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남녀가 주인공인 영화나 뮤지컬에서 이야기의 정점에서 감동의 촉수를 건드리는 건 대부분 주인공들의 듀엣이다. 둘 관계의 우여곡절과 난국 혹은 파국의 고비에서의 주인공의 2인무는 문제를 드러내거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극복의 동력으로 작용하며 정서적 공감의 계기를 준다.
춤의 역사에서 2인무의 정점은 발레의 파드되이다. 발레의 파드되가 어느 2인무와 비교하더라도 2인무의 정점을 찍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낭만주의 이래 남녀의 관계와 사랑은 낭만이라는 강력한 포장지를 갖게 되었으므로... 그럼에도 정형화된 발레의 파드되는 이제 가끔만 즐기게 되는 시대물일 뿐, 아무리 낭만적 관계의 전형이라 할지라도 공감의 폭은 좁아졌고 대중들에게 이제 낭만은 과거형이다.
요즈음 일반인들은 틱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춤 챌린지로 춤을 즐기며 논다. 그 중 듀엣이라는 ‘2인춤’으로 범주를 한정하고 보자면, 두 명의 춤이 남녀뿐 아니라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 형제, 자매, 친구 등등의 춤들로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관계가 무엇이든 춤을 잘 아는 한 쪽이 잘못 추는 이에게 춤을 가르쳐 주며 즐겁게 듀엣을 완성하면서 보는 재미를 준다. 이렇게 2인을 구성하는 관계는 다양해진 반면, 춤의 형식은 단순하다. 거의 같은 순서의 춤을 쌍둥이처럼 함께 추거나 약간 변형하여 연결된 동작이나 조화로운 동작에 머무는 것으로 일체감을 주로 초점으로 한다. 함께 같은 동작을 할 때 일체감은 급상승한다.
모던 댄스부터 그래왔지만, 동시대 춤에서 관계를 드러내는 춤들은 주가 되지 못했다. 초점이 되더라도 기본적으로 쿨하다. 쿨하다는 느낌은 정서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에 다양한 정서가 드러나지 않아 멋져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차가워 보이기도 한다. 감정은 대부분 소거되어 단순하고 다양하지 않게 되고, 정서를 드러내는 건 관계보다는 움직임과 리듬 그리고 군무의 형식을 통해 동적인 에너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현대무용 여성 안무가 두 명의 작품에서 동시대 현대춤의 일반적 공식을 깬 인상적인 듀엣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 물론 이들의 듀엣은 남녀의 듀엣으로는 공통적이나 너무도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남녀 듀엣의 위치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한 작품의 듀엣은 집요하게 관계의 심연에 천착해 들어가 그 바닥까지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준 진한 맛의 듀엣이라면, 또 한 작품의 듀엣은 듀엣이되 그 관계를 에워싸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사회적 상황에 중첩 시키며 뭉근하게 바래게 만든 특이한 듀엣이었다.
이은경의 〈뻔쩍〉
제목부터 장난스런 〈뻔쩍〉 (2024.7.26.-27., 아르코 소극장)은 그간 육아로 공백이 있었던 이은경이 돌아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이글의 촛점은 듀엣이라 난 관계와 듀엣만 할 것이지만, 이 작품은 박시한과 이은경이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는 사이, 끝까지 몰아간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디베르티스망(막간춤)을 맡은 천종원과 김민지 두 장면을 빼고는 둘의 관계를 다룬 순도 높은 듀엣 작품이다. “A의 관성적 걸음은 B의 자력에 이끌려 감정의 속력과 신체의 방향이 변화한다. 이러한 현상은 무대 위의 두 대상을 충돌시키고 스파크가 발생한다.” 두 대상의 “신체와 감정의 불똥이 튀는 상황”을 풀어낸 〈뻔쩍〉은 관계의 시간이 오래된 만큼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는 것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이은경 〈뻔쩍〉 ©Tae |
크게 3개의 장으로 나눌 수 있는 이 작품은 20대부터 친구였던 둘의 풋풋했던 시절부터 그려낸다. 친구로서 서로 동등하고, 균형있게,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파트너 관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경쟁도 있고, 절대 밀리지 않는 팽팽한 긴장도 있다. 그러다 주로 감정이 과잉이 되는 측은 여자이다. 남자는 덤덤한데 여자는 자주 오버하고 안기고, 기대고, 친한 척하고 남자는 무관심하고, 무시하고, 도망 다니고 여자를 떼어낸다. 여기까지 그냥 멜로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이은경 〈뻔쩍〉 ©Tae |
이어진 마지막 장에서 이미 몸을 아끼지 않던 이들의 몸이 체온이 올라가고 땀으로 젖었고, 관객도 이미 익숙해진 상태에서 그간 보여준 관계의 퇴적층은 지진을 일으키듯 다른 질감으로 넘어간다. 이제는 보여주기의 나긋나긋한 모습은 없고 어느새 이 둘은 머리를 맞대고 대치 중이다. 머리를 맞댄 모양은 숫컷 양들이 경쟁을 하는 전형적인 동작이나 라 비 앙 로즈가 흐르는 가운에 박시한과 이은경의 그 모습은 각자의 내면으로 들어가거나 관계를 추상화한 이미지로 기능한다. 그럼에도 이 두 몸이 15분 넘게 오로지 머리를 맞대고 시선은 땅을 향한 채 바닥으로 땀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은 서로를 향해 힘을 밀지 않으면 이 관계가 유지되지 못하는 딜레마 속에 놓여 있을 때, 보는 이들 역시 이 극한으로 결박된 상황에 공감하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 올라 그들의 땀처럼 무언가 존재의 밖으로 흐르게 만든다.
