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부산 원도심 한켠에 위치한 40계단은, 피난민들이 생계를 위해 구호물자를 내다 팔던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던 해후의 장소였다. 지난 5월20~21일, 부산시립무용단(예술감독:이정윤)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켜켜이 쌓인 이 역사적 공간을 모티브로 한 작품 〈부산, 40계단-바다 곁에 오래였으나 바다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를 문화회관대극장에 올렸다.
7장으로 구성된 작품은 크게 도입부, 전개부, 종결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도입부는 항구도시 부산과 주요등장인물 3인을 소개한다.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한 대중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비장하게 울러 펴지고, 한국적 발레를 표방한 초기 국립무용단을 연상시키는 남녀 군무가 스펙터클하게 이어진다(1장). 들썩이던 무대가 잠잠해지면, 파도 영상이 쏟아지고, 일렬로 도열한 신발들이 도드라진다. 신 한 짝을 잃어버린 사내가 길게 늘어진 신발을 천천히 살피고,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탄 두 인물이 그의 옆에 선다(2장).
전개부는 각기 다른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한쪽 신을 잃어버린 사내가 이산의 아픔을 묘사하는 것이다. 시각을 압도하는 파도 영상이 계속되고, 널브러진 신발들이 대각선과 원형으로 재배치된다. 사내는 신발 대형을 따라 이동하고, 다소간 무미건조한 춤을 춘다. 이윽고 한복 입은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누구인가? 잃어버린 신 한쪽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쟁의 와중에 헤어진 가족을 상징하는 듯하다. 한동안 겉돌던 둘은 마침내 만나지만, 이산의 아픔을 헤아려 볼 구체적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 채, 맥없이 마무리된다(3장).
두 번째는 지팡이 사내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전쟁터에서 만난 남녀의 사랑을 그린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영상이 무대를 채우고, 〈애국가〉 변주에 맞춘 여성 군무가 한동안 이어진다. 일사불란한 춤은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사내와 일군의 남성들이 그녀들을 바라본다. 이후 짝을 이룬 남녀가 서로의 몸에 기대거나 어루만지는 몸짓을 한다. 전쟁 다큐멘터리와 같은 영상과 말미의 몇몇 제스처를 통해, 전쟁의 폐허 속에 서로에게 의지하는 두 남녀의 사랑을 이미지화한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상투적이란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4장).
세 번째는 휠체어 사내의 에피소드이다. 강렬한 레드 드레스를 입은 연주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거문고 앞에 앉는다. 현의 튕김과 함께 거칠지만 힘 있는 음색이 흘러나오고, 상의를 탈의한 여섯 남자의 현란한 춤이 펼쳐진다. 휠체어 사내는 간간이 지휘를 하거나, 악보 그리는 시늉을 할 뿐이다. 이후 굴곡진 근현대사에서 널리 불러진 〈희망가〉 선율이 흘러나오고, 사내는 홀연히 일어나 어깨춤을 춘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하는 노랫말을 상기시킴으로써, 전란의 풍파를 겪고 있는 음악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출연자들(휠체어 사내, 상의를 탈의한 여섯 남자, 거문고 연주자) 간의 상호관련성과 장애에서 비장애로 전환되는 계기가 불투명함으로써, 이야기는 힘을 잃고 모호한 이미지만이 남는다(5장).
종결부는 40계단을 이미지화하고, 그 속에 맺힌 한을 풀어 작품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먼저, 무대 후면에 높다란 계단을 설치하고, 바닥 전체를 비스듬히 세워 경사를 만든다. 40계단을 형상화한 이 공간 위에, 대규모 군무진이 손을 흔든다. 주요인물 3인이 등장하여 그 사이를 배회하다 퇴장하면, 사샤 발츠 〈육체〉의 한 장면처럼 몸과 몸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얼마쯤 지났을까? 40계단을 대표하는 노래로, 피난살이의 고단함을 묘사한 〈경상도아가씨〉 선율이 흘러나온다. 하나둘 일어선 무용수들은 항구도시 부산의 정취를 이미지화한 첫 장면으로 되돌아간 듯, 역동적 군무를 이어간다(6장).
작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근현대사 관련 영상이 다시 나오고, 댄서들은 제 가슴을 친다. 이어 비탈진 무대 위로 물이 쏟아져 내린다. 가슴에 맺힌 한을 씻어내는 대목으로,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와 삶에 대한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전개부(에피소드1, 2, 3)로 인해, 왜 한이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가름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바탕 풀이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공허하게 흘러가고 만다. 더욱이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댄서들의 두 발과 경직된 상체는 되레 불안감을 증폭시킨다(7장).
40계단은 지역민의 고단한 삶이 짙게 배인 역사적 공간이다. 따라서 작품은 그들 삶에 대한 속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극적 무용을 표방한 작품은 3명의 주요인물을 등장시킨다. 신 한 짝을 잃어버린 사내는 이산의 아픔을, 지팡이 사내는 남녀의 사랑을, 휠체어 사내는 전란의 풍파를 겪은 음악가를 상징하는 듯하다. 영상, 음악, 조명, 무대설치와의 협업을 통해, 각각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각 인물의 서사는 상당히 표피적이고, 상투적이다. 그리고 움직임 표현의 폭은 좁고 모호하다. 이로써 관객의 텍스트(text) 읽기의 즐거움, 즉 작품 의미에 대한 다각적 해석이 어렵다. 작가의 보다 깊고 넓은 주제의식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송성아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