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차세대 열전 2021!’ 김환희 · 김소월 · 유지영
이질적인 몸짓 감각을 제기하는 춤 실천들
최찬열_춤비평가

우리 몸에는 언제나 세계가 들어와 있다. 곧, 세계에 의해 우리 몸은 이미 언제나 점유되어 있다. 다르게 말해 몸은 상징계 안에 있지만, 상징계 역시도 몸 안에 있다. 그러기에 상징계의 질서는 몸에 기재되어 있으며, 상징계의 명령은 우리의 의식에 하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파고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차세대 열전 2021년!’ 무용 분야 공연에 참여한 3명의 젊은 안무가 김환희, 김소월, 유지영은 몸과 세계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깊이 살펴 연구한 작품을 선보였다.(한 명의 다른 참여자인 임정하의 공연은 〈춤웹진〉 2021년 12월호 게재, 김명현의 글 참조) 


포획된 몸의 일상과 삶

김환희의 〈파블로프의 개〉(2022년 1월 20~21일, 성수아트홀)는 렉처퍼포먼스 형태의 춤 공연이다. 이를테면 춤 공연이되 춤보다는 강의와 퍼포먼스가 주를 이룬 공연이다. 땡그랑! 무대 상수 쪽에 설치된 파블로프의 종이 울리면서 공연은 시작된다. 흰색 가운을 입고 등장한 김환희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먼저 하고 공연을 시작하자고 제안하며 모든 관객을 객석에서 일으켜 세운다. 관객들은 일제히 하늘-막에 투영된 태극기를 향한 채 가슴에 손을 얹고 국가에 대한 맹세를 표한다. 잘 알다시피, 이는 근대적 국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극장에서 영화 관람 전에, 경기장에서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 경기를 보기 전에, 또 심지어는 학교에서 수업 전에도 이렇게 국가에 대한 맹세를 표했고, 이는 암암리에 우리의 일상 행위를 제한했다. 곧 우리는 길을 가다 어디선가 애국가가 들려오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올려 경의를 표하는 국가의 충실한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의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학습과 교육은 조건반사로 이어지고, 이는 신체에 각인되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행위 도식이 된다는 말이다.








김환희 〈파블로프의 개〉 ⓒ옥상훈




조건반사와 무조건반사의 차이점을 주제로 한 강의가 시작된다. 1년 정도의 꽤 긴 리서치 과정을 증명하듯, 김환희는 마치 노련한 선생처럼 강의를 쉽고 재미있게 이끌고, 강의와 연관된 일련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그리고 강의의 핵심 내용과 공연의 진행 절차 등이 일종의 스코어처럼 자막과 그림, 혹은 영상으로 하늘-막에 투사돼 설명되는데, 이는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하며 관객을 공연에 쉬이 몰입하게 한다.

3명의 남성 퍼포머가 펼치는 일련의 반복되는 퍼포먼스는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이다. 3.6.9 게임과 줄넘기, 풍선 떨어트리지 않기 놀이 등, 일상의 놀이를 이용해 재미있게 구성된 퍼포먼스는 외부 조건에 포획된 몸이 행하는 일상과 삶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퍼포먼스는 조건반사를 작동시키는 자장가와 시계의 알람 소리, 그리고 신호등 불빛 등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몸의 일상적 삶을 반복적으로 재생한다. 그러다 반복되는 삶에 일정하게 파열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는 퍼포머들이 트라우마를 겪는 몸을 발작적으로 표출할 때 발생한다. 이들은 각각 소방관과 참전용사, 그리고 왕따 청년이고, 모두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인물들이다. 김환희는 외부 조건에 포획된 몸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트라우마를 겪는 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자장가가 들리면 자고,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고, 신호등 불빛에 따라 길을 가고, 그리고 정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등 외부 조건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삶이 반복된다. 이런 무미건조한 삶을 보여주면서 김환희는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당신들의 삶은 과연 온전히 당신의 것인가요?”






