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자연에 춤을 풀어놓는 춤작가 진영아(Random Art Project 작은방)의 〈비움-공간〉(9월 17~18일, 부산시민공원 백산홀). 춤이 실내공간으로 들어왔다. 소리를 따라 ‘몸과 마음이 공명’하는, ‘닫힌 공간이자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내부가 텅 비어 있는 백산홀을 선택한 듯. 진영아가 춤공간 선택을 탁월하게 하는 안무자임을 다시 확인한다.
공간은 나무 바닥에 완벽한 원 형태로 깔려있는 흰색 모래. 모래 가장자리를 따라 높낮이가 다른 검정색 정육면체의 설치물과 거문고와 철현금, 장구와 싱잉볼을, 관객은 바닥에 놓인 큰 사이즈의 쿠션과 간이의자에 자유롭게 앉을 수 있게 배치되어 있다.
진영아 〈비움_공간〉 ⓒ진영아의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하수 쪽 문을 통해 검정색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 들어온다. 고요하게 걷다가 어느 순간 좁은 단 위에 명상하듯 앉는 무용수가 있는가하면 둥근 모래무대 가장자리를 다지듯 걷는 이. 발을 뗄 때마다 발에 묻은 모래를 마치 벌레를 털어내 듯 털어내는가 하면 어떤 이는 모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뒤집는다. 다양한 무용수들의 춤 에너지로 모래무대가 들끓는다.
모래 위의 춤은 정적인 동작의 응축된 에너지가 동적인 운동에너지를 형성하며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는가 싶다가 그 발산된 에너지는 곧 고요를 유지하는 정적인 동작으로 되풀이 되는, 회귀적 지향을 나타낸다. 무용수들이 딛는 발동작은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멈추는 형태로,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제자리로 중심에 복귀하는 형태의 움직임으로 정적 고요를 지향하는 구심적 시점이자 동적 에너지의 발산을 준비하는 응축된 시간을 의미로 해석된다. 동시에 정적 동작의 응축된 에너지는 동적 운동에너지를 형성하는 예술적 시간을 의미하는 회귀성으로 해석되기도.
진영아 〈비움_공간〉 ⓒ진영아의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거문고와 철현금과 싱잉볼 소리가 모래가 흩어지며 (무대와 관객의 공간)경계가 사라진 공간으로 스윽 들어온다. 어떤 이는 자신의 가슴을 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가슴과 어깨를 쓰다듬듯 쓸어내린다. 김동석이 모래에 묻힌(잃어버린) 것을 찾듯 빠른 동작으로 모래를 걷어낸 뒤, 맨질한 어두운 색의 바닥이 드러난 곳을 마치 깊은 우물인양 한참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시 흔적을 없애듯 모래로 덮는다. 움직임의 연상을 통해 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 ‘봄’이다.
그리고 ‘우연성’. 제자리에서 박은화가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치자 무대 뒤쪽 철제문이 슬쩍 열렸다 닫힌다. 일반 극장 무대였다면 재난이었을 상황. 상황에 춤이 그대로 묻어 흐른다. 무릎을 친 박은화의 춤 에너지에 문이 열렸다 닫힌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내는 “음~~”소리의 파동과 더불어 춤의 공간은 일순 시간이 멈춘 듯하다. 박은화의 춤 에너지가 현실을 야기한 것인지 현실에서부터 춤속으로 스며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떤 희한한 상황이 춤 무대를 현실과 연결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춤에 현실의식을 심는다.
이어 누군가 뒷걸음을 치고, 손에 담아 올린 모래가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본 뒤, 모래 위에 눕는다. 신승민이 상자를 밀고 들어와 쌓고, 그 위에 모래를 올리니, 검정색 상자위에 작은 피라미드가 생긴다. 거문고 소리가 들어오며 상자 위 모래 피라미드를 쓸어버리고, 장구소리가 붙어 들어오면서 다시 공간을 연다.
