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 작품.’이라고 쓰고 보니 조금은 낯설어 보인다. 국립무용단 신작 〈행 +-〉 (안애순 안무‧연출, 해오름극장/ 2024.8.28.-9.1. 4회 공연)을 얘기하기 위해선 작품 안의 춤과 작품을 어느 정도 분리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이 ‘춤’이 화두가, 중심이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춤에만 맡겨놓는 작품이 아닌 작품으로서의 위상 또한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그 둘을 따로 분리하고 그 모두를 드러내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묘하다
프리뷰 청탁을 받고 연습실을 찾아간 때가 낯설 정도의 더위가 한창이던 8월 중순이었는데, 작품의 연습장면을 슬쩍 본 것도 이미 달 반이 넘은 시간이고 9월 1일 공연을 보고 9월호에 리뷰를 쓰지 않았기에 일반적으로 공연을 보고 리뷰를 쓰는 1-2주 정도의 시간을 넘긴 흔치 않은 경우로 꽤 발효와 증발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뇌리에서는 계속 떠도는데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묘함이 있다.
우선 이 작품이 나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이 작업의 출발이 되는 ‘춘앵전’ 때문이었다. 19세기에 창작된 이 주옥같은 궁중정재 홀춤이 43명 무용단 전원이 포함되는 작품으로 양적으로 팽창되는 지점 역시 호기심을 갖게 했다. 화문석 위에서만 추어졌던 춘앵전의 압축성과 간결함이 대극장 위에서 펼쳐지는 것을 상상만 해도 극단적이고 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안무가 안애순은 화문석이라는 공간을 선택한 우리 선조들의 감각이 이미 미니멀적이고 현대적이었다고 보면서 전통에 현대성이 숨어 있다는 ‘발견하는’ 접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근래 본인 창작의 중요 주제가 ‘공간’이어서 인지, 화문석이라는 공간의 재료성도 자세히 들여다 본 듯 하다. 돗자리의 꽃문양으로 일상을 흐드러진 꽃밭으로 변화시켰던 우리의 미적 감각을 담은 화문석은 가로와 세로의 짜임새만으로 완전히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낸 미학과 삶의 지혜가 녹아있는 공간 아닌가. 안무가는 그 짜임새에서 ‘행’과 열을 보고, 춘앵무의 시대를 읽었다. 그것은 정재의 춤판의 짜임새로 연결되고 그 시절의 체제를 읽어내는 도상적 이미지로 보았다.
왕 앞에서 추어지는 봉건성과 봉건이 해체되는 위태로운 근대의 예감 속의 춤 ‘춘앵무’에서 물질세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시스템은 안애순에게는 ‘기록’의 창고에서 꺼낸 탈주의 출발점이다. 그것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 그래서 거기서부터 보여주겠다는 어쩌면 평이한 이야기가 특별하게 묘해지는 이유는 뭘까?
안애순 〈행 +-〉 ⓒ국립무용단 |
이 작품은 1부와 2부로 짜여져 있고, 1부는 앞서 말한대로 춘앵무와 춘앵무를 에워싼 과거 세계의 매트릭스를 대열의 구조로 보여준다. 43명이 줄 지워진 무대는 꽉 차다 못해 복잡하고 답답해 보인다. 홀춤이 43개로 복제된 동시에 행과 열의 구조로 빈틈을 주지 않는 것, 그 자체로 의도했 건 안했 건 지금의 감각엔 맞지 않는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무대의 몸들은 넘쳐나 시각은 꽉 찼는데, 소리는 고요하다. 간혹 나무 막대기 두드리는 소리가 시간이 구조를 만드는 가운데 정재 앞에 불려지는 ‘창사’가 무희들의 가려진 입에서 흘러나오듯, 무대 위 춤꾼들의 목소리로 잔잔하게 ‘창사’가 들린다. 이 감각에서 봄의 밤, 꽃과 청춘, 꾀꼬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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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정월하보(娉婷月下步) 나수무풍경(羅袖舞風輕) 최애화전태(最愛花前態) 청춘자임정(靑春自任情) |
고울사! 달빛 아래 걸으니, 비단 옷소매에 바람이 일렁이네 꽃 앞의 자태가 참으로 사랑스러우니 청춘에 정을 맡기려네 |
- 원문: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물론 1장과 2장 사이 ‘막간’에 무대장치가 거대한 움직임을 시작하면서(무대디자인 김종석), 진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이승희’ 소리꾼이 꾀꼬리 얘기를 노래하지만, 1장에서의 행과 열이 조금씩 흐트러지면서 노래 소리가 들리는 이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묘하다.
