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시발레단이 출범하였다. 창단 첫 공연으로 발레 안무가 주재만의 〈한여름 밤의 꿈〉이 올려졌다(세종문화회관 대극장, 8월 23~25일). 1976년 광주시립발레단이 창단된 이래 시립 차원에서 공공 발레단이 창설된 것은 48년 만의 일이다.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 국내에서 두 단체만 공공 발레단으로 활동해오던 터에 서울시발레단의 창단은 기대가 컸고 향후에도 물론 그럴 것이다.
서울시발레단은 컨템퍼러리 발레 지향을 창단 제일성으로 밝혔다. 이미 지난 50년에 걸쳐 파노라마를 펼쳐온 컨템퍼러리 발레의 다채로운 궤적에 비추어 국내에서 이제 표명된 컨템퍼러리발레 지향은 때늦은 감이 강하다. 시작이 절반이라듯이 서울시발레단은 남다른 다짐으로 새 장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국내 발레 전반의 해묵은 구각(舊殼)을 허무는 계기로서도 주목된다.
창단 공연작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착상되었다. 다만, 공연작은 희극의 줄거리와는 연관이 없으며 멘델스존의 곡과도 무관하다. 음악으로는 슈만과 필립 다니엘의 곡이 쓰였다. 이번 〈한여름 밤의 꿈〉이 그 희극과 직접 연관되는 것은 희극의 등장인물 요정 퍽을 내세운 부분이며, 이 또한 일을 벌여가는 장난꾸러기 퍽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응시하고 인도하는 역할의 배역으로 설정되었다. 그 삶의 모습을 구성하는 것은 공연 시놉시스에서 누누이 노래되듯이 사랑 그리고 욕망이며, 우리는 무대에서 사랑과 욕망의 안타까운 진실들과 접속하게 된다. 컨템퍼러리 발레는 이런저런 원작으로부터의 이탈이나 패러디에 능하다. 퍽에게 한여름 밤의 분주한 장난꾸러기 차원을 벗어나 사랑과 욕망을 반추하는 역할을 투여한 안무자의 시선 또한 그러하다. 평소 진지하다는 안무자의 일면이 도드라지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서울시발레단 |
〈한여름 밤의 꿈〉 공연작은 2막으로 구성된다. 전체 20개 남짓의 작은 장들은 각기 다른 악곡들과 함께 옴니버스 스타일로 진행되었다. 1막에서는 서두를 비롯해 사랑의 욕구와 그늘이 그려지고, 2막은 사랑을 향한 희망 섞인 마음들을 담아낸다. 1막의 다소 불안정하며 굴곡진 분위기들의 사랑은 2막에서 한결 가지런한 양상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1막과 2막은 중첩되는 감이 짙긴 하지만, 섬세한 차이를 보인다. 사랑의 혼돈을 감내하면서도 그것이 꿈으로 승화되기를 바라는 복합적인 소망이 후반에 이를수록 강하게 표출되었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서울시발레단 |
귀청을 찢는 듯한 첼로-피아노 협주 음향을 타고 1막이 열리는 즉시 무대 벽에는 11개의 남녀 얼굴 디지털 이미지가 나타난다. 그 얼굴 이미지 소유자들이 그 아래 기다란 스탠드에 앉은 상태에서 일상복 차림에다 각진 스트레치 위주의 동작으로 사지를 휘젓는 등의 모습을 지속할 동안 디지털 이미지는 그들의 옆얼굴을 보여주며 그리고 이에 이어 가로로 둘씩 대칭을 이루는 하반신 모습이 나타난다. 하반신 모습들은 클로즈업되어 일순간 고혹적인 느낌을 유발한다. 직설적인 이 프롤로그에서 1막의 분위기가 예고되며 퍽 단도직입적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막이 시작할 때 무대 벽들은 하얀색 일색이었으며 커다란 종이 공작 도형 같은 모양으로 디자인된 잎은 없이 가지들만 쭉쭉 뻗은 빨간색 나무가 무대 중앙을 차지해서 어떤 동화 속 몽환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하였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서울시발레단 |
주재만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도 사랑은 남녀의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듀엣을 주축으로 하면서 크고 작은 집단무를 동반한 춤들로 구현된다. 아마도 발레는 물론 무대 춤 분야에서 주재만의 〈한여름 밤의 꿈〉은 듀엣을 가장 다양한 형태로 형상화한 작업으로 손꼽힐 것이다. 그가 사랑의 현상을 고심하며 공들여 천착한 일면이 여기서도 엿보인다. 여기서 로베르트 슈만의 클래식과 가곡들은 사랑의 갖가지 순간들을 상당히 격조있게 뒷받침해서, 안무자가 염두에 두었을 사랑의 품격을 짐작케 된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서울시발레단 |
