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의 귀소본능. 그 욕구는 무엇보다 춤을 떠나 있었던 이들의 그것이다.
선화예중고,서울대를 졸업할 때까지 춤만 추던 이였다. 거주지를 미국으로 옮기고 육아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문득문득, 아니 늘 춤이 추고 싶었다고. 김경은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내 대학과 초중등학교에서 직접 공연과 워크숍 기회를 만들어 춤을 추기에 이른다. 춤추지 않고 지내는 삶을 견뎌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일이기도 했을 터. 헛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그의 춤적 자질과 깊이를 본다.
생각보다 자신과 춤의 유대는 강했고, 급기야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학위(서울대박사)를 취득하는 힘든 과정까지 마친다. 춤으로 인한 기대지평은 그만큼 더 넓어졌으리라. 이후 미시시피 주립대학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지만 정작 실제적인 삶에서 춤과 잠시 멀어진다고. 하지만 이 또한 다른 형태의 기다림이었다는 것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훈련된 기다림. 그 기다림은 그 스스로 와야 할 어떤 것의 발걸음처럼 자주 유연해지고, 그때마다 춤(삶)은 그 구체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 말이다.
〈김경은의 춤, 진무(眞舞)〉(한국문화의 집KOUS, 10월 5일). 2007년 첫 개인공연 〈참춤〉-이애주류 김경은의 춤-이후, 17년 만의 개인공연 무대. 순수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담아 추는 1장 ‘초심’, 기본을 중시하는 몸짓과 숨의 2장 ‘회귀’, 그리고 피고 지는 생장수장의 삶을 담은 3장 ‘순환’으로 꾸렸다. 춤을 본다.
김경은 〈태평무〉 ⓒ배호성 |
1장, 김경은의 홀춤 ‘태평무(한영숙류)’. 고요하게 돌아서고, 팔을 모으고, 나눠들고 한 쪽 치맛자락을 슬쩍 올려 잡고, 발을 내딛고, 슬쩍슬쩍 돌아서며 팔을 감아 드는 춤에 내내 조심스러움이 묻어난다. 긴장한 듯, 채 편안하게 풀어지지 않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춤. 단단한 기본기가 춤을 받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품위있고, 우아한 춤태를 가지고 있다. 중간무대에 선 ‘이애주춤보존회’의 주연희,안지현,강은지,정다연의 ‘이애주류본살풀이’. 먹빛치마에 각기 보라, 노랑, 꽃분홍, 연노랑 저고리를 입었다. 차분한 어조로 덤덤하게 추는 춤사위에 담백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춤이었다.
김경은 〈살풀이춤〉 ⓒ배호성 |
2장, 흰치마저고리를 입은 김경은의 ‘살풀이춤’(한영숙류). 숨을 내쉬는 순간, 춤동작을 멈추는 순간, 애써 춤을 꾸며 추지 않을 때 그 속에 생기는 여백은 또 다른 춤이 생성되는 공간이다. 춤을 시작하고 정리하는 깨끗한 춤사위는 차분한 굿거리장단과 닮았으나, 춤사위에(만) 몰입하여 추는, 춤의 구체적 형태가 더 보이는 춤이었다. 잘추고자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춤(삶)에 여백이 생길 것이고 이는 자유로움으로 연결된다. 자유롭고, 편안하게 추는, 예술적 의지가 더 드러나는 춤이었으면 좋았을 듯. 이미 춤(춤사위)은 충분히 잘춘다.
〈예의춤〉 ⓒ배호성 |
신을 섬기는데 능하여 춤을 통해 강신하는 자, 무(巫). 무(巫)는 축(祝)이다. 인간과 귀신(조상)사이의 소통수단이 되고 제사 활동에서 복을 구하고 재앙을 피하는 데 중요한 양식인 무술(巫術), 제사는 춤과 관련이 있다. 그 무(巫)에서 예(禮)를 기본골격으로 뽑아 세운 ‘예의춤(이애주류)’. 이애주선생이 경기도당굿의 염불바라춤 장단과 춤을 토대로 만들었다고. 흥미로웠다. 상대를 높이는 절드림으로 시작되는 춤은 태극, 음양, 청홍의 의미를 담아 이 인무로 재구성한 듯. 두명의 춤꾼(주연희, 안지현), 승무고깔에 흰색 장삼을 입었다. 사선으로 서로 어긋나게 서서 시작되는 춤은 절드림 뒤, 앉았다가 일어나 나란히 서서 긴 장삼자락을 들어 흔들고 허공에 뿌리면 춤을 이어간다. 장단이 빨라지면서 춤선이 뭉개진다. 상고시대 중원문화의 자취에서 보이는 무(巫). “예(禮)가 사라지면 시골에서 구하라”고 했다는데. 어떤 마음을 어떻게 담아 추어야 예(禮)가 될지.