김환희 〈파블로프의 개〉 ⓒ옥상훈




그런데 일정한 연관을 갖고 하나로 이어진 퍼포먼스는 처음에는 느리게 진행되다가 반복될수록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데, 이는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아마 차이 없이 반복되는 삶의 무의미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반복 주기가 더욱더 빨라질수록 삶은 그만큼 더 무의미하다는 말일 것이고, 종국에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찰나적 현재만 반복할 것이다. 차이 없이 반복되는 삶의 허망함과 포획된 몸의 시간성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규격화된 행위 도식이 새겨진 몸은 무엇을 할 것인지 이미 결정된 몸이다. 그렇다면 이런 몸이 사는 삶은 차이 없이 반복되는 삶일 뿐이다. 포획된 몸에 미래는 없고 현재만 있다. 곧, 김환희가 보는 현대인의 몸은 찰나적 현재만 반복하는 몸이다. 〈파블로프의 개〉는 굳어진 행위 도식이 새겨진 몸과 그 몸이 살아가는 삶의 시간성을 춤보다는 일상적인 움직임을 통해 드러내고, 일상 놀이를 퍼포먼스로 무대화해 메시지를 강렬하게 어필하는 흥미로운 공연이다.




김환희 〈파블로프의 개〉 ⓒ옥상훈




공연의 한 대목에서 김환희는 레몬을 한입 가득 베어 문다. 이에 우리의 몸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이는 의식적인 동의 이전에 일어나는 전-의식적인 반응이다. 신체적 차원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기계적인 반응이 셈이다. 이렇게 김환희는 조건반사 이론을 가져와 외부 조건에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현대인의 일상과 삶을 풍자와 위트를 섞어 재치 있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미 결정된 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관점이 아닐까. 기실 인간의 몸은 외부 자극이나 상황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인간의 몸은 반응과 동시에 주어진 상황을 재구축하는 능동적인 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폭력에 잠식된 몸

김소월은 〈흔적〉(2월 12~13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에서 폭력에 잠식된 몸을 조명한다. 실존의 경험에 바탕에 둔 듯한 공연은 폭력에 대해 말하지만, 몸적 발화는 분명하지 않고 무척 조심스럽다. 폭력의 흔적을 끄집어내 보여준다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공연은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신체적 폭력이든 비신체적 폭력이든, 모든 폭력은 경중을 나눌 수 없고, 폭력성은 신체에 기입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김소월 〈흔적〉 ⓒ정재연




똑!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멎고, 조명이 잠시 들어오면, 무대 하수 앞쪽에 등받이가 없는 접이식 의자가 4개 놓여 있고, 2명의 여성 춤꾼이 등장해 있다. 한 명은 객석 쪽으로 등을 둔 채 의자에 앉아 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듯한 동작을 하고, 또 다른 한 명은 의자 끝부분에 상체를 누인 채 무대에 앉아 있다. 그 역시 등을 무대 쪽으로 두고 있다. 두 명의 춤꾼은 똑같이 흰색의 긴 이너 드레스를 입고 있다. 다만 머리카락의 색깔은 한 명은 검은색이고 다른 한 명은 노란색이다. 이를테면 두 명의 춤꾼은 서로 다른 타자일 수도 있고, 혹은 나 안의 다른 나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매우 짧게 나타난 이 장면에서, 김소월은 관객을 폭력의 방관자로 설정하거나 혹은 폭력적 상황을 대면하지 못하는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 의자들이 무대 상수 뒤쪽으로 옮겨 설치되어 있고, 두 명의 춤꾼 역시 첫 장면과 똑같은 자세로 있다. 하지만 둘은 이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곧바로 폭력적 상황에 맞서기라는 할 듯이. 하지만 김소월은 공연에서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폭력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다만 추상적인 몸짓말로 폭력성을 환기하고 있을 뿐이다. 가령 둘이서 춤을 추다, 한 춤꾼이 무대 중앙에 놓인 의자 위에 엎드려 쓰러져 있을 때, 다른 춤꾼이 깔고 앉는 행위가 두 번 보이고, 또 검은 머리의 춤꾼이 다른 춤꾼의 노랑머리에 검은 오물을 묻히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는 폭력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폭력이 점차 조금씩 온몸을 침입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소월 〈흔적〉 ⓒ정재연




