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남영의 〈몸의 고고학〉(8. 30. 서강대메리홀 대극장)은 몸의 기억을 탐문하는 작업이다. 이번 공연은 〈2024, 나를 나로서 보다〉 〈손가락의 고집〉 〈디디다〉의 세 공연작으로 구성되었다. 춤꾼들마다 몸에 대한 기억을 품을 것이고 그 기억에 대한 입장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몸의 기억은 필생의 중대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이남영은 그 사건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몸의 고고학〉에서 내디딘 것으로 풀이된다.
〈2024, 나를 나로서 보다〉는 몇 해 전 발표한 초연작 〈나를 나로서 보다〉를 재연하되 안무자는 당시의 춤추는 몸에다 2024년 지금 춤추는 춤을 삽입하거나 겹치는 작업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소개한다. 말하자면 몸의 기억 작용과 관련해서 진행되는 소실과 틈입 사이의 현상을 해석하는 춤 작업에 해당한다. 〈손가락의 고집〉은 사람들은 물론 춤꾼들이 손의 습관과 버릇을 고치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들춰 보이면서 몸의 강고한 도식과 힘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실존적이자 현상학적인 춤추는 몸과는 별개로 〈디디다〉에서는 다소 인류학적인 차원에서 몸의 기억을 그려낸다. 안무자가 소개하듯 〈디디다〉는 한국적 움직임의 원류를 탐색하는 작업으로 설정된다. 여기서 한국의 신화 텍스트 가운데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의 기억 및 공통의 기억을 담은 옛 텍스트가 소재이다. 구체적으로는 〈삼국유사〉의 ‘구지가’ 대목과 ‘해가’의 ‘수로부인’ 대목, 그리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군취가무’ 대목이 그 소재들이다.
이남영 〈2024, 나를 나로서 보다〉 ⓒ잔나비와묘한계책 |
〈2024, 나를 나로서 보다〉의 막이 열리면 즉시 사각형의 조명 도안이 비춰지는 무대 바닥 위에서 검정색 복색의 춤꾼들은 밀치고 밀려나는 식으로 다툼을 이어간다. 밀치려고 하는 측은 지금의 춤추는 몸일 것이고 밀려나는 측도 지금의 춤추는 몸일 것이다. 여기서 이전을 기억하는 몸, 즉 몸의 기억은 그만큼 완강하다. 이전의 몸 기억과 지금의 몸 의지 간의 알력과 뒤섞임이 혼재하는 정도는 가중되고 예측하지 못한 몸 기억이 돌출하는 순간들도 수시로 전개된다. 이 돌출의 순간들은 주로 불규칙적인 움직임들 또는 일사불란한 춤꾼 집단을 벗어난 소수에 의해 그려진다. 기억의 작용과 그에 대한 반작용이 연속되는 속에서 일부 기억은 무너지지만 그래도 기억은 물러서지 않는다. 급기야 춤꾼들의 아수라장이 연출된 후에 사태는 진정되어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그렇게 진정되어 소강상태에 있을지라도 (축적된) 기억과 (새로운) 의지가 언제 또 다시 다툴지 모를 일이다.
기억을 매개로 저항과 갈등을 묘사하는 공연작 〈2024, 나를 나로서 보다〉를 폭넓게 보면 기성 집단 혹은 기득권의 완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풀이될 만한 면도 없지 않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로서, 〈2024, 나를 나로서 보다〉는 초연작의 변형작이고 초연작을 접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초연작이 가질 과거의 기억을 식별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과거의 몸 기억과 현재의 몸 의지 사이의 차이도 관람자가 사실상 식별해내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불투명성은 두 개 버전의 〈나를 나로서 보다〉가 촉발할 수 있는 흥미를 저하시킨 요인으로 보인다. 두부모 자른 식의 선명함은 아니더라도 그 같은 차이를 식별해내는 데 요구되는 단서 정도는 설정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캐릭터가 설정되지 않는 공연작이라 하더라도 일부 주요 출연자의 역할도 조금 더 개념화되었어야 하였다. 아무튼 공연에서는 몸이 과거의 기억과 지금의 의지 사이의 길항작용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재확인된다. 이런 뜻에서 우리 몸이라는 것은 기억과 의지의 영속적인 전장터라 하겠다. 이런 긴장 관계는 삶도 몸도 안정된 틀의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실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남영 〈손가락의 고집〉 ⓒ잔나비와묘한계책 |
이어 올려진 〈손가락의 고집〉은 간주곡 같은 삽입부에 해당하고 공연 시간도 짧은 독무이다. 안무자는 손은 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기억력을 가진 부위여서 의식적 조절과 조정이 힘들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몸 도식의 그런 속성을 손 부위를 소재로 환기하려는 안무 발상은 좀 특이한 데가 있어 보인다. 손-팔의 절대 중요성을 이참에 돌이켜보자면 손의 버릇은 고쳐져야 하는 것이지 손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이 강박관념으로 다가올 때는 이미 몸도식과 몸의 새로운 의지가 어긋나 다투는 중이라 할 것이다. 〈손가락의 고집〉에서 한쪽 손은 세차게 떨리거나 몸의 다른 부위를 어우르거나 뒷덜미를 잡아채거나 다른 손에 의해 제어되는 등의 상황에 놓인다. 신들린 독무에 얹혀서 손의 여러 상태가 재빠르게 이어지던 끝에 두 손은 가지런히 정돈되고 몸도 진정되지만 독무자의 낌새에 비추어 사태는 해소되지 않은 것 같다. 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내 몸이라 체념하는 듯이...
