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
갈라(Gala)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게 한 공연
김혜라_춤비평가

최근 발레리노 전민철이 마린스키 발레단에 들어가 화제이듯 해외 유수 무용단 입단 소식은 국내 많은 꿈나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그들의 수준이 바로미터가 되어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 주인공들이 함께 하는 무대가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로 뜨거운 여름마다 국내 팬들과 주변 지인들의 기대를 모아왔다. 2001년 7월 LG아트센터에서 시작한 첫 공연이 21회를 맞았다. 세월의 변화만큼 한 사람이 국가의 대표성을 띠었던 과거와는 인식이 많이 달라졌고, 한류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확장된 상황에서 본 행사의 원래 취지나 방향성도 자연스럽게 변화해야 했다. 더구나 박세은을 필두로 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에투알 갈라’나 김기민의 ‘발레슈프림 갈라’와는 인지도와 규모 그리고 목적이 다르기에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만의 동시대적 의미를 찾고자 한 것 같다.

무용수들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감격적이었던 행사가 이제는 자신이 속한 무용단 고유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개성을 보여주는 데 방점을 두었다. 공연은 총 15개 작품으로 발레를 포함하여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 발레 2인무부터 모던댄스의 선구적인 작품, 다문화적 민속요소 그리고 힙한 스트릿 계열의 춤까지 총망라하였다. 26명이 출연한 무대는 메이저 단체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만이 아니라 과거 해외에서 활동했고 국내에서 중진으로 활동하는 안무가, 재능이 뛰어난 예술고 학생까지 댄서들의 열정 어린 무대였다. 다시 말해, 다양성과 포용성 있는 레퍼토리로 동시대적 지향점이 수용된 갈라(gala) 구성이었다.



안소영 〈Deep Song〉 ⓒ박상윤/IPAP



서울아트센터 도암홀(8월 3일)에서 모던댄스의 선구자인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의 유작을 실제 관람하는 일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2006년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에 입단한 안소영은 〈Deep Song〉 〈Immediate Tragedy〉에서 내적으로 응집된 춤사위로 그레이엄 특유의 정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레이엄만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축과 이완(contraction and release) 동작 원리는 곧게 솟아오르는 발레와는 달리 중력에 순응하며 주체(무용수)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딥 송〉은 1937년 작으로 스페인 내전의 잔혹성과 고뇌가 담긴 작품이나 지금도 전쟁의 고통에 있는 현실이 투영되며 울림을 주었다.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영적 정신을 투사했던 초창기 미국 현대무용 특유의 지향성이 내포된 그레이엄의 작품은 시대적 고통을 묵과하지 않으면서도 회복의 염원을 담고 있다. 안소영은 깊은 호흡으로 토르소를 틀고 풀며 손목과 발목의 각진 형태로 긴장 관계의 완급을 조절하며 인상적인 춤을 보여줬다. 대지에 발 딛은 여성의 강인한 몸을 대변한 안소영의 춤은 비극을 딛고 나아가려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표명한 춤이었다.

모던댄스의 계보를 낳게 한 그레이엄의 춤이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정형화된 패턴이나 그 당시 사회적 각성을 수행한 명작임에는 틀림없다. 새롭고 세련된 것(춤)만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아니듯, 춤으로 사회적 현안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보듬었던 작품의 무게감을 느끼며 동시에 오래된 레퍼토리만의 힘을 안소영의 춤으로 되새겨 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박윤수 〈실비아〉 ⓒ박상윤/IPAP



다음으로 2007년 함부르크 발레단에 입단한 박윤수는 올해 국립발레단 〈인어공주〉로 감동을 주었던 존 노이마이어(John Neumeier) 작품으로 이목을 끌었다. 박윤수는 동료 (Lizhong Wang)와 〈실비아〉 〈까멜리아 레이디〉 2인무로 노이마이어가 1997년 파리오페라 발레를 위해 안무한 〈실비아〉 전막이 궁금할 정도로 좋은 연기와 기량을 보여줬다. 특히 파트너와 갈등 양상이 강조되는 낮은 리프팅으로 회전을 유도하는 반복적인 시퀀스가 기억에 남는다. 남녀 관계의 다양한 감정의 결이 짧은 듀엣에 잘 수렴되어 이별로 마무리되는 차갑지만 뜨거운 여운을 남겼다. 1978년 독일 쉬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초연된 드라마 발레 〈까멜리아 레이디〉도 쇼팽 곡의 유려한 선율에 공중에서 리프트 시간이 상당히 긴 기술이 요구되는 파드되로 역시나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품의 주인공인 아르망과 마르그리뜨는 총 3번의 파드되를 추는데, 박윤수와 파트너는 2막 화이트 파드되(퍼플 파드되와 블랙 파드되가 있다)로 사랑의 감정이 충만한 춤이나 죽음을 앞 둔 운명을 예견하게 한 춤이었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박상윤/IPAP



드라마성과 테크닉이 강조된 발레만이 아니라 관객과 직접적인 교감을 시도한 현대 작품은 우리 일상과 다소 동떨어진 발레 세계에서 한 발 현실로 다가서게 했다. 40을 넘긴 무용수이자 안무가의 실존적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말하며 무대에 선 차진엽의 렉쳐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차진엽은 〈원형하는 몸〉 시리즈 일부를 시연하며 자신만의 춤 탐구 과정을 이야기한다. 물의 순환적 원리를 토대로 프리 다이빙을 체험하며 깨달은 몸의 순응성이나 나이가 들며 변화되는 신체를 인지하고 수용하며 ‘새로움’에 대한 그만의 재정의가 특히 공감되었다. 몸과 춤의 가치를 찾고 있는 차진엽은 일상과 작업을 분리시키지 않는 실천적인 태도와 시선을 관객과 공유했다.



