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비넥스트(BENXT)는 서울문화재단이 내놓은 새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연극·무용·음악·전통·다원·시각예술의 6개 분야에서 창작 발표 경력 10년 미만의 신진을 선발해서 작가로 발굴하는 목적을 내세운다. 신진 발굴에서 예술적 성장 가능성이 전제될 것은 당연하며, 실제 그러한 가능성은 다면적으로 가늠될 수 있을 것이다. 비넥스트는 그러한 가능성을 폭넓게 열어두면서 차세대를 지원하는 취지에서 창작 역량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서울문화재단은 특히 장르별 전문가를 위촉해서 프로그램 운영부터 멘토링, 크리틱, 워크숍, 중간과정공유회 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참여하였고, 덧붙여 서울연극센터, 서울무용센터, 문래예술공장 등 서울문화재단의 여러 창작공간을 반년 동안 연습-창작 공간으로 제공하였다고 밝혔다. 단적으로 비넥스트는 소수 신진들의 작품 제작 전과정을 지원하여 창작 역량의 업그레이드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적극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첫해인 현재 사업의 성과를 논하기에는 시기상조일 테고, 다만 예술적 성장 가능성을 가늠하는 잣대를 설정하는 작업에서만큼은 해당 분야의 진단이 고르게 청취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 13팀 가운데 춤 분야에선 정재우·이예지가 선정되었다.
정재우 〈실전무용〉이 열린 윈드밀 전경 ⓒ김채현 |
댄스컴퍼니 브레이브맨의 정재우가 올린 신작은 〈실전(實戰) 무용〉으로서 그 표제가 약간은 전투적이다. 원효로 인근에 소재한 윈드밀은 화이트 큐브로서 춤 공간으로서는 낯선 곳이고, 공연은 3일간 열렸다(2월 11~13일). 이색적이게도 3일간 하루 6~10시간 동안 진행되면서 관객 주문에 맞춰 춤이 제공되었다. 입장이 무료인 반면에 입장한 관객은 비치된 노트북으로 아프리카TV의 해당 채팅창을 통해 주문하고 5천원 이상을 입금해야 주문된 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전에 준비된 춤을 관객 주문에 응하여 제공하는 방식은 색다르다. 정재우는 지난해 10월 아프리카TV에서 이 방식을 먼저 시도한 바 있다. 기억컨대 그때는 아프리카TV에서 자신의 〈아프리카 생존기〉 채팅창을 통해 시청자의 무료 주문에 따라 주택의 실내 공간에서 즉흥적으로 춤춰 보이는 장면을 내보냈다. 아마도 이때는 별풍선으로 수익을 배당받았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이번 공연의 개발을 위한 시연회였던 것 같다. 이번 공연에서는 미리 준비된 춤을 관객이 입금한 후 선택할 수 있었다. 춤은 스트릿댄스나 제로투의 느낌이 스민 컨템퍼러리 댄스로 대여섯 가지가 구비되었고 1~3명이 추는 춤들의 길이는 대개 2분 정도이다. 〈실전 무용〉은, 안무자도 밝히는 것처럼, 애당초 춤으로 돈을 벌고 싶은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아프리카TV에서 생각만큼 수입을 올리지 못하자 그는 그 원인으로 춤에 관한 무관심과 외면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다. 〈실전 무용〉은 〈아프리카 생존기〉의 새 버전에 해당한다.
정재우 〈실전무용〉 ⓒ김채현 |
윈드밀의 한쪽 벽면에는 준비된 춤들 각각의 동기와 해당 춤영상이 QR코드로 볼 수 있도록 부착되었다. 다른 벽면에는 관객과 채팅을 진행하는 아프리카TV 화면이 비춰지고 관객은 그 앞의 테이블 위에 비치된 노트북으로 자유로이 채팅하며 주문할 수 있었고 한 켠의 플로어에서 주문받은 춤들이 이어졌다. 애당초 춤으로 수입을 올리려는 의지가 공연 동기와 연관된 맥락에서 여기서 실전은 아마도 돈을 벌기 위한 전투적 마인드를 시사하는 듯하다. 하루 최장 10시간 진행하며 거둔 수입은 그때그때마다 채팅창으로 공개되었는데, 안무자는 그 수입이 3일간 모두 193만 8544원이라고 밝혔다. 이 수입은 과연 적정한 액수일까?
정재우 〈실전무용〉 ⓒ김채현 |
〈실전 무용〉은 온종일 진행되었고 관객은 수시로 출입할 수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대기하며 채팅하던 출연진들은 주문에 응해 모습을 드러낸다. 공연을 전반적으로 참관한 결과, 무엇보다도 공연 진행에서 다수의 변수를 설정하여 이벤트의 흡인력을 높일 필요가 컸었다. 종일 진행되는 그 현장에서 관객이 그래도 한 시간이나 일정 시간 남짓 머물도록 유도하는 관심 또는 호기심 유발 요소가 약했기 때문이다. 벽면에서 관련 영상과 QR코드로 춤 영상을 간략하게 접하고 채팅 내용을 공유하며 대여섯 편의 매우 짧은 단편들을 플로어에서 일별하는 것이 관객이 접한 〈실전 무용〉의 전부라 하겠다. 생각해보면 공연에서 설정됨직한 요소는 무궁무진하겠는데, 가까운 예를 상상해봐도 관객이 출연진과 공유할 법한 인상적 체험이나 느낌 혹은 춤 생활에서 무용인들이 겪는 애로사항이나 특이점 같은 것들이 소통될 수 있겠다. 관객과 소통하는 채팅이라는 장치를 중심으로 이런 사항들이 반영 전개될 수 있었겠으나 아쉽게도 필자로서는 그런 순간을 만나지 못하였다.