1장이 정재에서 느낄 수 있는 단아함과 유유자적함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드러내고 관객이 달콤하게 빠져드는 것에 만족해 할 때쯤, 그 꿈을 깨어 주는 것이 2장이다. 그리고 작품을 본 관객들은 다 알다시피 2장엔 전통 이런 거 없다. 2장에 있는 것은 오로지 국립 단원들이 현재적 몸과 춤이다.
이 작품이 묘하다는 얘기를 하다 여기까지 왔다. 리뷰를 하다보니 그 묘함의 정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화적 유전자에서 출발해 긴장하지 않게 하였고, 거기에 다가가 발견하는 자연스런 접근을 방법론으로 다시 긴장을 빼주었으며, 거시적 감각인 사회의 시스템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면서, 그 안의 춤들과 분위기는 미세하고 느린 거시와 미시의공존에서 나오는 ‘극단적이면서 다채로운’ 인지적, 감각적 자극에서 오는 것이었나 보다.
안애순 〈행 +-〉 ⓒ국립무용단 |
이 작품은 명료하다
묘한데 명료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다. 춤은 모호함이 장점이고 특성이라고 이해되고 오해되는 가운데, 이 작품의 명료성은 안무가의 작업의 방식과 그것에 대한 안무가의 인식에서 나온다.
난 이 작품이 실험적이라고 본다. 문제를 설정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디자인하여 그 디자인대로 실험을 시작하고 끝낸다. 그리고 설정된 문제에 따른 결과가 도출된다. 이게 과학적 실험의 루틴이다. 안애순의 ‘전통을 현대화’하겠다, “전통의 재료가 동시대 감각으로는 어떻게 확대되어서 춤으로 구체화 될 수 있을지를 실험”하겠다는 천명은 말 그대로 실험된다. 그가 이 실험에서 사용한 방법은 개인성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개인성을 압도했던 획일성의 규범을 해체하는 것으로 그 길을 삼는다. 그리고 그 대조를 교과서처럼 보여 준다.
안애순 〈행 +-〉 ⓒ국립무용단 |
1장이 소색(素色)의 의상은 2장에서 개인마다 다른 다자인과 색의 옷(의상 디자인 김유진의 개념에 의하면 조각보를 차용한) 으로 바뀌고, 장치와 조명(후지모토 다카유키) 모두를 압도하며 몸들의 춤이 난무한다. 그 춤은 개인별 과정을 거쳐 “채집”의 과정을 거쳤고, 안무가를 통해 구성되고 배열되었다. 물론 한국춤으로 수련된 훌륭한 기량의 춤꾼들의 몸에 그들이 수련한 한국춤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는 전제이자 가설을 깔고, 그 내장된 춤들을 끌어내어 채집하는 방식으로 ‘춤’을 만들었다고 한다. 2장이 중요한 이유는 실험의 본론이자 결과가 담긴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실험의 결론이 하나의 이론이 되고 일반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수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논쟁과 설득이 켜가 쌓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분한 선행연구가 되도록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이야기를 이 실험으로 한정 지을 수밖에 없는 제한이 있다.
안애순 〈행 +-〉 ⓒ국립무용단 |
2장으로 다시 돌아가, 난 이 장을 춘앵무라는 궁중의 전통춤을, 지금에 살려, 서구적 극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작업으로 읽는다. 안무가에게 극장은 자신의 작품을 펼쳐 놓는 이미 너무 익숙한 곳이라 화문석은 얘기가 되지만 극장은 따로 얘기가 되지 않으나 이 작품의 위상은 전통의 현대화라는 우리의 현대안무가들의 오래된 담론과 실천에 힘입고 있으며 그 연장선 속에서 그 진가를 살필 수 있다. 게다가 안애순 안무가는 안무를 시작한 1984년 이래 한국 전통을 재료로 사용한 작업을 본인의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음을 밝힌바 있다(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춤작가 공개 심층 인터뷰 #3 안애순_24.9.24_예술가의 집).
