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전시립무용단 〈월인천강지곡〉
오페레타와 춤이 스며든 무용극의 청신호
김혜라_춤비평가

최근 5년간 대전시립무용단의 정기공연은 지역적 소재와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국수호 선생에게 영향을 받은 전·현직 감독들은 대형 무용극 형식을 이어가며 타 장르를 적극 활용하여 현대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었으나 그럼에도 큰 맥락에서 과거와 차별화 된 극적 틀을 흔들 만한 요소가 뚜렷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 대전시립무용단의 신작은 기존의 방식에서 여러모로 탈피하려는 징조가 발견되어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서구의 오페레타와 한국적 무용극의 이질적인 조합이라니 말이다.

대전시립무용단 김평호 감독은 〈천몽-단재의 꿈〉(2021)에서는 신채호의 자주 독립의지를, 〈인연-가족사진〉(2022)에서는 대전학생민주화운동 같은 역사적인 소재로 교훈적인 무용극을 창작해 왔다. 스펙터클 한 장면 연출은 시청각적으로 화려한 볼거리를 주는 반면 단선적인 인물묘사와 미학적인 요소에서 아쉬움을 드러내었다. 동시대 패러다임에 감응할 만한 인물로 재조명하기보다는, 영웅적인 인물들의 역사의식 고취로 이끄는 감정 전시로 대중성에 무게를 두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대형 극장에서 춤만으로 이끌 수 없기에 현장 연주와 거대한 영상 여기에 대형 구조물 장치는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하였다. 작품에 따라 연출과 조안무를 공동으로 투입시켜 작품의 질적 변화를 꾀하기도 하였고, 무대 장치와 유기적인 연결성으로 입체적 생동감은 대형 극장에 맞게 구현되었다. 그럼에도 비단 대전시립무용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에서 주도하는 서로 엇비슷한 협업과 구성이 비용과 노력에 비해 상투적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대전시립무용단 〈월인천강지곡〉 ⓒ대전시립무용단/박상윤




꾸준하게 다른 장르와 무용극의 확장을 시도한 대전시립무용단은 이번 72회 정기공연에서 오페라에서 파생된 오페레타라는 장르와 손을 잡았다. 신작 〈월인천강지곡〉(11.18~19. 대전예술의전당)이 그것으로서 ‘월인천강지곡’ 가사를 아리아에 실어 작편곡한 곡과 무용극의 절묘한 협업으로 전작들에서 아쉬웠던 여러 부분을 해소시켰다. 물론 기존 무용극 특유의 선형적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기승전결 전개가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된다. 따라서 오페라나 연극, 뮤지컬과 같은 일정 시간 소요되는 이야기를 강한 이미지로 압축시키는 무용극만의 최대 장점을 구현한 점이 큰 변화로 주제를 명료하게 각인시켰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총 5장으로 구성된 극은 소헌왕후가 죽은 뒤 ‘월인천강지곡’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세종대왕의 심상으로 가는 경로로 각 장이 순식간에 펼쳐진다. 그렇기에 불필요한 설명적인 묘사와 과잉된 이미지에 동원되던 군무는 절제되어 있고, 맥락마다 적절하게 투입된 아리아는 세종대왕과 왕후의 숭고한 사랑의 의미를 비교적 적확하게 표현하였다.




대전시립무용단 〈월인천강지곡〉 ⓒ대전시립무용단/박상윤




세종 때 지은 ‘월인천강지곡’은 훈민정음 창제 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한글 문헌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언어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15세기 국어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월인천강지곡’이 작품에서는 한글 창제에 매진하는 세종의 학구적인 측면으로 갈음되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인간적인 면모와 사랑에 초점이 맞춰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들의 사랑을 조명하는 방식이 전작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계도적인 메시지로 거리감을 주었던 점에서 탈피한 점이다. 그렇기에 역사책에 기록된 박제된 인물(세종과 소헌왕후)이 아니라 오늘의 정서로도 공감할 만한 캐릭터로 소생한 듯하다. 물론 무용수와 성악가 두 명의 세종과 왕후가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조합이 그 역할을 톡톡하게 감당한다. 전체 극을 제3자의 시선으로 노래하는 아리아는 여타 다르지 않았던 듀엣 춤의 대화에 시적 의미를 입혀 ‘월인천강지곡’ 만의 애절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프롤로그부터 진중한 합창으로 퍼지는 아리아는 한 층 이 무용극을 인류보편적인 사랑의 시로 찬미하듯 노래한다. 그럼에도 이 두 장르의 조합은 서로 간 균형감을 잃지 않고 춤으로 과잉될 수 있는 감정을 상쇄시키기도 하고, 가사만으로는 부족한 인간적인 정취를 춤으로 충족시킨다.






