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조혜정, 이지현, 이남영 〈목전〉 〈1,024TB〉 〈이음-다가서다〉
무트댄스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꾀하는 춤꾼들
최찬열_춤비평가

잘 알려져 있듯이 무트댄스는 1990년대 이후 한국춤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춤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사단법인 무트댄스(현 이사장 김정아)는 이러한 명성을 지닌 무트댄스의 예술적 자산과 메소드를 이어받아 창립된 춤 단체이다. 그러니까 사)무트댄스는 1994년 창단된 김영희무트댄스가 근거가 돼 2019년 새롭게 탄생한 단체이다. 또한 사)무트댄스는 현재 한국춤 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단체는 그들이 보유한 역량에 걸맞은 예술적 성과를 가시화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사)무트댄스(이하 무트댄스)는 빼어난 실력을 갖춘 2, 30대의 젊은 춤꾼들과 경험이 풍부한 4, 50대의 중견 춤꾼들, 그리고 재능있는 여러 안무가를 포함해 50여 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큰 단체이지만 그들이 지닌 상징성에 부합하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근래, 그러니까 2022년 하반기 이후 무트댄스가 펼친 춤 실천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지난 8월 17일과 20일, 21일, 3일 동안 무트댄스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이탈리아 춤 단체와 협력해 만든 〈BE-MUT〉를 마련한다. 이 공연에서는 무트댄스와 이탈리아 현대무용단의 협업 작품과 무트댄스의 젊은 안무가들의 여러 작품이 무대에 올랐는데, 이중 임지우의 〈삶-죽음〉, 이혜인과 유다빈의 〈-cide〉 등, 젊은 감각이 가미된 무트댄스의 독특한 움직임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이 단체의 가능성과 저력을 풍족히 실감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무트댄스의 기대주 조혜정의 작품 〈목전〉(目前)(2022년 11월 24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이 제43회 서울무용제에 신설된 창작춤 경연대회 SEOUL DANCE LAB에서 최우수작에 뽑힌다. 그리고 20대의 이지현과 40대의 이남영이 지난 12월에 열렸던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 무대에서 무트댄스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추동하는 인상적인 작품 〈1,024TB〉와 〈이음-다가서다〉를 각각 선보인다.


젊은 감각으로 탈-구축한 무트댄스

사회 문제를 직시하고 선진적인 예술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새로운 안무법을 모색하는 소극장 창작춤 경연대회 Seoul Dance Lab의 2022년 공통주제는 ‘전염의 무도(舞蹈) - 코로나 시대에서의 춤의 실천’이었다. 조혜정의 〈목전〉은 이 주제를 표현적이면서도 상징성이 강한 무트댄스 움직임으로 잘 풀어낸다. 기실 3년 전에 시작된 팬데믹 상황은 지금까지 인류의 삶과 일상생활을 옥죄며 구속하고 있고, 인류는 이런 답답한 삶과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애쓰지만, 출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조혜정의 공연 〈목전〉은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자 탈출구를 찾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딱딱한 알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새에 비유해 보여주는 느낌이 강하고 뚜렷한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조혜정 〈목전〉



어둠 속에서 흰 투명 천을 전신에 뒤집어선 두 명의 춤꾼이 부둥켜안은 채 엉켜있는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이들은 마치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처럼 힘겹게 움직이며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곧이어 둘은 떨어져 민첩하고 절도가 있는 움직임을 구사하기도 하는데, 이는 갇힌 상황을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급기야 그들은 알의 껍데기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던 천을 벗지만, 자유와 희망이 성큼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다. 그와 동시에 한 춤꾼이 큰 이동형 2층 선반 위에 축 늘어진 춤꾼 둘을 마치 짐처럼 실은 채 무대에 등장한다. 이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압박받거나 시달림을 당해 지쳐 쓰러진 사람들의 몸뚱이일 것이다.

 



조혜정 〈목전〉



하지만 춤꾼들은 곧 일어나 힘차게 움직이고, 때로는 비스듬히 대형을 맞추거나 혹은 일렬로 전진하는데, 이는 팬데믹 상황에서 짐짝 취급을 당하는 인간의 몸과 생명의 가치를 회복하고, 고난을 헤치며 희망을 찾아 나아가는 춤으로 보인다. 그러나 희망은 목전에 있는 듯하지만 쉽게 잡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생생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그러다 무대 중앙에 놓인 이동형 선반 주위에 모여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출구를 찾기 위해 골몰하듯 모두 생각에 잠긴다. 잘 훈련되어 역량이 출중한 춤꾼들의 역동적인 춤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는 춤 보는 이들의 쾌감을 자극하고, 진취적인 면모와 기풍을 지닌 매혹적인 군무는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젊은 감각으로 탈-구축한 무트댄스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좋아 보이는 조혜정의 〈목전〉은 한껏 머금은 숨을 일시에 토해내는 호흡과 조응하는 듀엣 춤과 3인무 그리고 5인무를 적절하게 엮어 짠 춤으로 주제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깔끔한 공연이다.