김경은 〈승무〉 ⓒ배호성 |
3장, 연지은의 가야금산조(최옥삼류) 연주로 잠시 숨을 쉰 뒤, 김경은의 홀춤 ‘승무’.
무심한 듯 툭 던진 장삼자락이 스륵 무대바닥에 내려앉는다. 춤에너지가 장삼자락을 따라가다가 바닥에 내려앉는 그 찰나, 승무고깔 아래 드리운 그늘. 날카롭고, 서늘하고, 뜨거운 기운이 모여있다. 무거운 것은 가볍게, 빈 것은 차오르게 하는 춤의 흥취는 그 그늘에 내재한 춤힘을 믿을 때 일어날 것이다. 타령, 자진타령으로 흐르면서 동작은 세밀하게 자로 잰 듯, 자신이 의도한(?) 곳에다 정확하게 발을 딛고 옮기며 장삼자락을 뿌리고 감고 돌아서는 춤태가 우아하고 아름답다. 앞서 춘 태평무와 살풀이춤과는 확연하게 다른 춤의 정조다. 애써 꾸미지 않은 춤은 정신 안에서 풀어져 해체되었다가 다시 춤 틀을 만들어 형식을 갖춘 뒤, 다시 풀어진다.
굿거리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은 뒤, 법고. 북을 친 뒤 뒤로 물러나, 앉고 일어서며 팔을 뿌리며 반원을 돌고, 길게 뻗어내는 장삼자락이 만들어내는 빈 공간을 누비며 무심하게, 슬쩍 두드리는 북. 장단을 짚어내는 춤선과 북가락이 깨끗하다. 양팔을 크게 휘두르며 북을 치는 춤사위(필자가 주의를 기울이고 보는)에서 보이는 절제된 조형미. 감정으로 꽉 채워지지 않아 생기는, 돋보이는 부분이다. 동작의 효율성 측면에서 보자면 즉각적인 표현보다는 감정의 절제에 함축되어 있는 저력의 표현이 비움과의 상호 연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 장단을 타고 흐르는 춤은 분별을 넘어서고 있다.
승무는 장삼을 모으고, 뿌리고, 자락을 걷어 올리는 다양한 상체동작을 하체 동작이 단단하게 받쳐줘야 좋은 춤을 출 수 있다. 그래야 상·하 호흡의 조화로 동작과 동작 사이에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은 승무의 중요한 요소다. 김경은이 가지고 있는 춤몸이다. 게다가 긴 호흡을 한 번에 모아 끝까지 쓰는 춤에너지가 탁월하다. 이러한 춤 선이 승무에서 발현, 공경과 마음을 다해 추는 정감의 상태로 들어가 아름다운 춤으로 드러난다. 앞서 춘 태평무와 살풀이춤보다 승무에서 김경은춤의 진가가 드러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역》에서 좌선(左旋)으로 과거를 알고 右旋(우선)으로 미래를 아는 것이라 했다. 무술(巫術)에서의 동작, 즉 춤출 때 ‘왼쪽으로 도는 것’과 ‘오른쪽으로 도는 것’에서 유래했을 거라 한다.
춤은, 특히 한국 전통춤사위는 큰 동작과 작은 동작의 분화와 상호작용으로 조화를 이루며 확장된다. 이때 일어난 처음의 춤사위 하나 안에는 이미 모든 춤이 존재하고 있다. 처음의 동작이 그다음 동작으로 또 그다음 동작으로 번지고 확장되며, 춤사위의 상호관계를 통해 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춤사위의 합들이 승무도 되고 살풀이도 되는 것이다. 춤사위 한 동작에서 춤추는 이의 다음 춤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쪽으로만 돌며 춤추지 않는 것처럼, 거슬러 스승의 뜻을 기리며 앞으로는 춤을 통한 성찰에 매진하다보면 깊고 넓게 춤(학문)이 확장될 것이다.
춤을 해석하는 견해가 다르고 때론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춤으로 (이애주)스승의 정신을 기리고 따르는 마음은 하나일 것이기에.
정감과 상상은 이지(理智)와 한데 섞여있다. 그것은 논리적 인식이 아니라 심미적 민감함이다. 춤추고 싶다는 바람, 흥취. 그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으로 있다. 그 높고 소중한 춤의 힘이 김경은의 어깨를 들썩거리며 깨어나 움직이게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김경은 춤의 흥취는 단단하고 면면하다. 춤현실을 단단하게 신뢰하며 그 탄력을 믿는 발걸음보다 더 감흥있는 발걸음은 없다.
〈김경은의 춤, 진무(眞舞)〉는 자신이 원하는 춤을 체계적이고 능동적인 춤의 실천으로 춤 현실의 또 다른 출구를 여는 동시에 또 다른 길을 내는 무대였다. 더 큰 춤의 세계를 향한 그치지 않는 김경은의 춤 정신의 한 태도에 큰 것이 있다. 그 시작을 본 듯하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