이 맥락 속에서 본다면, 〈행 +-〉은 몇 가지 전략으로 서구적 극장 안으로 전통춤이 불편하지 않게 들어 온것에 성공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우선 시각적으로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이동하는’ 무대장치였다. 하얗고 반투명하며 굴곡을 가진 흔한 건축 재료로 만들어진 무대 천장에 육박하는 이 장치의 덩어리는 무대가 고려되지 않았던 우리의 들판과 마당과 집안의 춤들의 빈부분을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장대처럼 세워진 것만으로 채운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돌고, 열리고, 닫히면서 춤과 함께 거대한 몸통으로 조용히 나름의 춤을 조화롭게 추었다. 이 부분은 이 맥락에서 획을 그었다,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안애순 〈행 +-〉 ⓒ국립무용단 |
그 다음은 ‘육성’을 사용한 것이다. 앞서 말한 연행자들의 노래와 이승희님의 정가풍의 현대적 노래가 준 감흥이다. 한국춤은 아직도 악가무일체의 정신을 지키려 애쓰며 그 약화된 형태로 삼현육각 등 라이브 반주를 동반한다. 〈행 +-〉에서는 재주를 올리는 사람이 나와 부르는 창사의 형식을 살리고, 그것을 이승희 소리꾼의 소리로 확장한다. 춤이 뚜렷한 정조에서 시작되며, 그것은 시를 통해 공유되고, 노래로 불려지던 정대의 형식이 춤에 밀려 사라지지 않고 잘 확장되어 무대 안으로 들어 왔다. 건조해지기 쉬운 동시대 춤에 서정적이고 육감적인 정취를 주었다.
안애순 〈행 +-〉 ⓒ국립무용단 |
마지막으로는 음악감독 김홍집‧이진희의 협업으로 탄생한 〈행 +-〉의 음악이다. 1장과 2장의 대조도 훌륭한 기법이었지만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은 2장의 EDM이다. 춤추기에 편했고, 신났다는 말초적인 것 외에 이디엠이면서 한국적 신명을 향하는 지향이 춤의 지향과 잘 맞았기에 객석도 들썩일 수 있었다. 객석을 들썩이게 하는 건 그야말로 현대춤이 잘 한다. 자유자재로 댄스음악을 사용하고 관객을 신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신명으로 나서는 음악이 보여준 미덕은 새로운 안무법에 어색하고, 불편한 무용수들이 그들에게 익숙한(결은 조금 다르지만) 신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차 그 리듬에 익숙해지며 춤도 신명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냥 신만 나자면 클럽 분위기를 모방하면 된다. 이 작품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질감은 어디서 온 걸까? 앞에서 축적된 작품의 과정, 그리고 자기로부터 나온 움직임이지만 색다른 안무적 배열로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춤을 소화해 낸 춤꾼들의 노력과 그 ‘시간’아니었을까? 이 과정으로 지켜보는 여유가 허락되면서 관객도 작품으로 흡수될 수 있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춤을 위한 음악이란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중략) 이런 고민 속에서 우리는 가지고 있는 음악적인 재료들을 한껏 채워 넣었다가 비우고, 덜어내었다가 다시 더하는 작업을 반복하였습니다”
안애순 〈행 +-〉 ⓒ국립무용단 |
이 글을 마무리 하려니 큰 것을 놓친 느낌이다. 두 개 정도 인 거 같다. 첫째는 춤꾼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 얘기를 다 담자면 다른 글자리가 필요해 보인다. 이 안에 소소하게 다루기에는 그들의 ‘빼고 더하는’ ‘비우고 채우는’ 〈행 +-〉을 위한 춤법의 어려움에 대해 더 들어봐야 할 거 같다. 춤꾼이 주인인 공연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기약한다.
둘째는 이 작업 가져오는 작품 관련된 얘기 외의 한국춤을 현대화하고, 현대춤에 한국적인 것을 담으려는 많은 안무가의 고민과 그 맥락에서 이 작품의 한계를 다루지 못한 것이다. 1개의 실험에 불과한 이 작업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도 없고, 정답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여태까지 탈피가 어려웠던 묶은 문제를 조금은 푼 것 같아 ‘지연된 해결’의 느낌이 있다. 지연되었다는 건 피해갈 수는 없다는 것의 반증이고 우리를 그 지점으로 데려다 놓고 뚜렷하게 보이게 해준 공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생각들을 소통하고 나누는 자리가 필요하다. 이 작업 덕에 그런 자리가 많이 생겼으면 한다.
이 작품이 명료하다는 소제목에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면, 복잡한 얘기 다 빼고 ‘이 작품은 우리의 오래된 것들을 오랜 만에 함께 잘 즐기게 해주었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