새로운 감각을 입힌 무트댄스

무트댄스의 단원이자 춤 단체 22 Collective LAB의 대표 이지현은 SCF 무대에 그의 작품 〈1,024TB〉(12월 20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를 올렸다. 제목에서 보이는 TB, 곧 테라바이트는 전산 처리에서 기억 용량을 나타내는 정보량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며, 1테라바이트는 1,024기가바이트에 해당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비트(bit)는 그 크기에 따라 메가바이트, 기가바이트, 곧 MB, GB 등으로 약칭되어 불린다. 한 비트는 0 또는 1을 나타내며 비트 8개가 모이면 다시 바이트(byte)가 된다. 바이트가 1,000개 모이면 킬로바이트(KB)(1KB는 정확히 1,024바이트이지만 편의상 1,000바이트로 여긴다), 1,000KB, 즉 100만 바이트는 1MB가 된다. 마찬가지로 1,000MB는 10억을 의미하는 기가(giga)를 붙여 1기가바이트(GB)라 부른다. 그리고 이번 공연의 작품 제목에 해당하는 1,024TB는 PB(페타바이트)라고 부른다.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저장 용량은 언제나 그보다 더 큰 저장 용량에 포함되며, 그럴 때마다 다르게 부른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춤 만든 이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저장 공간이 비워지고 채워지는 과정을 우리의 삶으로 치환해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지현은 〈1,024TB〉에서 우리의 삶은 비움과 채움의 과정의 연속이고, 우리는 이렇게 반복하고 순환하며 흘러가는 삶과 인생을 초연하게 받아들이자고 말하는 것이다.

 



이지현 〈1,024TB〉



조명 빛이 서서히 무대를 밝히면 무대 중앙에 선 큰 사각 프레임이 보인다. 이는 컴퓨터 화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틀 잡힌 하나의 저장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한 명의 춤꾼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아마 그는 1비트, 1메가바이트 혹은 1기가바이트나 1테라바이트 등으로 불리는 하나의 정보량을 대표하는 것이리라. 그가 사각 프레임 안에서 위아래로, 양쪽 옆으로 요동치듯 움직이다가 프레임 위로 벗어나면 조명이 컷 아웃되고, 그와 동시에 관객이 보기에, 무대 오른쪽 앞에 깔린 흰 사각 프레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주위에 검은 의상을 입은 4명의 춤꾼이 모여있다. 흰 프레임과 춤꾼들의 검은 의상이 뚜렷하게 대비되고, 또 프레임 주위를 온통 둘러싼 검은 무대로 인해 흰 프레임은 한층 더 도드라져 보인다. 춤꾼들은 프레임 안으로 팔과 몸을 반쯤 밀어 넣기를 반복하다가 프레임 안으로 쑥 들어가는 등, 프레임의 안과 밖 그리고 가장자리에서 움직임을 이어간다. 망설이듯 프레임 주위에서 서성거리던 춤꾼들은 프레임을 채웠다가 비우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춤꾼들은 프레임 주위를 뛰어서 돌다가 일시에 퇴장하는데, 그 순간 빈 프레임만 무대에 덩그러니 남는다. 아무것도 없는 퍽 허허로운 공간이다. 이것을 못 견뎌 끊임없이 빈 곳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듯, 이내 춤꾼들이 다시 등장해 프레임 주위를 돌고, 프레임 위에서 움직인다. 그들의 움직임은 절도가 있어 조합이 잘 맞고 잽싸면서도 유려하다.

 



이지현 〈1,024TB〉



이어지는 장면은 무대 중앙에서 시작된다. 그곳에 프레임이 깔려 있고, 그 위에서 두 명의 춤꾼이 움직이고 있다. 둘이 조화롭게 움직이며 각각 프레임을 벗어났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사이, 무대 왼쪽 뒤로 다른 프레임을 든 춤꾼들이 등장하고, 뒤이어 무대 위에는 4개의 프레임이 형성된다. 춤꾼들은 나뉘어 각각의 프레임 위에서 춤을 추고, 때로 프레임은 반으로 접혀 들어 올려지기도 한다. 또한 프레임은 간혹 빈 상태로 하얀 공허함을 드러내고, 또 반대로 조명 빛이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3개나 4개로 드러나기를 반복하던 프레임이 갑자기 다 사라지고 검은 옷을 입은 춤꾼들과 검은 무대만 보이는 검고 어두침침한 막막함이 조성되기도 한다. 9명의 춤꾼은 프레임 안팎에서 때로는 각각이 그러다 다 같이 군무를 펼치는데, 프레임의 일시적 소멸과 동시에 춤은 어지럽게 흐트러지지만, 이내 일사불란하게 질서를 회복한다. 이를테면 공연은 흑과 백, 비움과 채움, 명(明)과 암(暗) 그리고 무질서와 질서를 오가며, 두 대립 항은 적대적이지 않고 서로 기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다. 우리의 삶의 방식과 생명 혹은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게 하는 것이리라.