이은경 〈뻔쩍〉 ©Tae |
관계의 당사자인 이은경과 박시한이 온몸으로, 과거부터 공연이 이뤄지는 지금까지 그 관계의 퇴적층으로부터 거슬러 올라와 또 한판의 관계를 만드는 걸 보는 것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뻔쩍〉에서 이은경이 ‘공연’이 ‘관전’이 되는 아슬아슬한 듀엣을 만들었다.
이가영의 〈비수기〉
이은경이 보여준 관계는 인생이라는 링 위에서 게임이 끝나기 전에는 퇴장할 수 없는 룰 속에서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관계의 숙명을 보여준 것이라면, 〈비수기〉(모므로살롱 이가영 안무 〈비수기〉 2024.7.12.-13. 대학로 소극장)에서 이가영은 서보권과 진정 ‘비수기’에 접어든 남녀의 모습으로 커플댄스를 춘다.
이가영 〈비수기〉 ⓒ류진욱 |
작품 〈비수기〉는 임대, 공실, 젠트리피케이션에 관심을 갖고 23년부터 리서치를 진행한 도시의 건물, 상업적 공간에 대한 작품이다. 이가영은 자기가 주로 활동하는 동네에서 눈에 띠게 많아진 빈 건물과 임대 현수막을 보며 리서치를 시작했고, 전 세입자는 나가고 아직 새 세입자는 들어오지 않은 공간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았으며 그 느낌의 재연을 위해 무대 위에 플라베니아(플라스틱 골판지)와 보양 비닐과 보양 테이프로 가벽을 지어 놓았다. 그리고 다른 춤들이 지나간 후, 그 가벽 안에서 듀엣이 추어진다.
이가영 〈비수기〉 ⓒ류진욱 |
이 둘은 무표정하다. 그리고 커플댄스의 형식으로 서로 마주 보고 예의 있는 접촉을 하고 있지만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유지된다. 오히려 이들은 실제적인 사람, 남녀의 느낌을 서서히 탈각시키는데 특히 인부가 된 듯 출연자와 스탭들이 가 벽체 해체 작업을 하기 위해 그 공간 안으로 침범하고 해체과정의 온갖 소리까지 둘의 공간을 넘어 들어오면 이 둘의 듀엣은 여전히 지속되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유령화된다. 관계는 과거이고, 현재이지만 이들과 공존하는 철거는 파괴적 현재이고 철거 후에도 남은 이들은 새로운 공간에서 미래가 된다.
공간을 통해 현존의 춤들을 윤색하여 시간의 중첩을 만들어 내는 점에 있어서 이가영은 기술자다. 그는 마치 공간을 만들어 내는 듯하지만 슬쩍 시간을 끼워 넣는다. 극장을 온전히 바꿔 놓는 것이 아니라 슬쩍 빌려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고립을 이미지화하고, 그 안으로 고립의 시간을 가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 안을 뛰어다니고 춤을 추는 사람들은 허무와 소외의 입자들이다.
이가영 〈비수기〉 ⓒ류진욱 |
이번 〈비수기〉의 듀엣에서 공실이 된 공간 안에 가봤을 때 원상태로 돌려놔야 하는 계약에 충실함에도 항상 아주 조그만 것이라도 떨궈져 있고, 물건이 남아 있는 것은 이가영은 “흔적”이라고 했다. 그 흔적의 느낌은 서보권과의 듀엣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의 타의에 의해 비우고 떠나야 했던 공간, 도시의 뒷면에서 보이지 않게 생존을 중단시키는 거대한 어떤 힘이 작용하는 중에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듯 두 남녀의 듀엣은 헐리고, 뜯기고, 찢기고, 사라져도 영원히 남을 것 같은 어떤 생명력의 흔적처럼 묵직하다.
이 두 안무가는 둘 다 올해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아르코극장과 대학로극장 대관에는 선정이 된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올해 지원금 심사에서 독립안무가들은 대거 탈락하고 결과적으로 학연을 중심으로 한 선정 때문에 많은 문제 제기가 있었던 그 해이다. 그 여파의 엇박자는 지원금을 받지 못한 작품이 대관심사에서는 선정되는 경우가 있게 되면서 박자를 맞추기 정말 어려워진다. 단체 입장에서는 자비를 들여 공연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또 한 번 힘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많은 독립안무가들이 대관 선정의 기회를 놓치기 싫어 최소한의 비용으로 공연을 하는 것을 선택하였고 이 두 작품 역시 다른 무대적 시도들을 과감히 포기한 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과 출연자들의 몸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 두 공연을 보면서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넘어가면서 힘을 쌓아가고 있는 여성 안무가를 발견한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하는 질문처럼 마음이 두 겹이 되었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