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21년 4월에 열렸던 ‘한국무용제전’ 무대에서 메시지가 뚜렷하고 정서적 울림이 큰 작품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LNYdance의 예술감독 이남영이 1년여 만에 새로운 신작 〈이음-다가서다〉(4월 27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를 선보였다. 현실 세계를 직시하는 예리한 시선이 담긴 전작 〈나를 나로서 보다〉와 비슷한 결을 가진 이번 공연에서 춤 만든 이는 팬데믹 상황에 놓인 인간 실존의 모습을 강렬하고 표현적인 몸짓으로 그려내고 있다. 곧 이번 공연에서 이남영은 그의 스승 김영희가 세운 무트댄스 메소드의 움직임을 활용해 현실을 반영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이음-다가서다〉는 오늘 우리들의 삶의 모습, 특히 비대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엇갈린 관계, 접촉을 피하거나 거부하는 비-관계 혹은 관계없음에서 오는 불안감과 소외감, 두려움과 고립감 등을 장면화한 춤 공연이다.
LNYdance〈이음-다가서다〉ⓒ이남영 |
공연은 무대 중앙 맨 앞에서 객석 쪽으로 뒷모습을 보인 채 선 이남영의 솔로 춤으로 시작한다. 그는 희미한 조명 빛 안에서 컴컴한 무대를 마주하고 있는데, 이는 참담한 현실과 맞닥뜨린 인간 실존을 연상시킨다. 낙담한 듯 서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탈출구를 찾는 듯 팔을 올려 더듬더듬 움직이고, 고립된 상황을 거부하듯 몸을 비틀며 강하게 회전하지만, 쉬이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춤꾼은 불안한 듯 잇따라 반복해서 자꾸 손가락 10개를 꼼지락거린다. 처리하여 헤쳐나가고 싶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불안한 실존의 모습을 알맞게 형상화한 장면이다. 응축된 에너지를 폭발시킬 듯이 팔을 내뻗고 휘저으며, 상체를 꼬면서 틀어 회전하고,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임이며 표현성을 강화하는 이남영의 도입부 춤은 전체 공연의 엠블럼(emblem)으로 보인다.
조명이 밝아지면, 수많은 끈이 가로지르고 있는 무대가 드러난다. 그런데 끈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읽힌다. 끈은 이것과 저것을 잇기도 하지만 이곳과 저곳을 가르기도 한다. 곧 끈은 연결의 선이면서 동시에 분할의 선을 의미한다. 공연에서 끈은 우선 초연결 사회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각종 미디어와 SNS 등에서 익명의 존재자들은 서로 신분도 나이도, 국적도 성별도 모른 채 연결되어 있고, 이들은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소통한다. 현대인은 무한정의 소통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초연결 시대의 이면에서 극단적인 소통의 부재가 나타난다는 것이 춤 만든 이의 생각인 듯하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에서 끈은 무대와 객석도 구분하고, 무대 공간 자체도 가르고 있기에 말이다. 곧 세상이라는 무대는 끈으로 분할되어 있다. 세상은 국소적인 지점들로 나뉜 것이다.
LNYdance〈이음-다가서다〉ⓒ이남영 |
솔로 춤을 마친 이남영은 그런 세상 속으로 유유히 걸어서 들어간다. 그리고 춤꾼들이 하나둘 느릿느릿하게 연이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끈으로 분할된 세상의 한 지점만을 차지할 뿐인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자로 보인다. 비대면 삶을 사는 오늘의 삶을 적절하게 형상화한 장면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원래 격자처럼 틀 지워진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각각의 실존은 격자 위의 한 지점에 상응하는 제한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격자 같은 체계 안에 내던져진다는 것을 뜻하기에 말이다. 우리 각자의 삶은 격자 위의 한 자리에 언제나 고정된다는 말이고, 단지 이 같은 삶은 팬데믹 시대에 더욱 강화되었다는 말이리라. 춤꾼들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복원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국소적인 한 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춤추는 몸들은 또 다른 지점으로 건너가기 위해, 곧 타자에게로 나아가기 위해 끈을 걷어내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쇠붙이가 긁히는 듯한 둔탁한 굉음을 배경 음향으로 삼아 역동적인 몸짓을 구사하며 소통과 만남을 갈구하지만, 이는 그리 쉽게 성사되지 않는다.