  

리케이댄스 〈올더월즈〉, 이수진 〈삶의 리듬〉 ⓒ박상윤/IPAP



개성 있는 국내 중견으로 이경은의 〈올더월즈〉는 스트릿 춤과 현대춤의 협업으로 무용수들의 에너지와 자유로운 몸짓으로 무대를 사로잡았다.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에너지를 발생하는 안무와 쇼맨십이 뛰어난 하우스댄서 Ko-c와 탑 배틀러인 BABYSLEEK, 애니메이션 크루인 BaraBoomBa의 리드로 활력이 넘치는 춤이었다. 빠른 속도와 분절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칼군무로 동시대 춤의 경계가 통합되고 넘나드는 오늘의 춤 흐름을 반영한 작품이다. 〈올더월즈〉가 모두 함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모의 작당 같은 혈기 넘친 춤이라면, 이수진의 〈삶의 리듬〉은 우리 몸에 잠재된 리듬을 찾아 나선 여행자 같은 인상이었다. 연주를 맡은 Carlos Andrés Rico Carvajal과 Yolanda Moraless와 함께 원초적인 리듬을 깨우며 콜롬비아 민속음악인 쿰비아의 박자에 몸을 싣는다. 리믹싱된 리듬이 이색적이라 더욱 생동감이 있는 무대였고, 퍼포머도 함께 즐기며 관객의 호응을 독려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아한 파드되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의 박수를 끌어내기는 여간 쉽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이수진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배우고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만큼 그녀의 몸에는 여러 색깔과 감성이 내재되어 있어 보였다.



  

강민주 〈삼총사〉 〈1984〉 ⓒ박상윤/IPAP



영국국립발레단의 강민주와 동료(Lorenzo Trossello)는 컴퍼니의 대표작인 〈삼총사〉와 〈1984〉 2인무를 무난하게 보여줬다. 자주 보는 2인무 스타일이 아니라 관심이 갔다. 9월 몬테카를로 발레단 입단을 앞 둔 이수연의 솔로 〈Pearl〉도 타고난 신체조건으로 직설적인 감정표현과 기량이 돋보였다. 노르웨이 국립발레단의 고영서는 자신이 창작인 〈Bird Land〉로 톰보이적 매력과 안무적 가능성을 보였다. 3일날은 서울예술고 재학중인 김소율이 순수하고 풋풋한 지젤로, 선화예술고 방수혁이 〈다이아나와 악테온〉에서 다부진 점프로 눈도장을 찍었다. 미래의 꿈나무들이다.



이수연 〈Pearl〉 ⓒ박상윤/IPAP



오랜만에 자신이 속한 단체의 주요 레퍼토리를 소개한 강민주, 안소영, 고영서, 박윤수를 비롯하여 이경은과 이수진의 스트릿 춤과 민속리듬과의 협업 그리고 차진엽의 렉처 퍼포먼스로 올해 공연은 현재 성행하고 있는 다양한 양식의 춤이 소개되어 레퍼토리가 풍성해졌다. 또한 해외의 굵직하고 유명한 단체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만이 주목받는 현장이 아니라 대단하진 않더라도 유의미한 활동을 하고 있는 무용수 소개는 의미 있게 여겨진다. 팬심에 부응하는 단조로운 갈라에서 주류와 비주류, 발레와 모던댄스, 클래식과 대중춤이 서로 융합하며 다양성이 존중되길 바라는 동시대적 지향점과 맞닿아 가는 변화가 이번 공연에 녹아 있어 좋았다. 전막 공연에 비해 갈라를 가볍게 여긴 필자의 선입견도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올해 유난히 갈라 공연이 많았던 발레계에 ‘해외를 빛내는 발레스타’는 시대적 요청이 수용된 질적 구성으로 갈라가 나아갈 시기임을 재촉한 기획이다.

20여년이 훌쩍 지나오는 동안 해외에서 활동했던 무용수들은 국내 무용계를 이끄는 리더가 되어 고스란히 자신들이 경험한 작품세계나 선진 시스템을 이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이 250여명이 넘고 크고 작은 단체로 다양하게 뻗어 나가 있다. 양적 팽창이 성공의 지표라 할 순 없다 해도 우리나라 무용수들의 열정과 역량은 대단하다. 반면 이들을 수용하거나 충족시킬 수 없는 국내 춤계의 어려운 여건과 교육체계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내셔널리즘보다는 개인주의가 강한 젊은 세대에게 전천후 외교관이라는 표현(프로그램북)이 공감을 살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프로페셔널한 예술가로 성장한 모습을 보는 일은 참 흐뭇한 일이다. 그들이 모여 만든 잔치가 ‘한국을 빛내는 해외스타 초정공연’이다. (개인적으로 시대가 변했으니 한국을 ‘빛내는’ 보다는 그 자체로 ‘빛나는’ 이라는 단어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올해부터는 서울에서 제주로 확장한 행사(한국문화예술위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이니 만큼 통상적인 갈라 행사를 넘어 국내외 무용수들간 소통을 주도하고, 문화적 교류의 창이 되는 현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김혜라

현장 비평가로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등단했다. 월간 <춤웹진>과 <더프리뷰>에 정기적으로 컨템퍼러리 창작춤을 기고하고 있으며, 국공립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단에서 심의와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세종시문화재단 자문위원, <춤웹진>편집위원이며 중앙대에서 비평관련 춤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

2024. 9.
사진제공_박상윤,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IPAP)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