이남영 〈디디다〉 ⓒ잔나비와묘한계책 |
〈디디다〉는 통념을 벗어나는 발상이 돋보인다. 이 통념이란 한국인의 무의식적 원형으로 추정되거나 상정(想定)되는 형태의 움직임을 말한다. 아마도 추정컨대 한국의 춤꾼들이 상정하는 무의식적 원형의 움직임도 유사한 형태를 취하지 않을까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군취가무’(群聚歌舞) 대목에 등장하는, 천지 귀신에게 제사를 드릴 적에 가무음주를 주야로 그치지 않고 수십명이 서로 따르며 땅을 밟고 몸을 수그렸다 치켜들었다 하고 손발이 서로 잘 어울렸다는 내용에서 그 무의식적인 춤 원형을 상정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공연에서 이남영 안무자는 신화 시대 인간의 움직임 패턴을 분석 분해하여 자신의 감각으로 탈구축하기를 모색한다고 소개하였다.
이남영 〈디디다〉 ⓒ잔나비와묘한계책 |
〈디디다〉 공연에 ‘군취가무’ 대목에서 연상되는 움직임들이 디딤새와 발구르기, 뜀뛰기, 원무, 굴신 등으로 등장하는 한편으로 그 외에 온갖 자세와 내딛기, 회전을 동반한 춤 움직임들이 가세한다. 그것을 해내는 춤꾼들은 때때로 신들린 것 같은 모양새들이다. 안무자의 춤 뿌리라 지칭되곤 하는 창작춤 단체 무트댄스에서 자주 보던 잦은 굴신과 뒤로 젖히기, 날렵한 회전 류의 움직임들도 등장한다. 이로써 안무자가 지향하는 탈구축의 작업은 발디딤 중심의 움직임을 훨씬 이탈하여 그간의 통념을 과감하게 비틀어 보는 방향을 지향하는 조짐을 보인다. 그러므로 제목의 디디다는 땅을 딛고 선 원초적 자세나 태도를 가리키지 발디딤에 국한된 춤사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남영 〈디디다〉 ⓒ잔나비와묘한계책 |
공연에서 춤추는 춤꾼과는 다른 역할자가 등장하는데, 하반신 앞자락이 툭 트인 드레스를 착용한 한 여성은 공연 내내 춤꾼들과는 거리를 두고 무대 둘레를 사각형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대개는 느리게 연기하였다. 처음에는 맨발로 등장하였다가 그 다음에는 운동화, 그다음에는 빨간 하이힐을 신고 등장하고 마지막엔 맨발로 나타난다. 걸음으로 시종하는 역할이지만 이 여성의 등퇴장에 따라 집단무의 흐름에 변화가 있었으므로 그 배역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여성은 대지의 여신인지 인간인지 불투명하였고 그 정체를 명료하게 가리키는 장치가 요구되었다. 안무자가 소개한 대로 신화 시대 인간의 움직임 패턴을 분해한다는 설정은 눈여겨볼 지점이긴 하나 안무자가 설정한 신화 시대 인간의 움직임 패턴이 무엇인지는 애매하였다. 이 점 또한 추가적인 보완을 필요로 하였다. 요컨대 고전의 재해석이나 수정 해석은 특히 신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개입할 여지가 증폭하는 법이고 심지어는 기존 통념이 송두리째 뒤집혀지기도 하는데 기존의 해석에 매달리지 않는 진취성으로 안무자가 앞으로 어떻게 해낼지 주목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