 



이지현 〈1,024TB〉



각각 분리되어 있던 4개의 프레임이 무대 중앙에 모여 하나의 큰 프레임으로 합체하면서 마지막 장면이 시작된다. 저장 용량이 한 차원 높게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춤꾼들은 무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작은 프레임들을 어깨에 메고 무대 중앙으로 끌어와 붙여놓는다. 그리고 10명의 춤꾼이 콘셉트를 구현하기 위해 이전과 비슷한 방법으로 움직이지만, 이번에는 조형성을 강조하는 춤이 곁들여진다. 가령 춤꾼들이 일렬로 서서 맨살이 반쯤 드러난 팔을 연이어 붙여 물결이 일렁이는 모양을 만들어내고, 또 큰 프레임 오른쪽 가장자리에 일렬로 서서 상체와 팔을 이용해 웨이브 동작을 한다. 그러다 9명의 춤꾼이 희고 큰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드러눕고, 그와 동시에 프레임 왼쪽에서 한 명의 춤꾼이 중앙으로 서서히 걸어 나와 객석을 응시하다 급하게 엎드리면 무대는 컴컴한 암흑 속에 잠긴다. 크고 흰 프레임 안에 검은 옷차림의 춤꾼들이 차례로 반듯하게 눕는 모습이 흡사 죽음으로 회귀하는 순교의 행렬처럼 보이는 의미심장한 마무리 장면이다. 이지현의 〈1,024TB〉는 새로운 감각을 입힌 무트댄스 움직임과 오브제를 요리조리 배치해 재치 있게 엮은 매끈하고 담백한 구성과 사유를 자극하는 참신한 주제가 돋보이고 세련된 맛이 있다.


동시대성을 더한 무트댄스

LNYdance의 대표이면서 무트댄스 계열의 춤을 추는 이남영의 공연은 언제나 주제와 메시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게 강점이다. 제32회 SCF 무대에 오른 이남영의 〈이음-다가서다〉(12월 1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2022년 4월에 초연되었던 1시간 분량의 긴 작품을 20여 분으로 축약해 주제와 메시지를 강화하고 완성도를 높인 공연이다. 이번 SCF 무대에 오른 〈이음-다가서다〉는 버전 2에 해당하는 셈이다. 초연 공연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심연에 대해 천착했다면, 이번 공연에서 그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고립된 인간 실존의 고독감과 외로움 혹은 불안감을 형상화하는 데 집중한다. 이번 공연은 존재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실존의 불안한 심리를 탐색하는 공연이다. 이남영은 변화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초연 때 주요 오브제로 활용했던 끈 대신에 특수 조명을 이용한다. 이는 현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무대 양쪽 다리-막 사이에 각각 4개 식 설치된 빔 조명기에서 무대 쪽으로 발사되는 강렬한 직사광이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무대 위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8개의 강렬한 직사광은 때로는 무대 공간 전체를 둘러서 덮거나 싸고, 또 다르게는 춤꾼들을 여기저기로 나누어 놓는 역할을 한다. 무대 전체는 하나의 세계처럼 보이고, 그 세계와 그곳에 속한 인간들은 휘황찬란한 빛이 조성하는 스펙터클 이미지에 갇혀 있는 형국이 연출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빛은 한 세계의 사람들을 갈라놓고, 그들 사이의 소통을 통제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속한 세계 전체를 통째로 포획하고 있다.

 



이남영 〈이음-다가서다〉



막이 열리면서 시작되는 임지우의 강렬한 솔로 춤은 이런 세계에 속한 실존의 불안한 정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무대 앞 중앙에 서서 객석을 바라보던 그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듯이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올리며 고개 들어 하늘을 보고, 빠르게 몸을 수축하며 재빠르게 돌아서 한 손을 격렬하게 떨다가,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듯 팔다리를 휘젓고 머리채를 휙휙 돌린다. 느낌과 감응이 세고 강한 도입부 춤이다. 그 순간 무대는 양쪽 다리-막 사이에서 천장 쪽으로 쏘여진 빛 그늘에 온통 뒤덮여서 어두침침하다. 그리고 임지우는 암울한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무대 중앙으로 느릿느릿 이동하고, 두 춤꾼이 그를 맞이하며 3인무가 펼쳐진다. 셋은 서로 부축하고 나란히 서서 앞 사람의 등에 상체를 기대면서 의지하고, 또 무대 바닥에 네 발 가진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다른 이의 등을 의자 삼아 살며시 앉아 위안을 얻는 등, 친밀하게 접촉하며 움직인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고 무덤덤하다. 가까운 물리적 거리에 비해 아무런 정서적 교류가 없는 역설적 상황이 조성된다. 몸과 달리 마음은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고, 서로 직접적으로 만나는 산 경험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함께할수록 서로 멀어지는 심리적 거리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3인무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공간, 혹은 세계가 맺고 있던 감응 관계가 깨지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이남영 〈이음-다가서다〉



