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구컨템포러리(예술감독 박현옥)의 〈고귀한 눈물〉(4월 6일, 아양아트센터 아양홀) 공연이 있었다.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명작산실 공연지원금을 받은 작품으로, 1차 서류와 인터뷰에서 세 팀을 선정, 2차 쇼케이스 심사를 거쳐 최종 선정된 작품이라, 궁금했다.
대구 달성군에(‘육신사’ 경내에) ‘태고정(太古亭)이라는 보물로 지정된 정자가 있다. 그 정자 앞면에 나란히 걸려있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춤 〈고귀한 눈물〉의 단초다. 박팽년을 위시, 사육신의 위패를 모셔놓은 ‘육신사’, 그리고 ‘일시루(一是樓). ’모든 것은 본시 하나‘ 이니 ’옳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하자면 삶과 죽음, 부(富)와 빈(貧), 충(忠)과 역(逆), 성(聖)과 천(賤)이 본시 하나에서 시작되는 뜻 새김에서 춤의 사유가 시작된 것이다.
인간의 삶(정신)과 그 흔적이 보충하여 만들어낸 아름다운 건축물 ‘일시루’의 풍경을 춘 춤. 대구, 그 중심에서 자부심을 가진 예술가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눈만이, 건축물이 발하는 하나의 풍경을 이렇게 파악할 수 있다. 하나의(박팽년이라 하자) 삶을, 삶의 절대적 형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삶을 내적시적으로 바라본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세상에는 확실히 바깥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삶이 있다. 더하여 〈고귀한 눈물〉은 오랜 문물제도를 지닌, 따라서 전통과 관습의 눈을 빌리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그런 사회의 삶만을 두고 말하지 않기에 가치를(비평적 가치) 가진 작품이었다.
대구컨템포러리 〈고귀한 눈물〉 ⓒ이재봉 |
키 높이로 내려진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무용수들이 무대 위로 기어오르며 시작되는 무대. 마치 한 사람의 죄(박팽년의 충(忠)과 역(逆))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던 이들의 소환으로 읽힌다. 흔들리지 않는 기둥처럼 굳건하게 서 있던 구조물을 가로 눕혀 이리저리 이동하자 전통문살 같은 형태가 생긴다. 문살과 문살 사이, 미로 같은 길이 생긴다. 길을 따라 무용수들이 걷고, 돌아서 가는가하면 우뚝 멈춰 선다. 어디에(사이와 사이) 설 것인가.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 충(忠)과 역(逆), 삶과 죽음.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성(聖)과 천(賤)이 바뀌는데. 편하게 살고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자신을 놓아두어야 할 것 같기도, 어디에 붙들어 매두어야 할 것 같기도 한데. 편하게 살기는 포기일 수도, 어떤 종류의 성취일 수도 있는데.
대구컨템포러리 〈고귀한 눈물〉 ⓒ이재봉 |
서성임으로 그려낸 ‘생명의 눈물’은 문살의 형태를 해체하면서 공간의 변화가 한 번 더 일어나며 ‘상실의 눈물’로 변환한다. 남자가 기둥 같은 큰 직육면체를 세운 뒤 꼭대기에 올라 엎드려 있다. (아슬아슬한)좁은 공간에 서있는 남자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남자를 중심으로 바닥의 구조물이 반달 형태로 이동하자 여자가 작게 쪼개진 조각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와 무대바닥에다 던지듯 내려놓는다. 여자가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사람의 형태. 파편은 멸문의 화를 입은 자신이며 다시 쌓는 것은 뱃속의 생명(박일산)일터.
사육신, 그들이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성취한, 선명한 절개만큼 매혹적인 저 선비들이 원했을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기둥이 가로 누우며 만들어낸 미로가 그것일까. 끝내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비극 속에 몰아넣은 절개. 따라야 할 전통이 어떤 것이건, 군림하는 정치체제와 그 선전이 어떤 것이건 그것들이 주어지기도 전에 항상 지순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들의 삶(여자)이 그것들 밑에 있었다.
