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컨템퍼러리댄스 계열의 정제된 춤 언어로 활달한 춤 세계를 구축해온 차진엽이 지난 연말 발표한 〈원형하는 몸〉 시리즈(round 1, 2)는 다소 의외였던 때문에 신선하였다. 〈원형하는 몸: round 1〉(2021. 11. 13~14., 국립극장 하늘극장)과 〈원형하는 몸: round 2〉(2021. 12. 23~26., 플랫폼엘) 사이에 1달 남짓 시차가 있고 둘은 동일한 표제와 유사한 주제로 연결된다. 안무자 차진엽이 내놓은 페미니즘 경향의 실존적 작품들을 지난 10년간 자주 대면해온 터에 이번 시리즈는 그가 그간의 춤 기조를 지속하는 가운데서도 주제 의식 면에서는 상당한 변모 내지 확장을 모색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시리즈에서 우선 언급되어야 할 바는 ‘원형하는’이란 생소한 언어 표현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 생활에서 원형은 주로 둥근 모양(圓形)이나 본바탕(原型)으로 통용된다. 그 원형에다 ~하는, ~하다 식의 어미를 붙여 형용사나 동사 형태로 쓰는 사례는 필자로선 이번이 난생 처음이다. 이 시리즈에서 원형은 둥근 모양이 은유하는 순환 그리고 본바탕이 의미하는 원리, 이 두 가지 뜻을 함께 담은 것으로 풀이되는 듯하다. 원형하는 몸이라면 요컨대 그러한 순환이나 원리를 내포하고 시현하는 몸을 가리킬 것이다. 〈원형하는 몸: 라운드 1〉은 물을 매개체로 해서 몸의 생멸을 조명하고, 〈원형하는 몸: 라운드 2〉에서는 미시세계와 몸의 미시적 관찰을 통해 몸과 생명의 근원을 짚어보인다. 이번의 시리즈가 인간의 근원적 측면에 초점을 두는 것은 실존성이 부각된 이전작들과는 차이가 있고, 때문에 주제 의식의 확장이 뚜렷해 보인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1〉 ⓒ김채현 |
〈원형하는 몸: 라운드 1〉 무대는 이색적이다. 평소 국립극장 하늘극장은 옥내 원형극장으로서 관객의 시선이 둥근 무대를 내려다 보는 구조이다. 〈원형하는 몸: 라운드 1〉의 그 무대에는 두 개의 거울 같은 대형 반사판이 직각으로 맞대어져서 설치되어 공간은 확대되고 다음과 같은 시각적 효과를 발한다. 즉, 공연 중에 실감나게 목도하게 되듯이 직각을 이룬 반사판들은 서로 반영하여 복수의 반사판을 만들어내며, 그 앞에서 움직임을 수행하는 출연자 역시 복수의 동일한 존재로 증식된다. 정확히 말해 한 사람의 출연자가 관객 눈에는 5명으로 등장한다. 그 위의 공중에는 큰 얼음 덩어리 몇 개가 밧줄에 묶여 매달려 있고, 그 아래 바닥에는 물과 얼음이 담긴 커다란 수반이 놓여 있다. 얼음에서 수반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잔잔하게 마이크로 증폭된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1〉 ⓒ김채현 |
〈원형하는 몸: 라운드 1〉은 차진엽이 독무로 진행하는 전반부에 이어 4명이 출연하는 후반부로 구성되었다.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차진엽은 하얀 의상 차림이고 먼저 수반에 손을 적시고 손수건으로 닦는 일종의 의례 같은 절차를 행한 후 독무에 점진적으로 몰입하였다. 개울을 흐르는 듯한 물의 소리, 주로 위에서 아래로 비춰지는 조명 패턴들, 바닥에 쏟아지는 파동 형태의 디지털 이미지들 그리고 금속성의 효과음들 속에서 그것들과 더불어 차진엽은 움직임을 이어나간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1〉 ⓒ김채현 |
그의 정연한 몸이, 제자리에서 또는 짧게 이동하면서, 일렁이거나 굴신을 거듭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디지털 이미지가 그를 뒤덮는 양상을 연출하였다. 처음에 디지털 이미지들은 전자파처럼 가늘고 기다란 선을 기본으로 하여 조용히 출현한다. 차츰 선들은 간격을 좁히며 굴곡의 모양으로 입체성을 띠고 점점 촘촘해지면서 때로는 하나의 동심원에서 규칙적으로 퍼져나가는 파도 모양을 이루다가 때로는 심해수가 용출하는 소용돌이처럼 변한다. 잔잔한 전자파 같은 모양새는 이어서 넘실대는 물결과 너울, 홍수 형세로 바뀌며 끊임없이 쇄도한다. 그 디지털 이미지들의 변화무쌍한 기운을 타고 차진엽은 물과 구분이 힘들게 하나가 된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1〉 ⓒ김채현 |