진영아 〈비움_공간〉 ⓒ진영아의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박은화가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모래 위를 걷다가 바닥에 놓고는 들여다본다. 이어 온몸의 에너지를 모아 얼굴이 달아오르도록 춤을 춘다. 불모의, 쓸쓸할 뿐인 고요 후에 올 생명을. 어떤 불모의 지경에서도 벌써 근접해 있는 생명력을 믿는 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가 연상되는.
춤으로 다른 곳(공간)으로 이동하는 박종수와 안선희의 듀오. 즉흥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춤이 달라진다. 이들의 절제된 춤 호흡에서 사유가 생겨난다. 다른 이들은 하나 둘 모래를 움켜지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를 바라본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듯. 그리고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낸다.
진영아 〈비움_공간〉 ⓒ진영아의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진영아의 〈비움_공간〉을 추는 무용수들은 저마다 주체적인 내면(주제에 따른)을 제 안에 내장하고 있어서 어떤 춤의 지시나 요구도 필요 없어 보인다. 누구 하나 허술하게 무대를 대하지 않는, 전력투구하는 이들의(이언주, 이혜리, 정다래, 권아름) 춤,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박은화의 춤은 춤의 기술적 기교는 더할 수 없이 훌륭하다고 해도 춤을 추는 이의 삶을 대하는 관찰과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래 춤을 춰온 이들이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혹은 변형을 일으키며 추는 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일이다. 춤으로 정신을 전해야 하고, 정신을 전하려면 마음을 그려야 한다. 겉모습이 닮았다 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마음을 추어내기가 가장 어렵다. ‘비움’이라는 큰 주제를 깊이 있게 드러내지 못했을 때 작품의 의미와 생동감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는.
나뭇가지를 높이 들고 서 있다가 돌아앉는 박은화. 무엇을(메시지) 받아들었을까. 검정색 설치물이 징검다리 놓이듯 흰모래 위에 듬성듬성 놓여 있는 공간을 시간을 유영하듯 혼자 떠도는 김동석. 싱잉볼 소리의 여운만 떠다니는 공간에 모두 홀려서 추는 춤이 이어진다.
무언가에 홀려 춤을 추던 안선희가 춤을 비우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응시한다. 그를 따라 번지는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모래 시간의 응시, 고요. 모두 깨닫고 알아차리는 중일까. 깨어지는 고요를 안타까워하듯, 조그만 움직임이 거문고 소리를 부른다. 박은화를 시작으로 하나 둘씩 바닥에 눕자 안선희가 몸을 아래로 둥글게 말아 내린다. 상자 위에 앉아 있는 신승민. 모두 누운 모래 위에서 한참 우두커니 서 있던 김동석이 무릎을 툭 꺾어 내린 뒤,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진영아 〈비움_공간〉 ⓒ진영아의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모두 제자리에 놓였다. 그것은 주인에게 간 것이 아니라 본래를 자리를 찾은 것일지도. 사물들은 제자리와 제 면목을 회복하여 적막하다.
싱잉볼 소리를 따라 ‘만트라(음~~하고 내는 소리)’를 하며 관객에게 바닥에 눕도록 권하는 멘트. 필자도 누워 천장을 보니 이리저리 얽혀 붉은 색 배관이 마치 (몸속의)설치물 같다. 지금 위치한 공간 너머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가 싱잉볼 소리와 함께 들어온다. 공간 분리, (위태로운)여기에서 내면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공간의 겹침. 같은 시간 다른 공간의 체험. 15분여동안 이어졌다. 공간 속에 위치한 사물과,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애써 마침내 이르러야 할 본성의 자리에 이르렀을까. 궁금했다.
진영아 〈비움_공간〉 ⓒ진영아의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소리, 명상, 춤이 긴밀하게’ 엮인 ‘티벳의 치유 명상 악기인 싱잉볼과 성찰과 수양의 음악 전통을 담고 있는 한국의 거문고가 융합하여 소리 치유의 단계적 과정이 예술 춤으로 승화하는 ’비움의 공간‘을 그려내고자’ 한 의도가 잘 전시(?)된 작품이었다. 반면 사물과 사람,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와 연결, 동시에 노자의 ‘빔(비움)’의 연결성에 대한 춤사유는 그 깊이를 채 획득하지 못한 점, 아쉬웠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