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펜데믹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생존 방식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누구는 잃어버린 시간처럼 흘려보내기도 하고, 누구는 시간(역사)을 다시 인식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견지한다. 2년여의 긴 터널을 지나오며 전미숙은 작품 〈거의 새로운 춤〉(4. 14. 대전예술의전당아트홀)에서 창작자로서 전대미문의 환경적 변화에 대응하며 돌파하려는 태도를 피력한다. 하늘 아래 유일무이한 새로운 것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전략적인 절차에 방점을 두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 낱낱이 소개된다. 그 과정에서 안무가는 시간을 거슬러 보면서 뉴노멀 한 세상에서 춤의 존재성을 논의하자고 제안한다. 예술가가 피해갈 수 없는 창작이란 숙명적 무게를, 즉 그 역력한 고민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않고 춤을 만드는 구성원들과 함께 판을 열어, 90분 동안 춤적 입장을 실질적인 대화로 풀어보자는 시도이다. 실연자들(안무가, 댄서)은 창작에 매진했던 입장과 춤의 양태(mode)를 파헤치며 관객을 공론의 장으로 흔쾌히 초대한다.
‘과연 새로운 춤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발단이 된 작품은 4장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분한 심포지엄 방식을 취한다. 안무가는 모더레이터(moderator)가 되고 무용수들은 발제자가 되어 그 과정에서 인지되어 연상된 의식을 말과 움직임으로 화답한다. 애초에 완벽한 결론 자체를 포기해 보이는 작업은 오히려 변화의 시기를 살아낸 실연자의 경험과 팬데믹 시기 만들었던 무용수들의 작품들과 연계시켜 편집하는 형식적 새로움을 택한다. 일반적인 심포지엄이 하나의 주제를 두고 여러 발표자가 나름의 학문적 의제를 펼치듯, 네 개의 장은 무용수 저마다의 소회가 새로운 맥락으로 재구성된다. 무용수와 안무가, 무용수와 무용수는 상호 대등한 위치에서 질문과 답을 이어가며 춤에 대한 인식의 장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스프링페스티벌×모다페 공동 프로젝트 |
첫 장은 ‘춤에 대해 춤하기’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소제목으로 무용수가 작품에 응했던 경험을 추적하여 구성한다. 네 명의 무용수들(김보라, 박상미, 정태민, 최수진)은 의자를 들고 나와 앉아 마치 공연 후 관객과 대화를 하는 모양으로 임한다. 무대 뒷면 스크린에는 안무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어가 제시된다. 이들은 순차적으로 11가지(준비, 등장, 퍼스트스텝, 밸런스, 속도, 암전, 점프, 방향, 절정, 커튼콜, 퇴장) 조건에 반응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릴레이식으로 이어간다. 말과 동작으로 11가지 안무 구성 요소를 수행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무대는 적절한 설득력을 갖춘 논제로 읽혀진다. 예를 들면, 40세의 무용수 최수진은 “6만 800시간 동안 춤추고 가르치고 작업을 하였으나 여전히 마지막 ‘커튼콜’과 ‘퇴장’에 대비해야 하는” 생존과 생계에 직면한 자아임을 드러낸다. 경험과 기억에 기인한 몸짓을 수집하여 곱씹어 보는 일련의 행위는 공연을 성립시키는 ‘도구로서의 무용수’가 아니라 춤을 발생시키는 ‘실천적인 주체자’로 무용수를 재고하게 한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스프링페스티벌×모다페 공동 프로젝트 |
첫 장이 마무리되고 무대에 등장한 전미숙은 창작자로서 걸어왔던 길을 회고한다. 인생이 “축제가 아니라 숙제처럼 살아온 삶”이었음을, 새로운 춤을 만들려고 투쟁적으로 살아오며 “관습적인 아름다움을 벗어던져 날것의 자신을 드러내며 미에 반격”을 가해온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예측불가능한 팬데믹 한계 상황에서도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새로운 무엇이 때론 강요와 무거운 십자가였음을 토로하는 자전적인 고백이다. 하여 안무가는 ‘새로운 춤’이 무엇인지 되물으며 실체를 해부해 보자는 듯하다. 관객은 마치 테드(TED) 강연회를 보는 듯한 인상으로 창작자의 어려움과 춤과 공연예술의 생태적 조건을 이해하게 된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스프링페스티벌×모다페 공동 프로젝트 |
앞의 장면들이 실연자 개인의 이야기에 주목했다면 과학 기술의 진보를 목도하고 있는 세상으로 확장되어 ‘춤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지’ 논의가 이어진다. 먼저 변화에 매몰되어 선택적 고립을 택한 군상들의 무기력한 이미지(2장 ‘없는 변화’)가 군무로 그려진다.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 도시의 각종 소음에도 개의치 않은 군상들은 접촉이 금지된 공간에서 잔류하는 익명의 무리이다. 원형으로 돌아가는 시간의 변화를 은유하는 무대에서도 무용수들은 요동하지 않으며 좁은 반경의 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적막이 느껴진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스프링페스티벌×모다페 공동 프로젝트 |
