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부산에서 오랜 동안 작품 활동을 이어온 독립 춤꾼이자, 중진 안무가 박재현(경희댄스시어터 대표)의 공연이 있었다(5월29일, 문화회관중강당). 전국무용제를 비롯한 각종 대회 수상작인 〈굿모닝 일동氏-슬픔에 관하여〉, 〈고독-그곳엔 사랑이 없더라〉,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을 ‘안무노트’라는 표제 아래 한 자리에 모운 것이다.
경희댄스시어터 〈굿모닝 일동씨-슬픔에 관하여〉 ⓒ박재현 |
AK21국제안무가육성공연(2020) 최우수상을 수상한 〈굿모닝 일동씨-슬픔에 관하여〉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門)을 오브제로 활용한다. 가벽 없이 홀로 선 이것은, 냉혹한 취업관문 또는 국경장벽을 연상시킨다. 주인공 일동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은 그 앞을 맴도는 경계인이다. 취업준비생인지, 인력시장 노동자인지, 난민인지는 알 수 없다. 일동의 짙고 어두운 구음(口音)과 노래조의 대사를 통해, 관문이나 장벽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의 암울한 정서가 강렬하게 드러난다.
일동과 더불어 작품을 주도하는 사내가 있다. 경계인의 불안을 더듬더듬 읊조리는가 하면, 악덕 기업주가 된 양 모멸감을 주는 대사를 거침없이 쏟아내기도 한다. 경계인이 직면하고 있는 폭력적 상황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누지 않고, 뒤섞어 놓은 것이다. 또한 자식만은 이곳을 떠나 아름답게 비상하기를 꿈꾸는 어머니의 모습을 블랙코미디처럼 연기하기도 하고, 문지방에 쓰레기처럼 널브려져 있기도 한다.
경희댄스시어터 〈굿모닝 일동씨-슬픔에 관하여〉 ⓒ박재현 |
일동의 구음과 사내의 다면적 연기가 진행되는 동안, 경계를 맴도는 무리는 문 뒤에 바글바글 붙어 있는 바퀴벌레가 되기도 하고, 네발 짐승마냥 여기저기를 기여 다니기도 한다. 도무지 출구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동이 ‘가자, 가자, 길을 찾아 가자, 꿈을 찾아가자’하고, 사내는 이를 부정하듯 비명을 지른다. 소망과 비명이 뒤엉키는 가운데 춤은 격렬해지고, 분열적 정서는 극에 달한다.
엔딩에서 일동은 희뿌연 연기 아래 슬로우 모션(motion)으로 움직인다. 나머지는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나비 마냥 흔들기도 한다. 칠흑 같은 어둠을 건너온 것일까? 그들은 여전히 문 언저리 경계에 서 있는 듯하다. 참담한 슬픔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경희댄스시어터 〈고독-그곳엔 사랑이 없더라〉 ⓒ박재현 |
제2회 금정산 생명문화축전 전국 춤경연(2017) 수상작 〈고독-그곳엔 사랑이 없더라〉는 박재현과 변지연의 이인무로, 소품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강철로 만든 기다란 파이프인데, 한쪽은 사슴뿔과 같이 여러 갈래로 솟아있고, 반대편은 매끈하게 뻗어있다. 춤이 진행되는 동안, 사내는 이것을 머리에 이고 있다. 미동 없는 그는 망부석(望夫石) 같고, 뿔처럼 솟은 강철은 돌을 뚫고 나오는 뜨거운 기다림인 듯하다.
사내가 돌면서 파이프 반대편이 객석을 향하고, 길고 매끈한 철제 아래에 선 모습이 부각된다. 흡사 기다림에 지쳐 목을 멘듯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사내가 회전하면, 스텐리스 스틸의 긴 수평면이 도드라진다. 분명 그 아래에 있음에도, 높다란 줄 위를 걷는 듯하다.
위험천만한 걸음은 주변을 맴도는 여자를 향한다. 그녀는 남자가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으로, 연인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수도 있다.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둘은 끝끝내 만나지 못한다. 홀로 남은 사내는 빙글빙글 돌며 어둠 속을 부류한다. 깊고 차가운 고독이 침잠해 있다.
경희댄스시어터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 ⓒ박재현 |
제28회 부산무용제(2019) 우수상 수상작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은 앞서 두 작품과 달리, 소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널리 알려진 동화의 제목을 빌려와 호기심을 자극한다. 서두에 많은 무용수가 인어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있다. 순간 모기가 윙윙 거리는 소리가 나고, 하이힐을 신은 남자가 등장한다.
힐은 한쪽뿐이고, 빨간 고무줄을 멘 가녀린 발목이 도드라진다. 동성애자로 오해할 수 있는 차림새이지만,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게이로 낙인찍어 신발을 벗기고, 이리저리 고무줄을 당기며 조롱한다. 남자는 사회적 폭력에 의해 거세된 듯 바닥을 기고, 그 모양새가 인어를 닮아있다.
한동안 이인무, 삼인무, 군무가 맥락 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사람들이 흑막을 열어 제치며 쏟아져 나오고, 객석에 앉아있던 댄서들도 무대로 올라온다. 피나 바우쉬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일상적 몸짓을 변용한 프레이즈를 무한 반복한다. 고조되는 긴장감 속에 하나둘 쓰러지고, 사회적 폭력에 의해 거세된 남자와 같이 인어가 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원인을 편견에서 찾는다. 그런데 현상과 원인을 풀어가는 과정이 충분치 못하며 작위적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와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하겠다.
경희댄스시어터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 ⓒ박재현 |
작가 박재현은 열심이지만, 항상 혼자이다. 세 작품은 자기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 개인의 슬픔과 고독을 치열하고 밀도감 있게 그려낸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 사회적 현상을 표명함에 있어, 사유의 깊이가 두텁지 않다. 고군분투하는 그의 세계가, 이제 자신을 넘어 보다 넓고 풍성하게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송성아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