몇 개의 정형화된 동작구를 이리저리 섞어 짠 춤을 반복적으로 구사하며 폭력에 관한 말을 하지만, 그 말은 남이 듣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자기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 잘 들리지 않는 혼잣말 같다. 하지만 이는 폭력성을 강하게 환기하는 듯하다. 몸짓의 절절함에서 묻어 나오는 정서적 힘이 강렬했다는 말이다. 가령 한 손으로 무대 바닥을 짚고 앉은 채 아장걸음으로 빙빙 도는 동작과 마치 접영을 하듯 두 팔을 동시에 앞으로 던졌다가 다시 거두어 엉덩이를 툭 치는 듯 건드리고, 다시 허리를 숙이며 두 손을 배꼽에 모았다가 바로 세우면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듯한 동작들은 마치 폭력적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듯한 심정을 형상화한 듯 강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일으켰다.

정사각형의 하얀 무대 바닥과 대조적으로 조명은 시종일관 어두침침해 춤꾼의 모습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는 듯, 혹은 자신의 어두운 내면세계에 침잠한 듯, 두 춤꾼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마치 한 몸처럼 또 때로는 둘이서 마치 유영하듯 춤을 춘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듯이, 혹은 폭력적 상황에서 왜소해진 내 안의 다른 자아를 꾸짖듯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방바닥이나 벽을 긁는 듯한 소리, 그리고 땡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간혹 휘파람 소리와 까르륵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김소월 〈흔적〉 ⓒ정재연




김소월의 〈흔적〉은 폭력이 있음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단지 폭력이 있음을 추상적인 몸짓말과 이질적인 소리 등으로 암시만 할 뿐이다. 그러기에 이는 쉽사리 의미화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의미는 아닌 폭력이 ‘있음’의 상태를 정서적으로 환기한다. 하얀 무대 바닥에 검은 물 혹은 피가 서서히 스며들더니만 급기야 선명하게 가시화되는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이 김소월의 이러한 의도를 가장 잘 압축해 보여준다. 이를테면 김소월의 〈흔적〉은 규정적인 춤 어법으로 폭력을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대신에, 몸을 잠식하는 폭력이 ‘있음’을 정서적으로 환기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촉구하는 공연으로 보인다.


탈주하는 몸 또는 탈-구축하는 몸

김환희가 포획된 몸을, 김소월이 폭력에 잠식된 몸을 보여주었다면 유지영은 이런 몸을 해방하고,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유지영은 〈다시 어떤 것의 몸이 되기도 한다〉(1월 7~8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상징계에서 활용되던 몸 혹은 기존의 춤에서 소용되던 몸에 죽음을 선포한다.




유지영 〈다시 어떤 것의 몸이 되기도 한다〉 ⓒ곽소진




공연 시작 5분 전에야 극장 문이 열린다. 입구로 들어가면 극장 안은 컴컴하다. 더듬더듬 겨우 객석을 찾아가면 바닥에 있는 뭔가에 발이 걸리고 먼저 들어와 앉은 사람들과 부딪치기도 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조를 가진 메리홀 극장의 객석은 모두 치워져 없고 의자 몇 개와 방석이 무대 여기저기에 놓여 있을 뿐이다. 겨우 빈 자리를 찾아 앉으면 바로 앞, 무대 전면에 유지영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있다(요가의 사바사나Savasana 자세). 그리고 그 뒤에는 하얀 종이가 길게 깔려 있고, 그 위에는 긴 사각형의 삼베가 놓여 있다. 수의인 듯하다. 편안하게 누운 유지영이 깊은 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숨을 마시고, 내쉬고, 마시고, 내쉬고. 어두컴컴한 객석을 지나오면서 미세지각이 활성화된 까닭일까, 어슴푸레한 조명으로 조성된 은은한 분위기와 사방에서 윙윙거리며 촉각을 파고드는 음향 때문일까, 온몸의 감각이 퍼포먼스에 예민하게 공명한다. 또한 이는 객석과 무대를 가르는 제4의 벽을 없애고, 퍼포머 바로 옆 무릎 정도의 높이에서 공연을 바라보게(느끼게) 함으로써 감응적 관계를 극대화한 연출의 효과이기도 할 것이다.