이어지는 VR기기로 보는 실물 같은 세상(3장 ‘춤과 테크놀러지’)은 앞 장면의 침울함과는 대조적으로 유토피아 디지털 공간을 여행하듯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김보라와 신창호는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예측하고, 스크린에는 AI 마디(신창호가 〈비욘드 블랙〉에서 무용수의 움직임을 복제한 인공지능)가 인간 무용수보다 정확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이를 이어받아 AI 마디의 움직임을 재현한 무용수들의 기계적인 동작은 접촉하며 소통하는 인간의 춤과는 거리가 있다. AI에게 인간의 움직임을 입력시키고 인간이 다시 따라해 보는 순환적 발상은 춤이 생산적이고 활동성만을 갖춘 노동 같은 행위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업은 신창호가 제 작년 비대면 시기에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발표한 〈비욘드 블랙〉 작품으로 춤과 공연이 과학 기술과 공존하며 실재와 디지털 공간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탐색하였다. 전작보다 방향성이 명쾌해진 본 무대에서는 AI가 감정과 의지의 산물인 인간의 춤을 대체할 수 없음을 표방하고 있다. 포스트휴먼의 세상에서 인간의 역할이 무력화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은 2장과 3장을 대비시키며 인간의 고유한 신체성(인식이 몸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는)을 재고하게 한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스프링페스티벌×모다페 공동 프로젝트 |
안드레 레페키나 보야나 쿤스트의 비판적 논의를 작품에 적용해보려는 드라마터그의 역할이 이 작업에서는 중요한 축을 잡고 있다. 어느 부분은 설득력(‘희생하는 무용수’의 복권)이 있고 어느 부분은 이론적 틀에 머무는 것(‘춤과 노동’) 같으나, 안무자는 본인이 수용 가능한 정도로만 작품에 적용시켰다. 또한 말의 성격으로 의미 전달은 분명하지만 그 행간을 채울 춤적 교감(언어의 한계, 은유를 통해 깊어지는 설득력)이 아쉬울 즈음 전미숙과 차진엽의 실연(4장 ‘뉴노멀’)에서 빈틈이 채워진다. 두 사람의 서사로 연결된 춤 세계이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스프링페스티벌×모다페 공동 프로젝트 |
먼저 무대 배치부터 마무리까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전미숙은 관객이 보기에 무대 왼편 앞에, 차진엽은 오른편 뒤에 서 있다. 맞닿지 않은 거리에서 세대 간, 사제 간, 창작성향 간의 간격을 읽을 수 있다. 전미숙은 전작 〈58년 개띠〉에서 고정관념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창작으로 진입할 수 있었음을, 차진엽은 숨을 참고 견디며 멈춰보는 것도 삶의 일부로 인식되었음을 말한다. 60대와 40대의 창작자가 서로의 춤을 공유하는 동안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이내 해제되는 인상이다. 전미숙이 퇴장 후 차진엽이 무대 중앙으로 나오며 마지막을 장식한다. 마치 안무가가 다음 세대에게 예술가의 책임과 무게를 건넨다는 인상으로 읽히기도 한다. 차진엽은 작년에 발표한 〈원형하는 몸〉의 원리와 프리다이빙 체험과 연계시켜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제법 큰 대전예술의전당 무대를 감싸 안은 바다의 광활한 영상에 압도 되었고, 그 중심에 선 그녀의 존재는 숭고한 자연에 속한 작은 생명체로 유영하고 있었다. 파도의 일렁임에 동요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였다.
전미숙이 아름다운 몸 사용법을 포기하고 척박한 창작지반을 개척해 왔듯이, 박제된 미의 전복을 통해서만 새롭게 다다를 수 있는 창작의 운명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나의 원형과 춤의 원형을 분리시키지 않고 자신만의 춤의 본질에 가까워지려는 차진엽의 지속적인 의지도 주목된다. 얼마 전 김현진의 자전적 고백인 〈나의 이야기〉(3.31. ECC삼성홀)에서 독립예술가의 가감 없는 일상적인 삶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무대에서 예술가들의 솔직한 발언은 관객에게 공감과 위로를 준다. 이들의 자기성찰은 고독한 자기 수련으로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내적 투쟁이기 때문이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 〈거의 새로운 춤〉은 드라마터그와 무용수와의 공동 협업으로 각 장을 주도한 실연자들의 개성이 출중한 이상적인 모델에 가깝다. 구체적인 사례로, 피나바우쉬는 얼마 전 타계한 라이문트 호그(부퍼탈댄스시어터의 드라마터그이자 안무가)와 페터 팝스드(부퍼탈댄스시어터의 무대디자이너)와 긴밀한 협업으로 위대한 유산(작품)을 남기었다. 또한, 무용수를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도구로 여기지 않고 다국적 무용수의 문화적 개성이 존중된 작업으로 민주적인 현대춤의 가치를 확보했다. 전미숙이 자신의 창작 태도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며 변화의 동시대를 살아낸 실연자들의 작업을 재구성한 방식도 새로운 안무적 모색이자 실천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안무에서 형식에 대한 고민은 중요한 창의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다만 춤의 정체성을 묻고 답을 찾는 과정으로만, 맥락을 구성한 연출로만(짜깁기로 보일 수 있는) ‘새로운 춤’의 발견이라고는 확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거의 새로운 춤’이라는 제목이 적절해 보인다.
첨언으로, 전미숙의 작품은 대전 스프링페스티벌과 모다페의 합작으로 지역의 영향력 있는 축제에서 처음으로 현대춤에 투자하고 모다페(국제현대무용제)와 공동기획한 것이다. 작년 ‘모다페 인 대구’에 이어 대전에서 인프라를 확보하려는 모다페 측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춤 대중화라는 미명아래 작품의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키기보다 진검승부로 관객과 춤의 실상을 공유한 전미숙의 렉처퍼포먼스는 관객확보 차원에서도 긍정적으로 참고할 만하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