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이하 국현)이 장르간 협업 프로젝트인 〈HIP 合〉을 선보였다.(7.6~10.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소위 ‘힙’ 한 창작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hip의 의미를 묻는 기획으로 트리플 빌에 선택된 이재영, 지경민, 정철인의 조합이 보여줄 ‘힙’한 스타일과 정신이 무엇인지 기대를 모았다. ‘힙하다’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시대적 흐름을 선도하는 개성 있는 스타일에 부합하는 세 안무가의 결‘합’(合)이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지 사뭇 궁금한 공연이었다.
전년도에 선보인 김보람, 김설진, 이경은은 모두 동일하게 국악과 스트릿 춤을 응용하며 이질적인 두 장르의 수용과 융합이 ‘힙’한 것이란 방향성을 보였다면, 이번 작업에 참여하는 이재영, 지경민, 정철인은 ‘힙’의 의미가 자신들 자체임을 당당하게 드러내었다. 세 명의 안무가 모두 무용을 전공하기 전에 힙합 춤을 춘 전력이 있으나 각기 작품에서는 표면적으로 날것의 힙합 동작이나 스트릿한 감성은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무가들이 속한 단체인 시나브로 가슴에(이재영), 고블린 파티(지경민), 멜랑콜리댄스 컴퍼니(정철인)의 기존 창작방식과 유사한 작품세계를 보였다. 종종 스트릿춤에서 느껴지는 일탈, 자유, 저항 같은 즉발적인 표현보다는 힙합정신의 동기만이 이 사업의 시발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재영 〈메커니즘〉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
이재영의 〈메커니즘〉은 시나브로 가슴에 단체만의 특화된 움직임의 실마리를 집요하게 포착해 환원해내는 안무적 특성을 재확인시켜 준 작업이다. 이재영은 몸을 하나의 거대한 계(界)로 설정하고 그 덩어리를 구성하는 축을 신체의 관절 마디에서 출발한다. 뼈와 뼈가 맞닿아 접히고 펴지는 소단위의 움직임이 조직되는 몸을 탐색하며 고유한 신체의 메커니즘을 짚어보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무 장치도 없는 바닥에 등장하는 타이츠를 입은 댄서의 몸에 시선이 쏠린다. 권혁은 손목, 골반 같은 몸의 부위를 만지며 확인하고 뒤이은 댄스들도 동일한 행위를 한다. 규칙적인 메트로놈 비트에 맞춰 신체 마디를 활용한 동작은 마치 부품들이 톱니바퀴처럼 얽혀 작동되는 물체의 구조로 보이기도 한다. 병렬적인 동작이 교차되는 댄서들의 모습에서 어떤 시스템에 속한 수동적인 개체로 인지되는 것이다. 조명의 색감과 음악적 변화를 꾀하면서 가속 페달처럼 댄서(이재영, 권혁, 김소연, 김혜진, 변혜림, 양진영)들의 움직임 반경이 확장될수록 무대의 열기도 증폭된다.
이재영 〈메커니즘〉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
유사한 흐름을 전환시키는 마지막 즈음에 이재영의 힙합 정신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시계추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모여든 댄서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관절의 각을 풀어 가장 편하게 뛰기 시작한다. 어쩌면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리셋하는 상황으로서 이재영 식의 소극적인 저항이 아닐까 싶다. 크고 작은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한 우리의 몸뚱이지만 그 틀에서라도 맛보는 찰나적 해방감이랄까. 이 작품은 신체의 관절사용법을 토대로 동작의 분리와 통합을 공학적 시각으로 안무화했다. 반복적 행위(동작)를 보다 보면 행위 자체는 기화되고 언표적 의미만 생성되기도 한다. 지루할 법도 한 반복적인 동작이 묘한 호소력을 갖는 지점에서 필자는 기계적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연상되고, 시계추처럼 돌고 도는 어쩔 수 없는 일상도 반추해 보았다. 시나브로 가슴에의 춤(안무) 메커니즘은 항상 알고 보지만 볼 때마다 빠져들게 된다.
지경민 〈파도〉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
이어지는 지경민의 〈파도〉는 고블린 파티 단체만의 샘솟는 아이디어로 파도가 무대를 휩쓸고 지나가듯 시원하고 다채롭게 그려내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힙하다는 인상은 지경민이 작곡한 음악으로 우리말 가사와 리듬감이 9명 댄서들(남진현, 류건진, 배효섭, 안현민, 오진민, 이경구, 이연주, 임성은, 장소린)의 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사실 댄서들의 유려한 테크닉을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감이 넘치며 활기차다. 여기에 파도의 청각적인 이미지에 적절한 질감을 카혼, 오션드럼, 쉐이커가 담당한다. 초반에는 댄서들의 일체감 있는 군무로 무대는 생동감이 넘친다.
