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과학기술과 협업하는 춤 공연 〈넌댄스 댄스〉와 〈이십삼각삼각〉, 장르 간 협업 프로젝트 공연 〈HIP 合〉 그리고 권령은이 안무한 개념무용 계열의 〈작꾸 둥굴구 서뚜르게〉, 또 춤성이 눈에 띄게 드러난 두 작품으로 꾸려진 〈맨 투 맨〉 공연 등 국립현대무용단(이하 국현)이 2022년 하반기에 무대에 올린 공연 현황을 잠시 일별해보아도 알 수 있듯이, 국현의 춤과 기획 활동 스펙트럼은 넓어 보인다. 동시대 한국 현대춤의 확장성과 다양성을 이리저리 고려하며 국현의 지향점을 찾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명한 처사로 보인다. 또 공공무용단인 국현이 마땅히 일정 정도 책임감을 지니고, 추구해야 할 과업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 국현이 달성할 때까지 좇아 구해야 할 예술적 목표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확장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국현만의 예술적 스타일과 특성을 다지는 춤 실천이 요긴해 보인다.
〈스텝업(STEP UP)〉 공연 프로젝트는 춤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고 핫한 안무가의 기존 작을 발굴하여 다시 창작할 기회를 제공하는 무대이다. 이로써 이미 있었던 공연은 업그레이드된 작품으로 탈바꿈하고 이를 국현의 레퍼토리에 포함하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올해로 다섯 번을 마친 이 프로젝트의 성과가 뚜렷하게 드러나거나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기획 의도와 취지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한 지속적인 시도는 바람직해 보인다. 다만 어떻게 양질의 작품을 지속해서 발굴하고 선정할 것인지가 숙제일 것이다. 그러기에 국현도 선정 방법을 바꾸며 이런저런 고심을 하는 것이리라. 어쨌든 〈스텝업〉의 취지와 의도 등을 이루기 위한 단계적 목표를 분명하게 세우고 이에 부합하게 실행해서 나가면 될 것이다. 필요하고 의미 있는 프로젝트로 여겨지기에 말이다.
발화하는 텍스트와 미래의 신화 짓기
올해 〈스텝업〉(11월 25~27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공연에는 두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2015년 초연된 후, 7년이 지나 이번에 개작되어 무대에 다시 오른 서영란의 〈버자이나의 죽음: 신화 짓기〉는 인류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점차 위축되고 왜소해진 여성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는 공연이다. 여성주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여 미래의 여성성을 사유하는 공연 콘셉트는 묵직하고 지금의 시대 상황에 부합하는 시의적절한 주제를 담고 있다. 그러나 공연의 구성은 단순하고 간결하다. 공연은 시종일관 퍼포머가 발화하는 텍스트와 대사, 그리고 잔잔한 움직임으로 짜진 장면을 비슷하게 반복하며 진행된다.
서영란 〈버자이나의 죽음: 신화 짓기〉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
블랙박스형 무대 양옆에서 다섯 명의 여성 퍼포머가 등장한다. 그중 한 퍼포머가 무대 중앙에 서서 객석을 응시하고, 나머지 네 명은 무대 양옆에 각각 둘씩 나뉘어 앉으면서 공연은 시작된다. “제가 자려고 누워있을 때 이런 느낌이 들어요.” 무대 중앙에 선 퍼포머가 대사를 하며 드러눕는다. 그러면 다른 퍼포머가 걸어 나와 그 위에 겹쳐 눕고, 둘은 조용히 호흡하다가, 밑에 누운 퍼포머가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제 기운이 제 몸을 넘어서 팽창하는 거예요. 계속 커지면서 온 공간을 채워요, 제가 공간이에요, 근데 제 몸은 뚜렷하게 인식돼요.” 퍼포머는 자신이 내뱉는 호흡과 함께 자기 몸 밖으로 나간 자신의 기운이 주변 공간과 하나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포개서 누웠던 둘이 일어나 무대 양옆으로 나가면, 다른 퍼포머가 무대 중앙에 앉아 대사한다. “6월 초 뒷산으로 산책하러 갔는데, 어떤 감각이 흘러 들어왔어요.” “하늘은 파랗고, 한가운데 노랗게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어요.” “공기가 후끈후끈해요.” 이 순간 다른 한 퍼포머가 다가와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앉는다. 그리고 대사가 이어지면 또 다른 퍼포머가 다가와 그들 뒤에 앉는다. 그러다 다른 한 퍼포머가 조용히 드러누우면, 앉은 둘은 그를 다정하게 바라보다 손을 그의 몸에 살며시 얹기도 한다. 그들은 친근하게 서로 머리를 붙이고 몸을 기대면서 다정하게 밀착하기도 하는데, 서로를 터치하는 손과 바라보는 눈길은 다정하고 친밀하다.