이어지는 군무에서 9명의 춤꾼은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갑자기 한데 모였다가 뿔뿔이 흩어지고, 또 무대 여기저기를 조급하게 뛰어다니기도 하는데, 이때 도망자를 수색하는 탐사 조명처럼 위아래로 다급하게 움직이며 춤꾼들을 비추는 빔 조명기의 강한 불빛에 의해 무대는 한층 더 불안감에 휩싸인다. 불안감이 극한으로 치달을 즈음, 무대 왼쪽 뒤에 우두커니 서서 상체를 위아래로 흐느적거리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던 한 춤꾼이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나온다. 그는 무대 앞을 가로질러 가며 소리치기 시작한다. ‘넌 왜 내 손을 잡지 못해, 왜 왜’ ‘함께, 순간, 물, 바람. 기억’ ‘나는 존재하고 있어 집중해, 생각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외치며 무대를 돌아 이동한다. 생생한 경험과 직접적인 소통이 없는 세계에 속한 그는 점증적으로 차오르는 불안 심리를 몸짓으로 드러내는 대신에 단말마적인 목소리로 토해낸다. 춤과 음성이 공명하며 불안감이 증폭되는 절묘한 시청각적 상황이 연출된다.

 



이남영 〈이음-다가서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 ‘마침내’라는 외침과 함께 군무가 시작된다. 춤은 최고조로 고양되는 불안한 감정을 떨쳐버리려는 듯 점점 더 세차고 치열해진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내리쬐는 조명 빛은 무대 공간을 여러 국지적 지점으로 구획하고 분할하며, 무대 양옆의 빔 조명은 무대 전체를 압도적으로 짓누르고 있다. 지친 듯한 군무가 점점 잦아들며 무대 위에는 한 명의 춤꾼만이 외롭게 남는다. 하지만 그는 다시 암흑과 같은 무대 중앙으로 기어서 기꺼이 들어간다. 공연 내내 무대에 작렬하는 강한 빛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공간, 세계 등의 만남을 방해하며 고립되고 소외된 개인들의 사회를 만들어낸다. 이남영은 8개의 빔 조명기를 다소 과할 정도로 활용하면서 화려한 각종 빛 이미지가 세상을 지배하는 스펙터클 사회에서 소외되고 왜소해진 인간 군상의 불안한 심리를 현대화된 무트댄스 움직임으로 명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남영의 〈이음-다가서다〉 버전 2는 운동하는 빔 조명을 중심 표현 기제로 삼아 스펙터클한 빛 이미지 아래서 구성되는 사회적 관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솔로 춤과 듀엣, 3인무와 군무 등 여러 형태의 춤과 대사와 말, 퍼포먼스를 알맞게 섞어 구성한, 동시대성이 더해진 무트댄스로 스펙터클 시대를 사는 고립된 실존의 내면을 탐색하는 의미 있는 공연이다.

“사단법인 무트댄스는 창작춤의 새 패러다임을 추구합니다.” 무트댄스의 모토 혹은 캐치프레이즈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트댄스의 독창적인 호흡법에 근거한 표현성 짙은 움직임을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작업을 통해 현대적 감성에 맞게 더욱 가다듬고, 무트댄스에 젊고 새로운 감각을 더하는 예술적 실천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이미 있는 무트댄스의 독특한 감각을 유지하고 보존하면서도, 여기에 동시대성을 입히는 작업이다. 평자가 최근 2년여 동안 주목한바, 무트댄스는 이미 이런 변화를 이끌만한 인재와 물적 인프라를 모자람 없이 넉넉히 보유하고 있다. 이는 무트댄스가 한국춤의 구태의연한 유산의 족쇄로부터 해방되어 그들의 예술적 위상에 걸맞은 자리를 하루빨리 되찾아 한국 춤의 활성화를 이끄는 주역이 될만한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1990년대에 그랬듯이 무트댄스가 한 번 더 할 일은, 한국춤의 클리셰를 떨쳐내고, 역사적 한 지점에 요지부동 묶여있는 한국춤을 구출하는 것이다. 최근에 선보인 무트댄스 계열의 몇몇 공연, 곧 이혜인과 유다빈, 임지우와 조혜정, 이지현과 이남영의 공연에서 저력을 감지할 수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최찬열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

2023. 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