지경민 〈파도〉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
이어 중후반은 바다와 연관된 드라마틱한 장면을 중구난방으로 연출한다. 바캉스가 연상되는 포즈라거나 타이타닉 패러디 상황에서는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생뚱맞게 좀비들로 변한 장면 즈음 오면 작품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예측불가능한 장면 자체를 즐김으로 댄서들의 퍼포먼스 놀이에 동화되어진다. 때론 작은 물알갱이가 되기도 하고 거대한 파도가 되기도 한 댄서들의 몸 자취에 빠질 즈음 무대는 파도소리로 자연 본연의 위치로 되돌려져 마무리된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지경민은 자연스러운 힙합 춤의 원리를 파도의 일렁이는 물결로 포착하였고, 그 작은 실마리와 바이브를 고블린 파티 스타일로 수렴하여 파도타기 놀이처럼 경쾌하게 풀어내었다.
정철인 〈비보호〉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
정철인의 〈비보호〉는 세 작품 중 가장 힙합다운 혈기와 정신이 스며든 작품이다. 길 위에서 일어나는 예측불허의 소소한 충돌과 사건으로 말미암은 아슬아슬한 상황들이 무대로 소환된다. 횡단보도에서 있음직한 사람끼리의 부딪힘에서부터 보드를 이용한 속도전까지 격렬해지는 비보호의 상황이 흥미롭게 진행된다. 무대에서 정점을 찍는 롱보더와 전자 퀵보드와의 신경전은 모빌리티의 위험요소보다는 자유를 만끽하는 젊은이들의 스릴 넘치는 놀이 공간으로 변모한다. 멜랑콜리댄스 컴퍼니 댄서들(김윤현, 류지수, 문경재, 이대호, 임현준, 주영상)만의 능숙하게 훈련된 호흡으로 위험을 담보한 짜릿한 쾌감이 오롯이 전달된다.
정철인 〈비보호〉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
거리 현장에서 리서치 한 내용을 생동감 있게 풀어내는 전반부의 신선한 접근과는 달리 정철인은 상당히 의외의 반전을 보이는데 비보호된 여타의 상황들이 사고로 점철됨을 시사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젊은이의 일탈적 희열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결말이라니 다소 아이러니하다. 따라서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기존의 규칙과 틀을 흔들어 보려는 작업의 의도와는 달리 작품은 너무 현실적이고 정직한 답안으로 전도되어 버린다.
작년의 〈HIP 合〉기획이 전통에서 끌어올 수 있는 힙한 요소를 대중적 눈높이에 맞추려 했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힙’의 의미와 실체를 안무가가 주도적으로 해석하는 자율성에 무게를 두어 보였다. 대놓고 힙한 것에 메이지 않고 대중적 흐름에 편승하지 않은 자신들의 원래 창작 성향대로 보여준 힙합 정신이 오히려 세련되어(chic) 보이기도 한다. 반면 국현의 지원으로 안무가들의 창작 스타일을 견고하게 확인시킨 측면도 있으나 근래 이들 단체의 유사한 작품을 보다 보니 신선함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유망한 창작자들이 주최기관만 다른 판(행사)에서 재생 내지는 자기 복제된 작품으로 안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노파심도 들었다.
또 한 가지 국현이 지원하는 사업은 다른 여느 행사보다 기대와 잣대를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여 본 〈HIP 合〉 공연이 평균점은 유지했다 해도 힙한 안무가들을 물리적으로만 모아 놓은 것 이상의 곱셈 시너지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이재영, 지경민, 정철인은 이 사업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은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미 정철인은 창작산실에서 〈모빌리티〉로, 지경민은 국립무용단에서 〈신선〉으로, 이재영은 시나브로 가슴에에서 공동안무에서 일정 수준의 검증을 거친 안무가들이지 않는가. 본 공연처럼 안무가들 제각각의 개성만 재확인되는 고만고만한 작업을 굳이 만들어야 한다면 이 프로젝트의 기획은 과연 적절한 것일까? 따라서 내년에도 이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면 ‘합’(合)에 초점을 조준해야 되지 싶다. 다시 말해 이미 힙한 안무가들을 모아 그리 힙하지 않게 보이는 묘한 기획력을 점검해볼 때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