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이 물체와의 연관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상례이고 물체가 한 역할을 맡는 춤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실제 현장에서 그런 역할을 접하는 경우는 드물다. 최우석의 〈디자인 프로세스〉(5. 6~7., 서강대메리홀 대극장)에서 물체에다 역할을 부여하는 춤을 생각해보게 된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최우석이 안무·출연을 전담한 단독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안무자는 신진 세대에 속하며 그간 몇 차례 안무작을 발표한 바 있다.
최우석 〈디자인 프로세스〉 ⓒ김채현 |
처음부터 무대 바닥에 미리 널브러져 있는 각목들은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각목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묘사는 과연 타당할까. 각목을 갖고 출연자(최우석)가 어떻게 해나가기를 관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공연에서 각목들을 위해 어떤 계기와 동인을 조성하는 쪽은 출연자일 것이다. 허리춤에 공구주머니를 두른 출연자는 작업복 차림의 목공으로서 1시간 내내 각목들과 관계하고 소통하며, 그 관계는 상당히 유동적이고 뚜렷한 결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목공 노동이 실현되어야 하는 〈디자인 프로세스〉 공연의 성격상 시간을 정해서 진행되긴 어렵다. 다만 공연에서 배경 음향으로 미세한 사운드가 나오고 부분적으로 피아노나 아코디언, 바이올린 소리가 특정의 순간에서 장애물이나 아니면 순조로운 진행을 암시하고 떠받치는 구실을 한다.
최우석 〈디자인 프로세스〉 ⓒ김채현 |
망치 등속이 들은 공구주머니에서 못을 꺼내 각목에 못질하는 작업은 공연 전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게 못질들에 착수하기 전에 출연자는 흩어진 각목들의 위치를 가늠하고 작업 환경을 정돈하는 과정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각목을 집어 그에 의지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몇 차례의 동작을 다듬어진 테크닉을 섞어 노련하게 펼쳐 보였다. 이 대목에서 김경신의 〈호모 파베르〉 등등 많은 공연작들에 출연자로 참가해온 그의 이력이 간접적으로 시사되었다.
최우석 〈디자인 프로세스〉 ⓒ김채현 |
출연자는 톱으로 각목을 자르고 못질을 해서 염두에 두었을 공작구조물들을 만들어간다. 공작물 중에는 작은 창틀이나 사다리, 간이 스툴 같은 것도 있다. 또 네 다리가 세워진 공작물의 위에다 각목들을 가지런히 얹고 그 앞에 간이 스툴 같은 것을 갖다 놓으니 각목들이 얹힌 그것은 테이블이 된다. 또한 각목들에다 못을 박고 죽 펼치니 5각형의 집 같은 형상이 그려진다. 그처럼 이어진 각목들을 여러 개 만들어 출연자는 공작물들과 씨름하는 순간들을 수차례 연출하였다.
최우석 〈디자인 프로세스〉 ⓒ김채현 |
그 장면들 중 인상적인 몇 가지를 소개해본다. 공작물을 바닥에 길게 펼쳐놓고 그 위에 몸을 누인 후 공작물을 접으면서 공작물과 함께 몸을 구른다. 공작물을 개집 모양으로 접은 후 그것을 뒤집어쓰고 오리걸음을 걷는다. 이 두 장면에서는 약간의 고통이 수반된 것으로 관찰된다. 그리고 공작물을 허수아비 형태로 접어 그것을 안고서 보조를 맞추며 율동의 움직임을 함께 해나간다. 거의 로봇처럼 보이는 공작물을 안아 들고서는 그 양다리 부위를 출연자의 다리로 툭툭 쳐대면서 걸어간다.
이 공연에서 출연자는 수십 개의 각목을 톱과 망치, 못만으로 자르고 잇는다. 구조물을 쉼없이 만들어내는 그의 공력은 실제로 만만찮아 보인다. 공연자가 동원하는 물체와 익숙해야 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며, 이럴 경우 사물에 대해 만족하고 그런 만족감을 노래하듯 표현해내는 상식적인 방식들과 〈디자인 프로세스〉 사이의 거리는 멀다. 숱한 구상을 거듭한 끝에 도출해내었을 형상들과 퍼포먼스에 출연자가 만족해하는지 무대에서는 불투명하다. 쉼없는 인생살이를 은유하는 공연이므로 결론을 갖춘 만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최우석 〈디자인 프로세스〉 ⓒ김채현 |
각목이 등장하는 춤 무대작이 다른 무용가의 손에 의해 이전에 발표된 바 있다. 다만 거기서는 톱, 망치, 못이 필요치 않았다. 작품 흐름상 그럴 이유도 없이 각목의 역할이 달랐던 때문이다. 〈디자인 프로세스〉 안무자 최우석은 각목을 갖고 디자인할 동기를 찾았는데, 삶을 설계하는 폭넓은 행위를 그는 각목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최우석 〈디자인 프로세스〉 ⓒ김채현 |
출연자가 단독인 이 공연에서 동반자는 음악도 아니고 미리 설치된 어떤 장치도 아니다.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출연자의 동반자는 각목, 톱, 망치, 못이라는 도구(물체)들이었고 또 그것들로써 만들어진 목재 구조물(물체)이었다. 최종 형태물로서 구조물은 무용수 못지않은 역할을 수행해내었음이 분명해서 그 역할이 조명될 만한 것이다. 여기서 물체들이 수동적인 무생물체에서 일종의 준주체(準主體·quasi-subject)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변화가 조성된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출연자가 물체들과 동고동락하는 내러티브에서 탈인간중심주의가 읽혀지는 점도 아울러 환기되어야 하겠다. 단적으로, 〈디자인 프로세스〉에서는 전반적으로 물체를 대하는 춤의 관점이 확장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며, 이런 현상이 특히 출연자의 내공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다가온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