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등포문화재단에서 기획한 2024 주제극장(‘오! 나의 감각들’)에 안무가 류장현의 〈블랙〉(영등포아트홀, 7. 13.)이 첫 문을 열었다. 류장현은 변화와 실험을 추구하며, 예민한 감정을 다루는데 주저함이 없기에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관심이 가는 예술가다. 안무가는 사회 비판적인 문제에서부터 인간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뤄왔고, 전통적인 소재부터 현대춤, 연극, 영화, 음악, 블랙코미디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수용하는 융합적인 창작을 해오고 있다. 이번 신작 〈블랙〉은 흑인음악과 스트릿 계열의 춤에 류장현 특유의 연극성이 결합되어 ‘블랙’을 ‘어둠’으로 환유한 작업이다. 블랙이란 색깔의 이미지에서부터 어두운 극장과 무대, 어두운 감정, 어두웠던 경험들이 총체적으로 동원된다. 류장현과 친구들은 이 어둠이 드리운 감정의 속살을 소울 충만한 음악과 함께 정동(情動)의 춤으로 벗겨낸다.
인간 내면에 깊이 숨겨진 어두운 감정을 춤과 음악으로 얼마만큼 잘 보여줄 수 있을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둠으로 침식된 내면이 〈블랙〉에서 실체를 드러내었다. 아니 토해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모든 것이 온통 블랙으로 뒤덮인 무대에서 광기 서린 몸짓으로 관객의 심장을 강타한 7명의 춤꾼들(김채은, 김채희, 백두산, 백진현, 서준혁, 장보경, 한규은)은 어둠의 마력에 도취된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빛이 충돌하여 발생하는 스파크처럼 자신만의 응어리진 감정을 한시간 내내 거침없이 발산하였다. 놀라운 에너지다.
류장현과 친구들 〈블랙〉 ⓒ영등포문화재단/옥상훈 |
깜깜한 무대바닥을 헤매고 있는 춤꾼에게 누군가 다가온다. 이내 그를 덮치고 어디로도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무거움을 가중시키는 인상적인 첫 장면이다. 일렬로 도열한 7명의 춤꾼들은 힙합과 리듬 앤 블루스 곡(Unchained, James Brown& 2Pac)에 맞춰 각자의 분노를 표출한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의 그림처럼 빛의 음영에 따라 복잡한 감정의 정체가 드러난다. 무대 양 옆에서 빛이 투사되고 켄트릭 라마(Kendric Lamar)의 “세상에 속지 말라”는 랩(N95)에 나를 짓누르는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춤을 춘다. 꾸밈없이 흔들고, 히스테릭 하게 털어 내고, 반복적인 웨이브로 말이다.
류장현과 친구들 〈블랙〉 ⓒ영등포문화재단/옥상훈 |
음악에 대응하던 직설적인 춤과는 달리 무대는 연극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뱀의 형상 같은 모양의 긴 검정 천이 등장하고 이내 춤꾼 몸이 흡인된다. 거부할 틈도 없이 천에 빨려 들어 간 형체에 모든 댄서가 몰려들어 머리를 숙여 흐느낀다. 어둠의 터널 내지는 상실(죽음)의 경험으로 여겨지며 어두울 수밖에 없는 심상(心象)의 단서로 읽힌다. 춤꾼들은 동물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기도 휘청거리기도 하며 번민과 갈등의 정서를 표출한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반응이다. 무대는 여전히 어둡고 춤꾼들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몸의 실루엣이 강조된다. 재즈풍의 끈적한 리듬을 흡수한 미장센으로 몽환적이고 질펀한 분위기에 취할 지경이다.
