작하며 슈만이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고 클라라가 고통을 감내하고 끝내 슈만이 세상을 하직함으로써 클라라와 브람스만 남는 모습으로 공연은 마무리된다. 이 흐름들을 엮으면서 안무자는 우선 출연진의 배치 구도에서 빠르고 다양한 변화를 도모하였다. 이에 맞추어 무용수들 간의 접촉 동작에서도 특정 부위보다는 전신을 활용함으로써 몸의 활용도는 서울발레시어터답게 매우 높았다. 그리고 군무진이 둥근 울타리 대열을 지으며 주요 캐릭터를 에워싸거나 가둔 상태에서 캐릭터의 심리를 대변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여 작품 전개에서 방점을 찍는 구실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산만한 느낌보다는 전반적으로 여유 있는 전개가 지속되었다.
서울발레시어터 〈클라라 슈만〉 ⓒ서울발레시어터/옥상훈 |
이번 공연에서는 클래식 실내악 스타일의 악기 구성(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비올라)이 무대 위에 배치되었다. 작품 전개에 맞춰 슈만, 클라라, 브람스의 소품 악곡들을 10편 가량 라이브로 연주해서 실내악곡과 춤의 현장 접속을 도모하였다. 내용 전개에 맞춘 악기의 배치를 달리 하면서 무대 분위기가 일신되는 느낌도 있었고, 녹음 반주음에 비하여 몰입도가 높다.
서울발레시어터 〈클라라 슈만〉 ⓒ서울발레시어터/옥상훈 |
〈클라라 슈만〉에서는 낭만적 도취가 배제된다. 낭만적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기 쉽지 않아도 실제 클라라 자신이 낭만적 사랑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래도 사랑은 지속될 것이다. 이 점을 참조해보면 공연작은 클라라에 충실한 편이고, 작품에서 강조된 것은 병마에 시달리는 슈만의 정신질환 상황과 클라라의 고통, 브람스 입장에서의 사모하는 심경이다. 전체 묘사에서 극적인 순간은 없었지만 세 사람의 정신적 방황이 부각된다. 이로써 감지될 사랑은 시종일관 긴장감을 동반하였으며, 중간중간에 연출된 출연진들의 실루엣 형상들도 그러한 효과를 강화하였다. 말하자면 〈클라라 슈만〉은 스토리를 갖춘 심리 발레로서 세 사람의 어두우며 불안정한 내면 표현에 기초해서 서로의 관계를 묘사해나갔다. 그런 중에서도 각 캐릭터들에게서는 내면 표현의 움직임에 있어 유사한 패턴들이 반복되거나 또 캐릭터들 사이에서도 차별성이 크지 않아 보였다. 다시 말해 작품은 스토리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복(起復)이 적게 평탄하게 흘러 전체적으로는 입체감이 옅은 편이었다.
서울발레시어터 〈클라라 슈만〉 ⓒ서울발레시어터/옥상훈 |
서울발레시어터가 세상에 존재를 알린 것은 첫 공연 〈현존(Being) 1〉이었다. 1995년의 일로서 제임스전의 안무작이었다. 이 첫 공연작은 강한 비트의 록 음악에 맞춰 에너지가 펄펄 넘치는 스텝들을 과감하게 펼쳐서 록발레라 불린 그대로 국내 발레 공연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서울발레시어터는 곧 창단 30년이 되는 그동안 도시성과 현대성을 주조로 한 작품을 축으로 서정적인 작품들과 커뮤니티를 향한 춤 활동을 병행해왔다. 창작 발레의 트렌드를 이끌며 창작력을 축적해온 연륜의 단체가 〈클라라 슈만〉처럼 신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올해의 신작’에서 선보여 담론을 확장하는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