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용철의 〈업경대〉는 2010년 초연되었고, 이번 여름에는 천안시립무용단이 공연하였다(8월 19-20일, 천안예술의전당). 초연 이래 국내 각지에서의 공연들을 비롯하여 동경, 북경, 그리고 북미에서 적잖이 초청받거나 순회공연을 가진 바 있다. 규모가 작지 않은 작품으로서 이만한 기록이면 우선 장수 레퍼토리에 들기에 족하다. 실은 관람에서 다소 부담스럽고 선뜻 호감을 사기가 쉽지 않은 사후 세계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사후 세계에서 각 사람의 행실을 비추고 그 죄과를 판별하는 용도로 염라대왕이 가졌다는 업경대(業鏡臺) 거울. 〈업경대〉가 대중성을 띠며 공감을 사고 장수하는 데에는 그것만의 흡인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업경대〉는 누구나 직면하기 마련인 보편적인 사후의 상상계를 대중적 호소력이 짙은 씬들을 곁들여 현대적 어법으로 풀이한다. 죽음의 사신이 망자를 데려가는 데서부터 망자를 한껏 위무하는 해원(解冤)의 난장까지 〈업경대〉에서 우리는 망자로 하여금 49재 동안의 중음신(中陰身)을 해탈하도록 하는 일대 파노라마를 만나게 된다.
무대 막이 오르자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7대의 기다란 전신거울이다. 거울 받침대들마다 놓인 하얀 종이를 둥글게 뭉쳐 만든 조화가 큼지막한 하얀 국화 송이를 연상시켜서 거울들은 더욱 업경대로 다가온다. 느리며 서정적인 피아노 독주곡을 배경으로 해서 한참 노출되는 이 부동(不動)의 장면은 〈업경대〉의 소재를 미리부터 각인시키는 효과가 뚜렷하다.
이어서 등장한 정장 차림의 망자 앞에서는 저승의 사신이, 망자 뒤에서는 저승의 영혼이 망자의 혼을 빼놓을 기세로 한참 그를 어르고 어르며 저승길로 어서 들기를 채근한다. 그럴 동안 업경대 위로 사람들이 두상과 얼굴을 드러내고 양손으로 거울을 더듬어 어루만지는데, 그들 또한 망자일 것이고 비탄에 빠져 괴로워하는 모습들이다. 거울 아래 쪽에도 맨몸의 영혼들이 멍하니 앉아 있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들 망자, 사신, 영혼은 〈업경대〉의 기본 얼개를 구성하는 세 축이다. 사후의 세계가 과연 그렇게 구성되는지 물어봄직도 하겠지만 〈업경대〉의 세계는 그러하다. 무표정한 그 망자는 끝내 사신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진다.
천안시립무용단 〈업경대〉 ⓒ김채현 |
작품 전개에 따라 이제 망자를 기다리는 세계는 영혼들의 세계이다. 얼굴만 빼고 머리 부위를 하얀 가리개로 덮고 전신도 하얀 이브닝드레스로 치장한 여남은 명의 여성들이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반듯하게 앉아 앞을 정시하고 있으며, 그들 각자 앞의 바닥에는 하얀 습자지(習字紙 또는 습지·濕紙)가 놓여 있다. 영혼들 수만큼의 전신거울이 그들 뒤로 보인다. 영혼들은 저마다 습지를 부풀리게 구겨서 꽃을 만들고 그것을 머리에 꽂으니 그들은 하얀 꽃으로 변신한다. 특이하게 여겨지는 점으로서 저승 세계를 떠도는 영혼을 꽃으로 형상화하는 무대는 그다지 흔치 않은 줄로 안다.
천안시립무용단 〈업경대〉 ⓒ김채현 |
이름하여 하얀 꽃의 영혼들은 가부좌 상태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턱을 괴고서는 여전히 관객을 응시한다. 무음으로 진행되는 이 과정에서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습지가 구겨지거나 스칠 때 나는 바스락대는 낮은 소음뿐이어서, 무대의 긴장도는 엄숙하리만치 높아가고 관객 역시 숨을 죽이기 마련이었다. 하얀색 일색의 이 씬 전체는 정결한 미적 감성을 아주 인상 깊게 구현하였다. 특히 이 씬이 가질 의미는 몇 마디로 압축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무척 함축적이어서, 사후 세계와 그 영혼에 대한 해석이 깊을수록 그 의미의 망은 넓혀지기 마련이다.