대전시립무용단 〈월인천강지곡〉 ⓒ대전시립무용단/박상윤




1장에서는 이방원이 외척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소헌왕후 아버지 심온을 척살하는 장면과 이를 목도하는 왕후의 시선이 교차되고, 이 모든 정치적 상황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 세종의 심경이 한 공간에서 그려진다. 이 복잡 미묘한 관계와 감정을 한 장면으로 응축시켜 펼칠 수 있는 장르는 아마도 무용극밖에는 없을 것이다. 특히 바라는 칼날이 되어 심온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도구로 공격적으로 해석한 명장면 중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상징적이고 구도적인 바라춤이 아니라 차가운 금속 물질인 바라 자체로 안무한 현대적 바라춤의 재발견이다. 물론 극적 긴장감을 유도하는 군무 성격이나 전작들의 주제와 무관한 역동성이 아니라 서사 맥락에 맞는 갈등 구조인 것이다. 2장에서는 댄서들이 객석에서 등불을 들고 등장하며 세종이 백성들을 위한 한글 창제의 의지가 공유되는 장면으로 뻔한듯하나 오묘하게 뻔하지 않다.




대전시립무용단 〈월인천강지곡〉 ⓒ대전시립무용단/박상윤




빨라도 너무 빠르게 3장에서는 왕후가 죽는 장면으로 치닫는다. 뚜렷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아 절절한 이별 감정을 표현하는 춤이나 관객의 정서적 교감은 멀어진다. 단지 세종의 마음이 죽은 왕후에 대한 그리움에 방점을 두고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인상이다. 4, 5장에서는 훈민정음 창제와 이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갈등과 세종의 고뇌가 집중된다. 세종의 영웅적 치적으로 기울어져 왕후의 존재가 잊혀 질 즈음 아리아(메조스프라노 고은희)로 인해 죽은 왕후의 존재는 환기되며 세종과 매개된다. 다소 스토리가 예측되는 교과서적 전개이긴 하지만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펼쳐진 ‘월인천강지곡’이 성립되는 경로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묵직하게 울리는 노래는 비극적이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웠다.

“하늘의 달은 천개의 강을 비추지만 나의 달은 오직 하나의 강만 비추리다. 죽음보다 멀고 슬픔보다 깊은 강을 건너 당신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리라....”




대전시립무용단 〈월인천강지곡〉 ⓒ대전시립무용단/박상윤




이번 신작에서 가장 고무적인 것은 음악사용에서 불필요한 웅장한 연주(타악과 현악과 전자음악의 부조화)로 피로감을 유발했던 전작과 달라진 점이다. 주제에 적합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우아한 현악 연주와 비장한 아리아 선율이 극의 근육이 되어 힘 있게 춤을 받쳐주며 극을 견고하게 해주었다. 서구의 오페레타 장르와 한국 창작 무용극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은 기대보다 훨씬 서로의 틈새에 스며들어 작품의 결을 다져주었고, 어느 단체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무용극의 형태로 신선한 측면이 있었다.




대전시립무용단 〈월인천강지곡〉 ⓒ대전시립무용단/박상윤




대전시립무용단 단원들의 활약도 작품을 살리는 주요한 요인이다. 김임중, 이현수, 강영아, 서예린 주역을 비롯하여 단원들의 기량이 평균적으로 뛰어났다. 단원들은 기본적으로 현대적인 작품이나 전통류의 작업도 안정되게 소화해내는 경험과 내력을 갖추었기에, 〈군상〉(2019)에서는 추상적이고 표현성이 강조된 현대춤에 가까운 움직임도, 〈인연-가족사진〉(2021)에서는 댄스 뮤지컬 형식의 발랄한 연기와 사교춤도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다. 이번 신작이 여전히 아쉬운 점이 없진 않지만, 단원들과 오페레타 형식의 협업은 ‘월인천강지곡’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데 적합했다. 작품의 주제인 지고지순한 불멸의 사랑도 오늘의 시점에서도 가볍지 않았다. 3년차를 맞이하며 무용극을 고수하는 김평호 감독의 안무방식은 유사하지만, 댄스컬과 오페레타 같은 다양한 형식적 변화를 모색하려는 감독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

2022. 12.
사진제공_대전시립무용단/박상윤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