1막의 검정색조와 2막의 흰색조가 대조를 이룬 것을 비롯하여, 공연작 〈한여름 밤의 꿈〉은 무대 구성에서 유다른 인상을 주었다. 후반부 넓은 거실 풍의 하얀색 실내에서 남녀는 매끈한 듀엣을 펼치며 거실 너머의 어두운 숲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에 그려진 숲을 연상시킨다. 1막 앞부분에서 엄청 쏟아지는 폭우 아래 한참 노출된 사람들 무리는 어떤 별안간의 불운을 감내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사랑의 번민을 괴로워하는 인간의 아우성일 성싶다. 마지막 부분에 이를수록 무대 정면은 점차 푸른색조로 물들여지는데, 여기에 더하여 정면 중앙에 황갈색조의 희미한 지평선이 그려지면서 그 아래 부분은 옅은 황색의 대평원 같은 광막한 공간이 된다. 이를 배경으로 출연자들 집단은 느리게 전진한 후에 등을 보이고 물러가며 사라진다. 인간의 운명인 사랑을 그래도 긍정하면서 더 나은 사랑을 갈망하는 몸짓일 것이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서울시발레단 |
주재만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사랑은 단적으로 말해 실존적이다. 사랑이 깊어지면 불안감도 그만큼 된다는 뿌리치기 힘든 진실을 안무자는 직시하면서도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세상에 위안을 전하려는 그의 의지는 강고해서 공감을 일으킬 듯하다. 그 의지의 일환으로 올려진 〈한여름 밤의 꿈〉은 그러나 그의 의지에 다다르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연에서 구사된 움직임들은 일반적인 발레 스텝들을 맴돌았으며 밀도가 낮은 데에 더하여 안무가 주재만 스타일의 움직임이 있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덧붙여, 1막과 2막의 유사한 부분들로 인하여 엇비슷한 상황들을 반복해서 접해야 하는 것도 일종의 부담이었으며, 슈만의 독일 리트(예술 가곡)를 자주 듣는 것 또한 그러하였다. 또한, 〈한여름 밤의 꿈〉에서 착안한 퍽의 성격은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어서 그 역할은 잊히기 쉬웠다.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퍽을 뒤쫓아가지 않을 그런 식의 임의성이 컨템퍼러리 발레의 한 특성이긴 하나, 그런 임의성이 돋보인 것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 공연은 참신함을 결하였고, 컨템퍼러리 발레를 표방한 창단 공연치고는 기대 이하였다. 우선, 몇 해 전 발표한 〈비타〉에서부터 국내의 주목을 끌어온 안무자가 그간 거둔 세평을 벗어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창단 공연과 컨템퍼러리 발레의 만남이 이미 때늦은 만큼 전폭적 호응을 받은 데 비하여 이번 공연의 결과는 기대와는 한참 동떨어졌던 것이다. 차라리 컨템퍼러리 발레에 대한 인식을 오도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이다. 컨템퍼러리 발레가 이미 범세계적 장르로 성행하는 엄연한 현실에서 이번 〈한여름 밤의 꿈〉을 국제무대 어디에다 내세울 수 있을까. K댄스 시대에 국제무대에도 진출하지 못할 작업은 특히 공공무용단에서는 예산 낭비에 그칠 공산이 크다. 아무튼 창단 공연의 이러한 결과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능한 안무자라도 작업에 기복이 있을 수 있다지만, 특히 창단 공연에서 이처럼 저조한 성적이 어디서 기인했을지는 응당 물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창단 단체의 운용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안무자, 예술감독이나 발레마스터의 입지에 관해 밑그림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었는지부터 문제시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국내 초유인 컨템퍼러리 발레단의 운용이 그 나름의 전에 없던 방안을 요했을 것임에도 그에 대한 제안들을 수렴하는 등의 적정한 과정을 밟았는지 의문이다. 발레인들이 이번 공연 현장에서 빈축의 반응을 즉각 보인 일은 예사롭지 않다. 서울시발레단 창단에 있어 신중치 못하고 뜬금없이 성급한 창단 행보가 되려 서울시발레단의 전도를 흩뜨리는 결과를 빚은 것으로 판단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