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의외의 선물 같은 춤이었다. 김현태(구미시립예술감독)의 〈이어지다〉(봉산문화회관 가온홀, 4월23일). 애초에 몸짓 하나였던 창작춤이 전통춤으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의 시간의 축적과 그 춤적 의도의 성공적인 실천은, 장유경류라는 춤 속에 또는 춤적인 것에 대한 그의 믿음 속에 의심 없이 스며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전제한 것이었기에 가능했을지도.
김현태는 춤을 잘 춘다. 큰 호흡으로 다듬은 그의 춤 재능이 (큰)벽을 뚫고 나왔다. 춤을 향한 집중과 끝없는 춤 실천에 따른 보상인 듯.
처용무 ⓒ김현태 |
백경우가 춘 ‘승무’(이매방류) 외에, 무대를 연 ‘처용무’와 장유경류의 ‘북춤’ ‘입춤’ ‘선산풀이’를 오롯이 혼자 추어냈다. ‘처용무’는 5방의 방위 빛깔에 따른 의상을 입은 다섯 명의 처용(김순주,편봉화,임차영,이수민,김현태)이 중앙에 선 이가 4방위 중 한 이와 춤을 맞춰 추면 다른 세 사람은 서서 바라보고 다음 방위가 받아 추고, 중앙을 검정색과 붉은 색 의상이 보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다섯 처용이 두 팔을 허리에 붙이고 나란히 서서 처음 시작된 형태로 춤을 마무리한 뒤 박 소리에 맞춰 한 줄로 발과 팔을 저으며 들어간다.
북춤 ⓒ김현태 |
북을 맨 김현태가 무대 가운데 서 있다. 쨍하고 솟는 태평소 소리가 춤 시작을 알리자 첫 박에 힘 있게 북을 한 번 두드린 뒤 가만히 정지(호흡). 춤을 비운다. 그 비어있는 춤(몸)에 흥이 가득하다. 연한 핑크색 쾌자 앞자락을 양쪽으로 갈라 뒤로 돌려 묶고, 붉은 색의 가는 머리띠와 살구빛 바지저고리의 색의 감각적 조합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팔을 벌려들고 제자리에서 천천히 돌아드는가 하더니, 북을 휙 몸에 휘감아 돌린 뒤 어깨에 올렸다가 내려 잡은 뒤 두드린다. 섬세한 발놀림과 공간을 넓게 쓰며 추는 활달한 조화로운 춤의 구성이 좋다.
‘북춤’은 “1963년 김백봉 선생이 안무한(소녀의 꿈) 소품으로, 1971년에 ‘북춤’으로 단독 초연된 이후 장유경(계명대교수)에게 사사”된 춤이라고. 다시 김현태로 이어지는 ‘북춤’은 옛것과 신선한 생명력이 서로 조응함으로써 50여년의 시간을 간단하게 건너뛰며 생명력 속에서 춤이 드러나게 했다. 굿거리에서 자진모리장단으로, 동살풀이, 그리고 휘모리장단으로 넘어가 맺는 악사들의 연주에 얹은 빼어난 춤의 흥취로 잠시 현실로부터 멀리 향하게 한, 우리 춤의 전형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승무 ⓒ김현태 |
백경우의 ‘승무(이매방류)’. 검정색 장삼에 붉은 띠. 과하지 않은 호흡과 섬세한 동작선, 뒤로 누우며 뒤집는 연풍대의 천천히 늘이는 듯한 연속 동작과 화려한 북가락이 인상적인 춤이었다. 마지막 굿거리장단에서 어깨로 하는 호흡이 점점 커지는 동작이 이채로운, 춤속으로 침잠하는 듯한 춤이었다.