검정 옷차림의 네 무용수가 전개하는 후반부는 먼저 두 무용수가 수반에 약간의 물을 부어 마이크로 소리를 내는 절차로 시작한다. 후반부의 바닥에 비치는 이미지는 선과 너울이 기본인 전반부의 것과는 차이가 난다. 빛으로 4등분 분할된 바닥이 오렌지색 등 여러 색으로 물들다가 어떤 부분은 검정으로 칠해지고 또 굵은 물결 띠가 직선으로 교차하면서 검은 바닥을 이동한다. 바닥을 분할하는 빛이 사라지면 응결된 물 또는 빙결 상태의 호수 표면 같이 갈라진 형상의 이미지가 크리스탈 모양으로 바닥 전체를 채우다가 또 컵이나 그릇의 물 속에서 번져가는 물감처럼 유동하는 무늬들이 일렁대는 형태와 크기의 쿠션이나 매트처럼 비춰진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1〉 ⓒ김채현 |
여기서 어느 출연자는 수반의 물을 마시고 또 두 출연자는 수반에서 꺼낸 얼음을 사각사각 소리가 나도록 씹어 먹으며 마이크로 그 소리를 중계한다. 후반부에서 춤꾼들은 위의 이미지들과 더불어 몸체 일렁이기를 주동작으로 해서 저마다의 갖가지 뜀박질, 자기들끼리 함께 구성하는 비일상적인 정지 자세, 바닥을 유연하게 기어가는 자세의 유영 등등 일정치 않은 움직임들을 지속하였다. 공연 끝부분에 네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위를 쳐다보는 자세를 취하자 하늘극장 지붕이 열리면서 극장 전체가 밝아지고 출연자들은 느긋이 바닥에 드러눕는다. 물마시며 물결과 함께 놀고 얼음을 깨먹으며 극장 지붕 저 위의 하늘과 공기에 공명하는 일련의 모습들은 자연과 동화하고 그에 회귀하는 과정으로 수용된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1〉 ⓒ김채현 |
〈원형하는 몸: 라운드 1〉 공연 전체에서 바닥에 투사되는 빛의 이미지들은 바닥의 그것에 머물지 않고 직각으로 만나는 반사판에도 반영된다. 그러나 반사판이 정직한 평면거울이 아니라 사물을 왜곡해서 반영하기 때문에 바닥의 이미지와 출연자가 반사판에서 모양이 일그러지는 데서 반사판의 미적 효과는 배가된다. 반사판에 비춰진 이미지들은 모두 그 본래의 정형과 거리를 둔 모습일 수밖에 없고 출연자도 예외가 아니다. 반사판은 이미지를 다소 확대시켜주는 역할로써 효과적인 무대 배경 구실을 하는 데서 더 나아가 〈원형하는 몸: 라운드 1〉 공연 전체에서 정형과 비정형이 무리없이 공존 상통하는 환경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힘입어 물(결)을 암시하는 디지털 이미지들 또한 물의 재현과 연관된 고정된 이미지를 벗어나 복잡다양한 물(결) 이미지들로 제시되기 마련이었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1〉 ⓒ김채현 |
얼음, 물, 수증기 등속으로 형상을 바꿔가는 물의 순환에서 차진엽은 인간의 몸이 생성, 변화, 소멸, 회귀하는 모습을 보아낸다. 이를 무대 공연으로 구축하기 위해 안무자는 얼음 덩어리, 대형 반사판, 수반, 디지털 이미지 등 여러 매체를 구사하고 이를 청각적인 요소와 더불어 물 적시기와 얼음 씹기, 바닥 유영, 극장 지붕 열기 등 촉각적인 요소와 결합시켜 매체 융합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으로서 절대적인 물을 몸의 원형(原型)으로 수용하는 일련의 사고는 흔하지만, 보다 중요하게 차진엽은 그러한 원형에 맴돌기보다는 순환을 의미하는 원형(圓形)과 연결지어 매체 융합으로 구현해내었다. 다시 말해 〈원형하는 몸: 라운드 1〉에서는 원형(原型)이 원형(圓形)이므로, 원형(圓形)이 원형(原型)이라는 유기적인 관점이 생동하고 있으며, 주목할 점이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2〉 ⓒ김채현 |
〈원형하는 몸: 라운드 2〉는 현미경으로 가시화되는 미시세계를 주소재로 한다. 무대 오른쪽 하수에 현미경이 하나 놓여 작품의 주소재를 뒷받침하며,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의 실루엣 이미지가 공연 도중 벽면에 간간이 등장한다. 미시세계 관찰에서 흔히 등장하는 짚신벌레와 미생물 등속을 현미경으로 확대한 영상이 공연 처음부터 벽면에 투사된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미생물들의 동영상을 배경으로 네 명의 춤꾼들은 각자 한참을 바닥에서 꿈틀대다가 점차 관계맺기에 들어선다. 관계맺음의 동작들은 서로의 몸들에 의지하기, 몸들을 겹치기, 몸들을 뭉치기, 몸들의 흩어지기, 상대방의 양손을 마주잡고 팔을 저으며 서로 조화를 맞추기, 누운 상대방이 벌려 세운 발 위에 전신을 눕히거나 등을 맞대어 상대방을 지탱하는 식으로 몸들을 건축적으로 구성하기와 같은 여러 양태들로 진행된다. 미시세계와 미생물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런 와중에 “나는 짚신벌레입니다” 멘트가 들리고 출연자들이 미생물임을 확인하는 다른 멘트들이 짤막하게 이어진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2〉 ⓒ김채현 |