천안시립무용단 〈업경대〉 ⓒ김채현 |
강한 가야금 탄주에 곁들여 메탈성 음향 및 여러 목소리의 허밍이 가득히 들려오자 하얀 꽃의 영혼들은 나란히 앉은 구도의 고요함에서 깨어나듯 몸을 뒤척이기 시작하며, 그사이에 어느 영혼은 망자를 인도하여 영혼들 뒤로 들어왔다. 얼마간의 예비동작을 거쳐 영혼들은 기운차게 일어나 무대를 강렬하게 질주하다 순식간에 일군의 무리를 이루어 망자 앞에 다다른다. 멍하니 선 망자와 합류한 영혼들 앞에서 바닥에 놓인 대형 현수막 같은 채색 보자기(그 채색 문양은 만다라를 재현한 것 같다)를 양옆에서 힘차게 들어올려 아래위로 흔들자 하얀 꽃가루가 허공과 바닥으로 마구 흩날리면서 무대는 꽃가루 천지가 되고, 망자의 저승길을 축성하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천안시립무용단 〈업경대〉 ⓒ김채현 |
행렬을 지은 영혼들은 한국춤의 부드러우며 정갈한 디딤새로 꽃가루 바닥을 즈려밟으며 길을 내어 이동한다. 그렇게 비어진 공간에 남은 망자(이광석)는 영혼 앞에서 독무를 격정적으로 펼치는데, 영혼들의 춤과는 사뭇 다르게 이승에서의 미련이 강한 그의 심사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부분이다. 이 망자와는 다르게 또 한 무리의 검정옷의 사람들이 줄을 앞뒤로 이어 엮은 듯이 몸들을 밀착하여 바닥을 기어들어오고 영혼의 인도를 받아 그들은 저승의 일원이 된다.
천안시립무용단 〈업경대〉 ⓒ김채현 |
잇따르는 부분에서 검정옷의 사람들은 구도를 아주 흐트려가며 에너지 넘치는 집단 난무를 펼쳐 자신들의 욕망, 곧 이승에서의 실상을 재현한다. 이 부분은 업경대에 비춰진 그들의 살아 생전의 실상을 무대 전체로 확대한 것일 터이고, 무대가 곧 업경대로 된다. 이승의 욕망은 그러나 저승에선 무시되어도 좋을 것이라는 듯이 욕망의 난무들 속에서 하얀 꽃의 영혼이 저승에서 꿋꿋하게 피어난다. 망자도 이제는 이승의 옷을 벗은 맨몸 상태로 등장하여 편안한 표정의 다소곳한 춤으로써 저승길을 수긍해 받아들이는 기색이다. 그의 뒤에서 사신이 허공에서 끊어 뭉친 줄 묶음을 그에게 툭 던지자 망자는 객석을 향해 손을 들어 흔드는데, 이승과 망자의 연은 비로소 멈춘 것 같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은 그렇게 정리되는 것인가.
천안시립무용단 〈업경대〉 ⓒ천안시립무용단 |
마지막으로 사라 브라이트만의 〈하렘〉, 월드뮤직 풍의 감미로운 〈바다의 노래〉(둘체 폰테스 노래)가 울려퍼지면서 흰옷, 검정옷의 영혼들이 제각각 우산을 들고 등장한다. 불가에서 부처님 말씀을 중생들을 골고루 덮는 보물 같은 우산(보산·寶傘)으로 모신다는 관행에 비추어 망자에게 저승의 행운을 기원하는 행렬 의식이 〈바다의 노래〉와 함께 펼쳐지고 그것은 곧 망자를 위한 해원(解冤) 의식 구실을 한다.
〈업경대〉를 본 사람들은 저마다 현장에서 한번쯤 옷깃을 여몄을지도 모르겠다. 이 같은 효과를 〈업경대〉는 근엄한 발상에 기대지 않고 정결하면서도 발랄한 관점에 힘입어 소화해내었다. 여기서 불교의 생사관념은 한국의 이미지, 움직임 및 정서와 독특하게 결합하고 무대는 컨템퍼러리한 경향으로 진전하였다. 〈업경대〉에서 눈여겨 볼 바는 복합적이며 형식에서나 내용에서나 생각을 촉발하는 점들이 적지 않다.
천안시립무용단 〈업경대〉 ⓒ김채현 |
부수적으로는 하얀 꽃의 영혼들이 습지를 만지작대는 순간부터 그들이 무대를 즈려밟아가는 순간까지 그 영혼들을 그려내는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발레 〈지젤〉이 연상되곤 하였다. 〈지젤〉 2막 윌리들과 〈업경대〉 하얀 꽃의 영혼들이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은 물론이지만서도 사후 세계의 넋들이라는 점에서는 흡사하다. 사후 세계를 춤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 (하얀 의상을 착의한) 넋들을 단서로 〈업경대〉와 〈지젤〉을 대조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들이 이어질 것 같다.
작품 초연 이래 주역들이 교체되고 주로 영혼들의 장면에서 손질이 가해져 〈업경대〉는 버전업도 진행되었다. 덧붙여, 그간의 전개에 비추어 볼 때, 욕망이 난무하고 새 영혼이 피어나는 부분에서는 우선 그 나름의 내러티브가 설정되어 그 전개가 세밀하게 조절되는 등의 손질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전신거울 장치의 업경대 역할에 있어 그 거울에 실제로 시각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법으로서 지금 다양하게 개발되는 디지털 툴을 추가해보는 기법도 충분히 고려해봄 직하다. 무엇보다도, 〈업경대〉에서 건조한 무채색의 사후 세계 같은 상식적 감각과는 거리를 두고 사후의 세계를 자기만의 환한 감성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 안무자 김용철은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이와 더불어, 20여 년 전 일례로 자신의 안무작 〈붉디 붉은〉에서 감지되었듯이 흐르는 음악을 타며 온몸을 일렁이고 한국무용의 어법을 확장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업경대〉에 이르러 자유로운 무대 구성으로 현대성을 구가하는 저력으로 이어졌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