LNYdance〈이음-다가서다〉ⓒ이남영 |
세상을 몇으로 나누어 쪼갠 끈은 견고하고, 그러기에 비슷하고 똑같은 춤을 추더라도, 각각의 춤꾼들은 모두 서로 떨어져 절단된 관계를 이루는 존재자일 뿐이다. 10명의 춤꾼이 흰색 바지와 검은 상의가 주조를 이룬 비슷한 의상을 입고 똑같은 춤을 추지만, 이는 폐쇄된 지점들에 갇힌 자들의 춤일 뿐이다. 끈을 걷어내고자 애쓰던 춤꾼들이 이윽고 하수 앞쪽에서 옹기종기 모여 한 덩어리를 이룬 채, 상수 쪽으로 서서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동하는 군무는 군중 속의 불안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군중이 무리를 이뤄 마치 하나인 듯 움직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분리되어 있고, 그러기에 그들이 함께한들 불안감만 배가할 뿐이라는 역설적인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드디어 무리가 흩어질 때 공간을 분할하고 있던 끈 몇 개가 끊겨 튕겨 나간다. 먼저 객석과 무대를 가르든 끈이 사라지고, 그에 고무된 춤꾼들은 더욱더 격렬한 탈주의 춤을 춘다. 비트가 강한 음향은 점점 빨라지고 그에 조응하며 모였다가 흩어지고, 그러다 두 패로 나뉘고, 또 둘씩 짝을 이루며 다채롭고 강력한 군무가 펼쳐진다. 그러다 지쳐 쓰러지고 다시 일어났다가, 또 쓰러지기를 반복하다, 급기야 두 명의 춤꾼이 손을 잡고 서 있다. 불현듯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또 다른 춤꾼 한 명이 다가와 이들의 손을 떼어 놓고 만다. 다시 흩어진 춤꾼들은 각자의 길을 모색하듯 주변을 살피고, 무대 여기저기를 서성이고 돌며 하늘을 본다. 각자는 따로 또 같이 소통과 만남을 희구하는 행위를 계속한다.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하늘을 응시하고, 함께 모여 같은 곳을 보고, 또 어떤 이는 그들 주위를 빙빙 돌며 힘차게 뛰기도 하고, 염원의 몸짓을 구사하는 등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서기 위해 애쓰지만,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서로에게 다가서기 위한 고된 노력이 느리고 진중한 군무와 행위로 묘사된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되지만 메시지는 뚜렷하게 읽힌다. 이제 춤꾼들은 검은색 의상과 흰색 의상을 입은 두 패로 뚜렷이 나뉜다. 흑과 백은 스치듯 지나치고 엇갈린다.
LNYdance〈이음-다가서다〉ⓒ이남영 |
이남영의 솔로 춤이 합세하면서, 군무는 기세를 높여간다. 맹렬한 군무가 펼쳐질 때, 무대 바닥에는 기하학적 도형이 새겨지는데, 이는 온전한 도형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무너지는 형상을 띄고 있다. 마치 군무의 기세에 눌려 세상을 틀 짓던 격자가 와해하는 형국이다. 그러기에 군무는 여세를 몰아 마지막 힘을 쏟아붓는다. 그런데 이 대목의 춤에서 무트댄스 메소드가 가진 강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내면으로 에너지를 응축하고, 상체를 비틀어 꼬며 힘을 조절하고, 바깥쪽으로 내어 뻗는 팔 동작과 회전 동작을 통해 일시에 에너지를 분출하는 독특한 움직임은 관객의 시선과 감정을 강하게 잡아끈다. 하지만 이런 춤에 의미가 실리지 않는다면 감응은 미미할 것이다. 자칫 공허한 몸짓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독창적인 호흡법으로 구심력과 원심력을 적절히 조율하면서 수행되는 춤이 아름다움보다는 의미 전달을 강조하는 움직임으로 표현성을 극대화할 때 무트댄스가 가진 독특한 메소드도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말이리라.
LNYdance〈이음-다가서다〉ⓒ이남영 |
그렇지만 무트댄스는 오늘의 감성에는 다소 낡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평자가 근래 목격한 무트댄스 계열의 몇몇 작품들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예전의 묵은 모습 그대로였다. 곧 무트댄스도 현대적 감성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남영의 이번 공연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는 주제와 메시지를 강조하는 경향을 가진 안무가이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이남영은 무트댄스 메소드을 바탕으로 시의적절한 현실의 문제를 깔끔하고 세련된 몸짓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무트댄스 메소드를 오늘의 감성에 맞게 잘 활용하는 안무가로 여겨진다. 무트댄스는 한국춤 계의 소중한 자산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무트댄스에 동시대성을 입히는 작업도 요긴하다. 이남영은 무트댄스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데 있어 선봉에 선 안무가로 보인다.
LNYdance〈이음-다가서다〉ⓒ이남영 |
마지막 장면에서 조그만 반전이 일어난다. 그들을 소외시키는 끈을 제거하기 위해 끊이지 않게 애쓰던 춤꾼들이 무대 상, 하수 양쪽에서 손목에 끈을 묶은 채 일시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남영은 끈을 쥔 채 하수 뒤쪽에서 등장에 상수 앞쪽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급기야 세상은 다시 온통 끈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아니, 춤꾼들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세상을 조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촘촘하게 짜진 관계의 사슬 속 한 국지적 지점에 스스로 갇히기를 원하는 듯. 그러다 이남영은 혼자 그 끈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다른 춤꾼 한 명이 서서히 그에게 다가오고, 둘은 동시에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는 듯하지만, 이들도 끝내 손을 놓아버린다. 만남은 끝까지 성사되지 않은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언제나 이미 존재론적 틈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같은 사이 공간이 팬데믹 상황에서 더 도드라져 보인 것일까. 〈이음-다가서다〉는 나와 너 사이의 경계를 넘어 내 바깥에 있는 타자를 향해 가지만, 타자에게 가닿고자 부단히 희망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는, 그래서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실존의 부유하는 심리를 표현성 강한 무트댄스 움직임으로 알맞게 형상화한 공연이었다.
최찬열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