대구컨템포러리 〈고귀한 눈물〉 ⓒ이재봉 |
‘성취의 눈물’장. 무대 중앙에서 반짝이는 물고기 모빌이 내려오자 흰색의상을 입은 다섯 명이 그 아래 모여 서있다. 여섯 명이(사육신) 아니다. 혹 박팽년의 현손 계창이 제삿날 꿈에서 보았다던 사당문 밖에서 서성이던 이들인가. 모빌을 잡고 흔든다. 맑고 청아한 소리에 맞춰 춤을 추나 크게 의미가 읽히지 않는다. 손을 맞잡고 서로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추는 단순한 움직임이 마치 세잔의 〈댄스〉 회화 같기도. 흰색 희상의 허리께를 가르는 검정색 띠, 폭이 넓은 긴 길이의 치마의상과 음악이 무엇을 희구하는 듯 맑다. 모빌 아래에서 기는가 하면, 나머지가 걷는, 이어 흰색 슈트를 입은 군무진이 합류하여 추는 다소 형식적인 춤. 의상만큼 선명하지 않다. 내적 시선으로 춤이 풀어졌으면 좋았을 뻔. 다섯 명의 삶. 말하자면 새 군주와 다른 제도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서 그 본질을 읽어버리지 않은 삶. 그것도 아니면 한 시대의 믿음이 무너지고 나면 그 찌꺼기처럼 보이기도 할 삶. 또 그것도 아니면 삶을 허망한 욕망의 장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고귀한’ 존재를 추는 춤이었으면 어땠을까. 어렵다.
대구컨템포러리 〈고귀한 눈물〉 ⓒ이재봉 |
마지막 장 〈고귀한 눈물〉. 촘촘한 세로무늬의 오래된 문살 영상. 검정색 슈트의 남자와 흰색의상의 십여 명이 춤으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무대 배경의 빛이 투과되는 살문의 틈이 이들이 걸어온 시간을 말해주는 듯. 오래된 시간이 흩뿌려진 시간의 가운데서 추는 이들의 춤이 아름답다. 이윽고 검정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살문 빛이 투과되는 한 가운데로 걸어가 흰색 슈트를 입은 군무진의 춤을 가만히 지켜본다.
남자가 서 있는 (태고정의)오래된 문살. 시간이 시간으로 갈라지고 깊이를 빼앗겨 먼저 산 이들이(사육신) 머물고 있는 곳. 시간의 공격에도 분절되지 않는 애씀과 노력과 그 끝없음보다 더 깊은 것은 무엇일까.
작품 내내 깜짝 놀랄 춤도 장치도 없고, 간혹 안무의 빈 공간이 보이기까지 하는 무대를, 〈고귀한 눈물〉을 은유하는 춤의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모들은 박현옥(대구컨템포러리 예술감독)의 춤(삶)과 떼어놓을 수 없다. 혹은 성취로 혹은 억압의 결과이기도 한 그것.
매순간 흘리는 눈물만이 구원의 절대라고는 하지 말자. 적어도 박현옥 자신의 전 작품을, 100여편이 넘게 작업한 춤의 모든 시간들은 하나의 존재로 바로 그 존재되기로 자신을 초월하는 장소라고만 말하자. 사육신의 삶처럼, 한 작품의 초월, 한 개인의 초월이 곧 역사와 삶의 초월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 반대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귀한 눈물’, 예술감독 박현옥이 눈물 속에 항상 다시 뚫는 길과 함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인지도.
춤 무대에서 늘 확인하는 것이 있다. 안무가가 아무리 자기 작품에 공을 들여도, 그 춤은 무대에서 너무 적게 보이거나, 너무 많이 말할 뿐이다. 춤이란 언어는 안무가가 애써 구별하려 했던 의미가 의도치 않게 다른 모든 의미를 안고 들어오기(도)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때때로 우연하게 의미가 생성되어 자라는 혼란이, 그 의미가 춤을 있게 한다. 우리는 춤과 춤 사이에서 일어나는 춤을 보고, 그 사이의 의미 생성을 위해 또 그 사이의 앞과 뒤를 또 다른(의미) 춤으로 채우는지도 모른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