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00년대만 해도 마르고 호리호리한 댄서가 주목받던 시절에 이경은은 탄탄한 기량과 건강한 체격으로 무대를 사로잡은 꽤 인상적인 댄서였다. 벌써 중견의 나이인 그녀는 그동안 댄서로서 만이 아니라 안무가로서도 성실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하며 성장해 왔다. 그녀의 창작물(〈이것은 꿈이 아니다:산행〉, 〈안녕〉, 〈TWO〉, 〈}embrace{〉, 〈OFF Destiny〉, 〈BreAking〉)은 비교적 짜임새 있고 무엇보다 난해하지 않기에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에도 뛰어나며 동시대 문화적 요소를 반영하는 선도적인 측면이 있어왔다. 그녀가 학맥에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리케이댄스 컴퍼니를 만든 것이 벌써 20년이 되었다니 독립 무용가로 이 숱한 세월을 도전하며 노력한 것만으로도 귀한 여성 중년 안무가임에 틀림없다.
이경은은 자신의 단체 창단 20주년을 기념하며 신작 〈복〉을 선보였다.(6.17~19.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17일 관람) 코로나 종식을 앞두고 잘 살아보자는 의지를 보이는 작품으로 고립과 차별이 아닌 ‘결핍을 서로 메꾸고 교환·공존하는 세상’(이경은) 네 몸과 내 몸 누구나 춤추고 즐길 수 있는 평등과 연대의 춤을 지향하는 것이다. 충분히 공감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나 안무가의 작품 전개는 맥락의 이음이 헐겁고 내용이 단조로워 단체 20주년 자축파티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리케이댄스 〈bOK〉 ⓒ리케이댄스/옥상훈 |
연극배우 박정자씨가 평온한 걸음으로 무대를 지긋이 밟고 응시하며 팬데믹을 이겨 내고 있는 지금의 현장을 환기시킨다는 인상이다. 그 고충의 시간을 되돌려 무대는 감염병으로 암울했던 상황과 이를 춤 백신으로 극복하려는 의지 그리고 축복으로 공존하는 세상이란 흐름으로 이해된다.
리케이댄스 〈bOK〉 ⓒ리케이댄스/옥상훈 |
무대에는 금속 재질의 둥그런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이리저리 옮겨가며 사용하나 어떤 의미인지는 불명확하다. 초반에는 모호한 분위기에서 댄서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아마도 팬데믹 시기 우리의 무능했던 상태를 은유한 것이 아닌가 싶다. 텍스트 내용을 참고하면 역병에 시달리는 군상들로 짐작되지만 ‘난무 오방잡색 亂舞 五方雜色’이란 텍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오히려 춤을 어렵게 한다. 무언가 외부적인 요인에 갇힌 상황에서 무감한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 맺기 양상들로 파악된다. 일단 시선이 쏠리는 곳은 왜소증의 댄서이다. 이 댄서는 일반적인 댄서와 동등한 상황과 위치에서 듀엣과 군무를 수행한다. 신체 길이는 다르지만 동작 표현에서는 일반적인 댄서와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듯이 최선을 다한다. 무대에서 함께 추는 것만으로 차별 없는 배려인지 아니면 작은 몸에 어울리는 안무적 맞춤이 평등한 것일지 생각하게 한다. 어찌하든 전반적으로 일률적인 불안이 떠다니는 분위기로 댄서들의 표정도 속도도 같아 그들의 상념도 유사해 보인다.
리케이댄스 〈bOK〉 ⓒ리케이댄스/옥상훈 |
텍스트에서 말한 대로 고립된 섬들이 떠다니는 감정이 사라진 회색도시 같은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것은 처용의 상징적인 의미이다. 현대판 처용들을 자처한 다섯 명의 댄서들은 오방색의 짧은 팬츠를 입고 몸에 밀착된 흰색 상의에서 늘어뜨린 살풀이용 리본 띠로 동서남북 사방을 흩뿌리며 용서와 치유의 아이콘이 된다. 전조 없이 등장한 이들이 무감각한 공간을 정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 시키는 백신이자 매개체인 것이다. 물론 정신적인 고립(역병)을 치유하는 의미로 적용했겠으나 그 상상력의 이음새와 맥락 전환이 부자연스럽다. 코로나19와 같은 전 세계적 감염병을 진단하고 보통 10년 걸리는 백신개발을 1년 만에 완성해 접종하는 첨단과학의 시대에 처용을 앞세운 벽사진경(辟邪進慶)이 문제 해결의 답이라니 시대적 감수성의 차원에서 간극이 느껴진다. 당연히 작품 전개는 안무가의 자율적인 영역이고 관객 저마다의 감상에 따라 달리 이해될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선뜻 공감하기 어려웠다.
리케이댄스 〈bOK〉 ⓒ리케이댄스/옥상훈 |
더한 난맥상은 현대판 처용 백신에 의해 해결된 해방된 세계에서 펼쳐지는 춤의 성격이다. 안무자가 말한 ‘남녀노소, 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세상’으로 9명의 모든 참여자가 등장한다. 어쩌면 이 작품의 주제격인 상황으로 커뮤니티 댄스 스타일의 댄스파티가 펼쳐진다. 모두가 손잡고 리듬에 맞춰 한참을 신나게 흔들며 1차원적인 동작배열로 맞춰진 춤이 내 몸과 네 몸이 뒤섞여(난무 오방잡색) 하나 된다는 천진난만할 생각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적어도 연세가 지긋한 어른, 어린아이, 장애인을 비롯한 참여자들의 각기 다른 몸에서 느껴지는 ‘춤성’이 나와야 했다. 각각의 춤(몸)으로 자연스러운 의미가 발현되어야 하나 천편일률적인 동작과 막춤으로 이들의 고유한 신체성은 그림자처럼 가려져 버렸다.
모든 일상적인 몸짓이 춤이 될 수 있는 시대이고 그간 무대에서 배제되어 온 몸들 이를테면 훈련되지 않은 몸, 늙은 몸, 장애의 몸, 뚱뚱한 몸, 소수자들의 몸 같은 각양각색의 몸들이 세계와 연결되어 당당하게 무대에 서고 있다. 제롬 벨을 비롯한 여러 안무가들의 수많은 작품에서 정상적인 신체의 기준은 해체되어 인식을 확장시킨 여러 사례를 우리는 이미 경험했고 도전받았다. 차이와 다름으로 기울어진 기준으로 그간 존중받지 못했던 몸들의 반란적인 서사는 차치하고라도 안무자는 전문적인 댄서들 이외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무대에 선 의미를 납작하게 해버린다. 말하자면 남녀노소 장애 비장애인 구색을 맞추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무대에는 외모만 다른 에너지 넘치는 생기발랄한 참여자들로 음지가 없는 양지에서 춤추는 사람들만 있다. 모든 이가 하나 된 민주적인 무대를 표방하지만 각각의 몸이 대변하는 주체적 존재성(몸)은 조명되지 않았고 주변부에서 비로소 무대에 선 그들의 이야기는 비어 있다. 결핍이 드러나지 않으니 결핍을 메꿀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양한 구성원들의 몸의 서사가 애매모호한 작품이기에 호탕하게 웃으며 ‘복’을 나눌 수가 없었다. 전통적인 요소를 듬성하게 매개하는 상상력, 외형만 민주적인 무대, 몸 담론의 빈약한 실천까지 중구난방으로 작품의 방향은 표류하고 만다. 20여년 오랜 시간 보인 믿음직한 그녀만의 개성 있고 단단한 춤 색깔을 이번 작품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