입춤 ⓒ김현태 |
김현태의 ‘입-입소리에 춤을 얹다’. 푸른색 공단으로 두루마기를 지어 입고 중인들이 썼음직한 갓을 썼다. 객석 쪽을 향해 조용하게 서 있는 상태에서 오른 발을 들었다가 바닥에 턱! 내려놓으며 오른발 오른손, 왼발 왼손을 같이 움직이는 동작. 답지저앙과 수족상응이라는 우리 고유의 몸짓이다. 두루마기 앞섶 한쪽을 걷어 올리니, 허리춤에 빨강색 끈이 달린 청색 주머니가 대롱. 오래된 소박함과 색 조합이 주는 세련된 감각과 춤의 서정이 마음을 간질인다. 구음(고 김소희선생) 뒤, 장구 장단이 붙자 돌아선 채 수건을 꺼내들고 춤을 춘다. 어깨에 슬쩍 수건을 얹고, 무릎을 깊게 굴신한 뒤 천천히 일어나는 동작과 양손을 들었다가 같이 턱하고 내려놓는 동작은 ‘입춤’과 ‘선살풀이’에 나타나는 ‘장유경류’춤의 특징이다.
앞으로 걸어 나오다가 턱 버티고 선 뒤, 두 팔을 아래로 툭 떨어뜨린 뒤 호흡, 춤을 비워낸 춤(몸)이 가을 기운같이 서늘하고 아름답다. 푸너리 장단으로 시작 시나위에서 자진모리로 휘몰아치는 장단에 수건을 날리고 뛰고, 다리를 들었다 놓고 지숫는 등 큰 동작과 작은 동작, 환히 빛나는 것과 사소한 것 모두 마음을 다해 무대에 던져 놓는다. 드러날 듯 감추고 풀어놓을 듯 풀지 않는, 담담하게 추는 춤이 더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춤이었다.
‘입-입소리에 춤을 얹다’를 남자춤으로, 그리고 오래전에 “김소희선생의 구음에 맞춰 춤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는 장유경의 의도는 김현태의 춤에서 성공한 듯하다. 여자 춤에다 수건사위, 앉은 사위, 뛰는 사위를 더 넣은 남자춤이 희한하게 담담하고 아름답다.
선살풀이 ⓒ김현태 |
마지막 ‘선살풀이’. 연주음악이 시작되자 뒷모습으로 바람을 가르듯 무대를 가로지른 뒤, 무릎을 꾹꾹 누르면서 덩실, 고개를 끄덕인다. 살짝 숙인 머리, 흰색 갓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 얼굴 아래 흐르는 귀기와 서늘한 미감은 장유경의 그것과 또 다르다. 몸에 힘을 풀고 호흡을 내려놓으며 깊어지는 춤. 깊숙이 내려앉았다가 천천히 돌아서 일어나며 앞으로 내 딛는다. 흰색 의상과 갓, 남녀와 색의 구분이 필요 없는 세계 속에 세속의 현란함이 들어있다.
‘선살풀이’는 어르고 지숫고 매기는 경상도 특유의 툭툭한 춤사위가 잘 배합된 춤이다. “즉흥적인 춤사위로 조금씩 다르게 추어지면서 무용수의 특징이 잘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안무가(장유경)의 춤철학과 의도를 잘 파악한 듯. 김현태가 든 부채와 살풀이 천의 흐름은 눈에 보이는 하나의 선이 되기도, 춤과 같이 텅 비어 있기도.
춤에서 보이는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입,..입춤’에서의 김현태의 춤에서 드러나는,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한 아득함과 꼿꼿한 춤의 정서는 장유경의 춤을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으며, ‘선살풀이’는 같은 춤의 다른 이미지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두 사람의 춤 사이에 우열의 차는 없지만 춤적 이미지와 그에 따라오는 춤의 사유는 춤을 보는 이들에게 다르게 작용한다. 이 또한 ‘장유경류’, 즉 장유경의 춤철학으로 ‘나와 다르게 추는 이의 개성이 드러나게 추라’는 춤의 확장성이다. 그는 아마도 넘어서기 속에 다른 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김현태 또한 이런 종류의 창조는 김현태가 추고자할 춤들이 춤 속에, 또는 춤적인 믿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이어지다〉는 김현태의 품성과 춤의 격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그가 춘 ‘입-입소리에 춤을 얹다’(‘입춤’이라 하자)와 ‘북춤’ ‘선살풀이’에 전통춤이라 이름을 붙이고 무대에 올렸다.
장유경에게서 김현태로 장유경류의 춤을(전통) 옮기는 것과 장유경의 춤에 대한 태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과거의 춤을 애써 끊어버리려 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춤의 토대를 제공한 과거의 그 춤을 배태한 자신의 역사와 춤의 문화적 토양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에 그 의미와 가치를 크게 둔 것이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