유지영 〈다시 어떤 것의 몸이 되기도 한다〉 ⓒ곽소진




일상의 자질구레한 잡념을 다 지워 버린 듯, 또 온갖 세속적 삶에 찌든 육신을 말끔히 털어낸 듯, 초탈한 모습으로 일어난 유지영은 길게 놓인 삼베 뒤로 가 재차 눕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하얀 종이를 물살이(물고기) 모양으로 곱게 접어 삼베를 감싸기 시작한다. 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주 천천히, 진지하고 장엄하게 일종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는 듯하다. 어떤 죽음이 있었다는 말이리라. 염을 마친 뒤, 유지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리를 한껏 뒤로 젖혀 머리를 바닥에 댄 채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요가의 마치야사나Matsyasana 자세), 살며시 일어나 흰 종이에 감싸인 삼베를 돌돌 말아 무대 하수 쪽으로 가져가 놓는다.




유지영 〈다시 어떤 것의 몸이 되기도 한다〉 ⓒ곽소진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 유지영은 무대 전면의 중앙에 앉아 놋그릇처럼 생긴 싱잉볼(singing bowl) 둘레를 문지르며 명상에 빠져 있다. 그런데 이는 마치 유골함을 받쳐 들고, 그 속에 담긴 유골을 잘게 부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뭇 비장한 모습이다. 세속적 삶에 찌들었던 상징계의 몸과 기존 춤의 세계에서 소용되던 몸에 죽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리라. 그런데 이는 또 김환희와 김소월이 보여준 몸, 곧 상징 권력에 포획된 몸과 폭력에 잠식된 몸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탈주의 선을 그리는 유지영의 퍼포먼스는 당돌하고 당당해 보인다.




  

유지영 〈다시 어떤 것의 몸이 되기도 한다〉 ⓒ곽소진




마지막 퍼포먼스는 무대 뒤쪽에서 수행된다. 여기서 유지영은 여러 가지 요가 자세를 취한다. 이 퍼포먼스에서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각종 동물의 형상이 보이다가 바로 사라지고 또 다른 개체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몇 번 반복한다. 동물(악어)과 곤충(메뚜기) 그리고 식물과 사물을 상징하는 형상을 연이어 취하는데, 어떤 특정한 개체성을 벗어나 강한 액체성을 띠는 몸은 생명의 순수 잠재성의 상태를 현시하는 듯하다. 상징적 차원의 몸, 현실적 차원의 몸으로부터 탈주해 잠재적 차원의 몸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물리적 죽음 상태로 하강 운동하는 퇴행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창조적 역행일 것이다. 말랑말랑하고 물렁물렁해진 잠재적 몸은 이제 어떤 몸이든지 다 될 수 있는 배아 상태의 몸이다. 유지영은 〈다시 어떤 것의 몸이 되기도 한다〉에서 상징계에서 작동하던 몸을 탈-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난 몸이 펼치는 마무리 퍼포먼스는 지극히 짧다. 겨우 일어나 힘겹게, 움직이는 듯 마는 듯한 몸짓은 갓난아이의 움직임처럼 서툴다. 팔을 살짝 들어 올리고 발가락을 미세하게 꼼지락거리고 몸통을 구부정하게 비틀고 변형하면서 춤추려고 하지만 어렵고 힘들다. 갓 태어나 새롭게 구성된 몸이 대면한 현실이 낯설고 서먹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유지영이 새롭게 맞이한 상황이기도 할 것이다. 기존의 현실과 춤에 섣부르게 동화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는 몸, 이제 그런 몸으로 유지영은 살아가고 춤추어야 한다. 김환희와 김소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존의 춤과 불화하는 이질적인 몸짓 감각을 창안하는 이들의 춤 실천을 응원하고 싶은 이유이다. 그렇더라도 ‘차세대 열전 2021!’에 참여한 젊은 안무가들의 공연은 다소 거칠고 투박하며, 꼼꼼하게 짜이지 않아 어울리는 맛이 덜하고 빈틈이 더러 보여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달리 보면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또박또박 말하면서, 기존 춤 세계의 울타리를 확장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최찬열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

2022. 3.
사진제공_옥상훈, 정재연, 곽소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