서영란 〈버자이나의 죽음: 신화 짓기〉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
대사는 계속된다. “옛날에 할머니랑 저랑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있던 때가 생각이 났어요. 그날 바람도 솔솔 불고 햇볕도 쨍쨍해서 보살펴지고 있는 느낌이 참 좋았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저 혼자 잔디밭에 누워있을 때가 있었는데 [...] 그날은 좀 다른 게 보였던 것 같아요. 나무랑 꽃이랑, 화초들이 할머니랑 저를 감싸주는 것 같았어요” 여성 퍼포머의 호흡과 손길, 눈길 그리고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빠져나간 기운이 사방으로 펴져서 주위 공간과 하나가 되고, 또 다른 퍼포머의 몸과 연결되어 급기야는 나무와 꽃 등 자연과 하나가 되는 형국을 과거의 몸 경험을 소곤소곤 전하는 말과 미세한 움직임으로 묘사하는 장면이다.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미약한 일련의 장면이지만, 자연과 대지 혹은 생명을 새로운 여성성을 세우는 미래의 ‘신화 짓기’와 연관 짓는 춤 만든 이의 생각이 살짝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서영란 〈버자이나의 죽음: 신화 짓기〉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
이러한 장면은 생태계나 자연 파괴로 인한 기후 위기 등을 암시하는 듯한 꿈 이야기로 이어진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 한 무리의 인어 떼들이랑 같이 있었어요. 근데 인어들의 다리를 자세히 보니까, 사람 다리 같은데 뒤틀려 있어서 기형이거나 뭉툭하게 잘린 모양이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은 원래 마을이었다가 침수가 되어, 그렇게 된 상태.”라고 말하는 등 계속해서 5명의 퍼포머는 비슷비슷한 장면을 연출하며 꿈과 무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몸 기억이나 경험 혹은 느낌을 단어나 문장, 혹은 텍스트로 말하고, 또 이것들을 뒤죽박죽 섞어 다른 생소한 문장으로 연결해 발화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서영란의 공연은 움직임보다 대사 위주로 진행되는데, 간혹 퍼포머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짤막한 대사들을 반복하거나 겹쳐 말하고 또 시간 차이를 두고 계속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는 다 같이 다소 활발한 춤을 추기도 하는데, 이는 서로의 움직임을 따라 하는 미메시스적 춤을 통해 친밀감을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 같다.
서영란 〈버자이나의 죽음: 신화 짓기〉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
공연에는 수미일관 연결되는 스토리텔링도 없고, 무대 장치와 별다른 오브제도 없다. 또 음악과 조명의 도움도 거의 받지 않는다. 꾸밈과 치장이 없는 단순하고 담백한 무대이다. 극장 무대라기보다는 차라리 현실 공간의 한 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없는 춤 공연이다. 곧 기존의 창작 관행이나 안무 혹은 운동하는 몸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굳이 애쓰지 않는 공연이라는 말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이는 기존의 춤 장치와 제도에 대한 불신과 또 이것들에 포획된 춤추는 몸에 대한 비판적 자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포획된 몸으로부터 탈주하는 것도 몸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또 이 같은 실천을 통해 새로운 몸짓 감각을 생성하는 힘도 결국 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가령 의식이나 정신이 아니라 몸의 잠재적 역능 또는 되기의 역량을 통해 탈주를 감행하고 변신할 수 있다면, 춤 공연에서 몸의 힘은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이때 몸이란 당연히 춤꾼의 몸을 일컫지만 비단 이뿐만 아니라 오브제, 무대 장치, 음성과 음향, 소리, 빛 그리고 이미지 등 각종 물질적인 몸, 곧 ‘~체體’ 혹은 ‘body’일 것이다. 예컨대 각종 몸을 요리조리 배치해 감응을 유발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유를 자극하는 몸적 상상력의 발현이 미비했던 서영란의 이번 공연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인문학적 사유가 도드라져 보였다는 말이다.
또 어지럽게 흩어진 파편적인 재료들을 요령 있게 재배치해 감응의 별자리를 구성하기에는 제시된 텍스트와 움직임이 너무 난해했다. 특히 서영란의 〈버자이나의 죽음: 신화 짓기〉는 말과 텍스트 위주로 짜진 일련의 장면으로 우리의 미세 지각에 스며들고자 했지만, 각종 클리셰로 오염되어 있는 우리의 일상적 감성을 뚫고 들어오기에는 지나치게 힘이 약했고, 또 콘셉트와 드라마투르기에 담긴 메시지는 의미심장했지만 이를 무대에 구현해 관객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설득력은 갖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퍼포먼스와 수행성
두 번째 무대에 오른 강요찬의 〈우리는〉은 2년 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자전거를 탄 여성 퍼포머, 짐이 가득 실린 대형 카트와 짐수레, 그리고 여러 가지 옷이 가득 걸린 옷걸이를 미는 퍼포머 등이 한꺼번에 무대로 들어오면서 공연은 시작된다. 그들은 무대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해 각자 짐을 정리해 놓는다. 마치 유니폼처럼 모두 흰색 슈트 차림인 그들은 마스크를 썼다. 각자의 얼굴과 정체성을 구별할 수 없는 복장이다. 그리고 모두 꽃 한 송이를 든 채, 무대 뒤에 일렬로 서면, 검은 의상을 입고 큰 화분을 든 남성 퍼포머가 등장해 무대 중앙 뒤에 마련된 마이크 앞에 선다. 이어서 그는 피리를 불기 시작하고, 이에 동조해 나머지 퍼포머도 다 같이 들고 있는 꽃송이가 마치 피리인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섞어가며 피리 부는 시늉을 한다. 여럿이지만 그들의 동작과 행위는 마치 하나처럼 비슷하다. 그러다 갑자기 피리 소리가 멎고, 퍼포머들도 각자의 행위를 중단한다. 그리고 그들은 제복과 같은 흰색 슈트를 벗고 각자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자기 옷을 입은 이들의 행위는 이제 제각각이고, 드러난 모습과 움직임에는 직업과 신분과 성격이 드러난다.
