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짤막하나마 서핑 동영상을 보기만 해도 익스트림 레저로서 그 매력은 직감적이다. 파도타기라는 이색 소재를 택하여 울산시립무용단이 지난달에 박이표 신임 예술감독의 첫 정기공연작으로 올린 공연작은 〈서퍼(The Surfer):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울산문예회관 대공연장, 6. 29.). 서퍼를 파도타는 사람보다는 파도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 쪽으로 비틀음으로써 서퍼를 폭넓게 형상화할 여지를 선택한 공연작이다.
〈서퍼〉는 넓은 무대를 채운 군무진이 가부좌로 정좌해서 어둠 속에서 양팔을 느리게 휘저으면서 간혹 상체를 숙였다 펴며 그 무엇을 염원하는 듯한 모습으로 장면을 연다. 그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공연은 이 프롤로그에 잇달아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노니는 모습과 열정적으로 춤추는 군무로 연결된다. 이어서 해변에서는 한결 예사스러울 남녀들의 그리움과 헤어짐의 심사가 집단의 정황으로 그려진다. 그 다음에 ‘서퍼’라 이름 붙여진 3장에서 비교적 느리고 정제된 군무가 내적 성찰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후에 다시 빠른 곡조를 배경으로 엑스터시의 집단무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울산시립무용단 〈서퍼〉 ⓒ김채현 |
공연의 기조를 이루는 다이내믹함처럼 〈서퍼〉에서 근 50명의 군무진은 서핑 특유의 에너지 같은 것을 한껏 드러내었다. 프롤로그에 잇달은 느리게 노닐다가 열정적으로 춤추는 대목에서는 사람들이 현실 너머의 딴 세상을 주유하는 정경이 펼쳐지고 후반부인 3장 ‘서퍼’는 한국춤의 느리며 깊은 호흡으로 심신을 조율해가며 천지 우주와 조화를 꾀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안무자가 이 대목에 대해 동해안 별신굿 의식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같은 3장에서 엑스터시춤들은 별신굿에 따르는 난장에 해당하는 분위기를 담았고 또 하나의 세계를 여는 의미가 있다. 3장 전반부 별신굿을 염두에 둔 정경에서 다이내믹함보다 느긋함이 승하긴 했어도 이상의 네 부분은 〈서퍼〉에서 드러나는 에너지를 구현한 대목으로서 공연의 주축을 이루었다.
울산시립무용단 〈서퍼〉 ⓒ김채현 |
파도타는 사람 이상의 존재로 서퍼를 형상화하는 작업은 이상의 부분들 이외에 남녀들의 그리움과 헤어짐을 그린 ‘해변의 야상곡’에서도 뚜렷하다. 여기서 국악 정가 보컬리스트 조윤영의 소리가 잠비나이의 잔잔한 반주와 함께 유장하며 청아한 독창으로 울려퍼지면서 우미(優美)하되 센티멘털한 정경을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트로피컬한 밝은 색상의 비치 타올이나 스커트가 소품으로서 야밤의 로맨틱하며 화려한 분위기를 짙게 만든다. 먼저 여창 가곡 평롱 ‘북두칠성’이 노래되는 속에서 무대에는 다수의 선남선녀가 무대 여기저기서 짝을 이루며 속삭이거나 홀로 외따로 떨어진 양상을 보인다. 선남선녀가 흩어지고 나면 후반에는 일곱 명의 여성들이 무리를 지어 등장한다. 〈춘앵전〉 창사 ‘고울사 달빛 아래 걸음이여’가 암시하는 것처럼 일곱 여인네들은 스스로들 고혹적인 자태를 지어나간다. 서퍼가 해변의 존재이므로 ‘해변의 야상곡’은 적절한 설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변의 야상곡’ 후반부 여인네들만의 집단무는 서사가 느껴지는 반면에 전반부 선남선녀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부분에서 무용수들의 관계가 밀도가 낮아 서사는 평이한 편이다.
울산시립무용단 〈서퍼〉 ⓒ김채현 |
‘해변의 야상곡’ 다음에 이어진 ‘한밤의 유희’는 난장춤판이다. 이 부분은 신(神)대를 우뚝 들은 사람들의 판굿, 난장연희(사물놀이와 날라리, 상모돌리기, 버나놀이로 구성), 아낙들의 춤, 눈가린 작대기춤, 고무줄뛰기춤 같은 볼거리로 구성된다. 〈서퍼〉에서 ‘한밤의 유희’는 너무 일찍 등장하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공연작 〈서퍼〉의 흐름을 사족(蛇足) 이상으로 가로막는 부작용을 낳았고 공연의 여운을 남기기도 힘든 대목이다. 굳이 ‘한밤의 유희’ 같은 난장을 설정하려면 그 구성들 가운데서도 공연 맥락에 비추어 날렵한 아낙들의 춤과 고무줄춤 정도는 고려할 만하겠고 그것도 공연의 에필로그 직후에 설정되는 것이 작품의 공감대를 다지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울산시립무용단 〈서퍼〉 ⓒ김채현 |
〈서퍼〉에는 기다란 목재 판자가 소도구로 등장한다. 서핑 보드에서 착상했을 이 판자를 출연자마다 하나씩 가졌다. 니은 자 모양의 이 소도구는 눕히거나 세워지고 기우뚱 기울여지는 등 다용도로 활용되고 활용도도 높은 편이다. 서핑 관련 소재에 어울리는 오브제들이 이루는 조합은 서핑만큼의 짜릿한 쾌감은 아닐지라도 공연에서 미적 흥취를 북돋우었다. 전체적으로 남녀 의상 공히 검정색을 주색조로 하면서 비치 타올이나 스커트를 밝고 화려한 트로피컬한 색감으로 처리함으로써 흐드러지며 세련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서퍼〉가 자체의 폭넓은 서사를 구성해냄에 있어 크로스오버 국악 밴드 잠비나이의 툭 트인 음감과 여러 음색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울산시립무용단 〈서퍼〉 ⓒ김채현 |
서퍼,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람들이 기다리는 파도는 무엇인가. 도입부에서 염원하는 모습들, 그 다음에 묘사된 선남선녀들의 그리움과 헤어짐, 현실 너머 세계를 주유하는 정경, 천지우주와의 조화, 별신굿을 연상케 하는 엑스터시의 난장 들에 비추어 파도는 인간의 존재와 결부된다. 파도타기에서 파도가 즉물적이기 마련인 것에 비하여 〈서퍼〉에서 파도는 존재론적이다. 이렇게 파도의 의미가 확대됨으로써 군무진이 활약하는 대형 무대에서 〈서퍼〉는 메타포와 깊이 파고드는 공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울산이라는 지역은 그곳의 선사시대 유적지 반구대에 새겨진 고래 그림이 말하는 것처럼 지역민들이 바다-파도를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한 곳이다. 지역의 공공무용단 예술감독의 첫 정기공연작을 지역 정체성에 밀착된 소재로써 풀어나가면서 춤과 바다에 대해 잠자던 감성을을 일깨운 의의가 〈서퍼〉에서 도드라진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한국춤의 느리며 깊은 호흡으로 천지 우주와 조화를 꾀하는 대목과 함께 임팩트가 강한 여러 대목들은 〈서퍼〉가 재공연될 만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역에 밀착된 소재라는 강점을 디지털 미디어 같은 복합매체를 구사하는 등의 기법을 가미함으로써 지역민의 고급 감성을 한껏 꽃피우는 공연작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