그렇게 상당 시간이 흐른 후 동영상 이미지가 사라져도 출연자들은 여전히 미생물로 활동한다. 바닥에 설치된 파라이트 조명 앞에서 그들은 미생물을 모사하거나 미생물을 연상시키는 동작과 자세들을 지속한다. 그 조명을 받아 벽면에 비춰지는 춤꾼들의 실루엣으로 그림자극이 출현한다. 기승전결 부재의 그림자극을 위하여 출연자들은 실루엣 이미지에 정성을 기울이는 듯한 낌새이고 그림자극은 그 자체로서 보는 느낌을 일으킨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2〉 ⓒ김채현 |
그림자극이 사라지고 둥근 서치라이트가 큼지막하게 비춰짐과 동시에 분위기는 돌변한다. 후속 전개 내용은 이 부분에서 소재가 자연의 미생물로부터 인간 몸의 미물(微物)로 이동했음을 말해준다. 해와 달을 연상시키는 서치라이트들은 인간의 몸을 음지에서 양지로 옮겨 몸의 미세한 부분들을 드러낼 것임을 예고하는 메시지로 보인다. 주로 차진엽이 펼쳐내는 이 부분은 정갈한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곧 차진엽이 전신을 뒤흔들면서 요동치고 긴 머리채의 두상을 마구 뒤흔드는 모습이 축을 이룬다. 바닥에 놓인 파라이트 조명과의 거리에 따라 어느 춤꾼은 거인이 되고 다른 춤꾼은 소인이 되는 순간도 벽면에 그려지며, 소인과 거인이 전신을 뒤척이며 배회하고 둘의 실루엣이 여러 모양으로 합체되는 중에 손가락을 뻗친 색색의 손들이 벽면에서 그들을 수시로 낚아챌 기세로 어른거린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여러 가지 실루엣들은 은밀히 접근하는 손가락들을 피하며 저항하는 몸부림을 애타게 전개한다.
여기서도 멘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발설되는데, “나는 각질입니다” “나는 머리카락입니다” “나는 피지입니다” “나는 코딱지입니다”와 같이 우리들 몸에서 그 명이 다해 떨어져나가는 것들이 호명된다. 정맥과 동맥의 혈액을 암시하는 듯한 청홍색 계열의 굵은 띠가 무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그 곁에서 무릎꿇은 자세로 차진엽은 양손으로 머리채를 흩날리며 이동한다. 이어 각질처럼 명을 다한 몸의 일부를 제거하는 행동을 재현하려는 듯 차진엽은 발바닥으로 바닥을 문지른 다음 긴 머리채를 양손으로 매만져 다듬는다. 종지부에서 차진엽이 현미경으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미루어 바로 직전까지의 출연자들이, 앞서 “나는 각질입니다”에서도 보이듯이, 몸의 부산물들을 대리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차진엽 〈원형하는 몸: round 2〉 ⓒ김채현 |
미세한 세계의 형상화 작업은 물론 그 세계의 이면을 드러낼 의도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 의도를 안무자는 이렇게 소개한다. “신체의 가장 마이크로한 움직임이 빛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고 때론 거대한 그림자의 형태로 보인다.” 미미해서 잊힌 세계, 그리고 각질과 머리카락 등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항변하듯 몸에서 명이 다하는 순간에나 자신의 주체를 드러내는 신체의 부산물이 〈원형하는 몸: 라운드 2〉에서 부각된다.
평자가 판단컨대, 〈원형하는 몸〉 저변을 관통하는 큰 주제는 생명이다. 〈라운드 2〉에서 생명을 다해 몸에서 떨궈지는 몸 부산물의 조용한 아우성들이 끊이지 않는다. 미미한 부산물들이 떨궈지는 죽음의 시점에서 현미경 관찰자는 그것들이 몸의 주인에게서 일상적으로 박대받은 주체임을 인지하고 그들 생명을 되돌이키는 반성적 자세를 환기한다. 자연과의 순환 속에서 생명의 원형을 새로운 복합매체로 그려내는 〈라운드 1〉의 우주적 세계관을 〈라운드 2〉는 몸의 미세한 부분은 물론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천지의 미물에다 적용하였다. 유지되기 위해 변화를 동반해야 하는 생명의 원동력으로서 차진엽이 형상화해 보인 것은 원형과 변형의 대조 대립 상충이 아니라 그 둘의 공생이다.
생명에서나 삶에서나 변형은 걸림돌도 아니고 예외도 아니며, 변형은 생명과 삶이 취할 원리의 하나이다. 구태의 상식과 억견을 벗어나 생명을 새롭게 구해야 할 때 아닌가. 원형을 원형하는 〈원형하는 몸〉은 생태 지향의 춤으로서 그 바탕에서 작용하는 근원적인 숨결이 돋보인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