강요찬 〈우리는〉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
그리고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는 이, 낚시하는 이가 보이고, 또 성 정체성이 불분명해 보이는 이의 과시하는 몸짓이 전시되고, 디자이너가 등장해 옷을 재단하고, 스케이트보드를 단 여성이 지나가고, 야간 산행을 하는 듯한 남성이 길을 찾는 듯 객석 앞을 지나가고,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는 이,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술주정뱅이 등이 차례차례 무대에 등장한다. 이를테면 강요찬은 일상에서 떼온 여러 에피소드를 자유자재로 비틀고 변형해 관객 앞에 내놓아 보여준다. 우리의 일상이 너무도 평범하거나 진부하고, 새로운 것이 없기에 무대에 내놓인 장면들 또한 그러해도, 이는 흠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다 영화 〈레옹〉 속 주인공인 레옹과 마틸다, 또 오페라의 한 장면 속에 나올 법한 가수와 탭댄스를 추는 춤꾼도 등장한다. 곧 현실에 실존하는 인물과 영화나 오페라 속에서 재현된 인물이 무대에 한데 섞여 보인다. 전자가 실제를 재현하는 인물이라면 후자는 재현을 재현하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다 마틸다가 수류탄을 투척하는 듯한 동작을 하면 다른 퍼포머들이 일제히 몸을 숨기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는 성질이 다른 두 종류의 인물이 뒤섞여 포개지고 중첩되며 식별이 불가능해지는 상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지금-여기 한 무대에서 생생하게 재현 행위를 수행하는 인물이다.
강요찬 〈우리는〉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현실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는 계속된다. 로프를 잡고 암벽을 타는 남녀, 노란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쓴 이, 수영을 하는 이. 벌꿀을 채집하는 이,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이, 테니스를 치는 남녀 등 이들은 퍼포먼스를 펼치며 자신들의 행위에 걸맞은 옷을 갈아입는다. 이는 정체성의 비본질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듯하고 그럴 때마다 이들은 수시로 다른 인물이 된다. 곧 이들의 옷 갈아입기와 다른 행위 하기는 다른 사람 되기이다. 변신을 거듭하는 퍼포머들은 퍼포먼스를 통해 다른 사람 되기를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되기는 사이-되기일 것이다. 수행성 이론에서 반복되는 행위는 그것에 선행하는 문법적 주체를 갖지 않기에 말이다. 정체성은 시작도 끝도 없는 과정이기에, 우리가 ‘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듯, 퍼포머들은 정체성과 정체성 사이를 횡단하며 계속해서 고정된 정제성을 벗어나는 수행성을 실천하는 것이다.
강요찬 〈우리는〉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
그런데 공연에서 퍼포머들의 퍼포먼스는 현실을 재현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수행적 주체로 구성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퍼포먼스는 수행적인 행위와 재현하는 행위 사이에서 펼쳐지는 행위이고, 또 이들의 몸은 재현하는 몸과 수행적 몸 사이에서 방황하는 몸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일련의 퍼포먼스 끝에 한 퍼포머가 객석 바로 앞으로 나와 말한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면, 무대 위에서 특정한 행동들을 하는 퍼포머들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무대에서] 일상적인 행동을 한다면, 반복해서 수행한다면.” 마치 이번 공연의 의미를 이렇게 봐달라고 권유하는 듯한 매우 선명한 멘트다. 퍼포먼스보다는 말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는 게 상당히 아쉬운 지점이지만, 강요찬은 이번 공연에서 수행성 이론이라는 꽤 까다로운 철학적 문제를 건드린 셈이다.
강요찬 〈우리는〉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
지금 이 시대의 춤은 몸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상상력 사이에서 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번 〈스텝업〉 무대에 오른 두 작품은 지나치게 인문학적 상상력이 두드러진 공연이었다.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리지 않게 기우뚱한 균형을 유지하며 몸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몸적 상상력이 빈약한 춤은 공허하고 인문학적 상상력이 미미한 춤은 맹목적으로 보이기에.
최찬열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