스트릿춤 배틀과 유사한 광경이 펼쳐진다.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 자기만의 느낌으로 발언하는 릴레이 식의 고해가 이뤄지고 서로의 감정이 연대된다. 고조되는 색소폰과 드럼 연주에 맞춰 춤꾼들은 점차 에너지를 끌어 올려 카타르시스의 순간과 마주한다. 신나게 뛰고 도는 희열의 정화의식을 치르며 극한의 고지에 다다른 춤꾼들은 ‘살아 있음’과 ‘살아 내야 하는’ 의지를 확인 했으리라. 쓰러진다. 일련의 난장은 어둠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력한 표명이자 역설적인 몸의 선언인 셈이다.
류장현과 친구들 〈블랙〉 ⓒ영등포문화재단/옥상훈 |
다시 첫 장면으로 전환, 사회적 타자들의 시선으로 여겨지는 빛이 춤꾼을 어둡고 후미진 곳으로 몰고간다. 처음과 유사하나 여러 명의 춤꾼들이 동원되어 춤꾼을 더욱 압박한다. 현실은 어둠의 요소들로 헤아릴 수 없는 비극으로 여전히 블랙의 상태임에 틀림없다. 분노, 상실, 공포, 차별, 우울감이 만연한 세상! 우리 안의 어둠을 상기하게 한다.
아마도 류장현은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숱한 시간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되뇌었을 것이고, 어둠과 빛이 공존하며 동반되는 삶의 이치를 작업에 반영했지 싶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생기고, 어둠 없이 빛의 존재는 빛나지 않듯, 〈블랙〉에서 우리는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빛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바람(춤)도 읽어낼 수 있다. 춤꾼들이 자유롭게 날뛰는 해방된 몸짓에서 삶의 기대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이를 류장현은 “어둠은 곧 빛나기 전이라는 우주의 운행을 받아들인 자들의 스웨그(swag)”라 말한다.
류장현과 친구들 〈블랙〉 ⓒ영등포문화재단/옥상훈 |
〈블랙〉은 스트릿춤과 흑인음악이 만나 표면적인 블랙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뼛속까지 서린 한도 소환했다. 소울, 재즈 랩, 힙합,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흑인음악 뮤지션들 가사에 담긴 의미와(흑인 인권이나 사회풍자와 세대 비판적 가사) 자유를 갈망한 투쟁적인 스트릿 춤에서 자아 존재감을 확인하듯 아웃사이더들의 지배적인 반항 의지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시각적으로도 회화에서 극적인 대비로 명암을 처리하는 테네브리즘(tenebrism)같이 조명의 쓰임새는 블랙의 존재감을 과시함과 동시에 어둠과 빛, 특히 어둠을 유발하는 여러 감정의 양상을 밝혀가는 구원자가 되어 춤과 연주와 음악과 함께 서사를 이끄는 주체가 되었다. 무대를 일관되게 어둡게 유지하나 절제된 빛(사용)의 시각적인 대비로 미적 사유를 촉발하게 한 공신이다. 춤꾼 내면의 그림자를 담기도, 희미한 실루엣으로 심리적 갈등을 강조하기도, 타자의 차별적 시선이 되기도 그리고 여명(黎明)까지도 말이다.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삶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오늘의 사태로 다가왔다.
류장현과 친구들 〈블랙〉 ⓒ영등포문화재단/옥상훈 |
어둠의 이미지에 경도된 된 〈블랙〉은 현대인의 트라우마인 우울과 슬픔의 시간을 파헤친 작품이다. 안무가는 “어둠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한줄기 빛이 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한줄기 빛 같은 장면이 마지막에 보이긴 하나 더 보여주면 좋겠다. 힙 한 힙합으로 풀어낸 살풀이로 블랙의 장막을 거둬줄 춤으로! 빛을 향해 질주를 멈추지 않는 열렬한 춤으로! 거친 춤사위 속에 숨겨진 류장현의 뜨거운 마음이 <블랙>에서 점화되었다.
김혜라
현장 비평가로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등단했다. 월간 <춤웹진>과 <더프리뷰>에 정기적으로 컨템퍼러리 창작춤을 기고하고 있으며, 국공립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단에서 심의와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세종시문화재단 자문위원, <춤웹진>편집위원이며 중앙대에서 비평관련 춤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