정재우 〈실전무용〉 ⓒ김채현 |
상식적으로 말해, 수입의 크기가 작품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이 무시할 만큼 수입이 적은 편이 오히려 예술 장르의 순수성(즉, 예술성)을 보전하기에는 더 다행스러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압박은 음으로 양으로 밀려들고 있으며, 생존이 절박할 정도로 수입이 소소한 것은 문제 중의 문제이자 가장 직접적이며 현실적인 문제이다. 안무자는 경제적 수입의 무게를 깨우치면서 대중성으로 눈을 돌려 작업에 착안했고, 그러면서도 상업성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생존 의식을 〈실전 무용〉에 담아내었다. 〈실전 무용〉은 대중의 취향을 반영해서 콘텐츠를 다듬어내고 이를 디지털 방식의 소통 수단과 접목시켰다. 경제적 어려움이 예술의 기(氣)를 꺾기가 다반사인 현상황에서 정재우는 그 현실의 늪을 ‘실전무용’이라 이름한 새 시각으로 직격하는 몸부림을 진솔하게 보여주었다.
이예지 〈상상되는 몸〉 포스터 |
이예지는 〈상상되는 몸〉에서 어리둥절한 장면들을 연출하는 면모를 보였다(서강대 메리홀, 2월 18~19일). 오늘날의 무대에서 그런 식의 장면은 흔치도 않지만 낯설지도 않다. 그래도 이런 드문 장면들이 구현되려면 출연진 사이에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상호 다짐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어서 사뭇 인상적인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공연이 시작하고 막이 오르면 아주 낮은 소리가 들려오고 객석이 서서히 밝아진다. 무대에서는 아무 낌새가 없어서 도리어 시선이 거기에 꽂힌 사이에 객석 뒤쪽으로 두 사람이 바닥을 기어대며 객석 통로 쪽으로 들어오고 이제는 시선도 그쪽으로 쏠린다. 위에서 아래로 경사진 계단 통로를 내려갔다가 무대 하수를 거쳐 다시 건너쪽 계단 통로로 올라가서 두 남녀는 사라진다. 이 부분에서 그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두 사람은 완전히 밀착하여 뒤엉킨 상태에서 일어서는 경우는 전혀 없이 계단 바닥을 느리게 구르는 모양으로 이동하였다. 층계의 수많은 턱들을 그런 자세로 기어가는 것이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행동인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으며, 엄청난 중노동에 육박하는 그런 것이었다 하겠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무대에 등장한 앞의 두 출연자는 여전히 알몸의 상태를 유지한다. 여기서 두 남녀가 취하는 것으로는 엎드린 자세, 누운 자세, 선 자세가 기본이며, 그 각각의 자세를 한참 동안 취한 후에 다른 자세를 취하였다. 각각의 자세에서 미동도 없이 그 자세로 있거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눕기도 하고 한 사람 옆에서 다른 사람이 느리게 약간의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상대의 몸 위로 몸을 포개어 X자 형태로 눕는 장면도 보이며, 한 사람이 눕고 한 사람은 서기를 조용히 교대하는 장면, 느리게 바닥을 뒹굴거나 바닥을 기는 장면도 등장한다. 조명과 음향이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장면 장면들이 이어진 연후에 암전된 무대는 어슴푸레 밝혀진다. 무명천 같은 막이 벽면을 크게 드리운 상태에서 두 남녀는 무대 좌우로 뚝 떨어져 객석에 등 돌려 서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벽면을 한참 응시하며, 이와 동시에 아주 낮은 굉음이 들리고 아마도 두 남녀가 내는 듯한 음, 아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스토리텔링, 춤 테크닉, 춤추는 몸의 조형성, 〈상상되는 몸〉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부재하며 오로지 몸의 거동에 상응하는 몸 형상이 도드라졌다. 이와 같은 부재는 춤과 몸에 대해서는 물론 몸과 함께 하는 자아에 대해서까지 특정의 관념들을 배제하는 효과를 부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관객에게 많은 것을 열어둘 것이다. 무대 위 몸 형상에 집중하는 관람 활동은 몸과 자아에 관한 특정의 관념, 즉 기존의 관념들을 비워내는 계기로 상정될 수 있다.
〈상상되는 몸〉에는 관객들에게서 몸이 새롭게 상상되기를 요청하는 뜻이 담겨 있다. 몸에 관한 상상에서 인습적 상상에 머물 것이 아니라 관객은 기존의 관념을 비우고 몸을 면밀히 관찰하며 몸을 함께 발견해가는 동반자로 초대된다. 멋진 일이다. 지금도 몸은 갖가지 허울과 규정에 갇혀 있지 않은가. 따라서 관객이 지각을 자유롭게 열어가면서 상상의 주체로 나설 계기는 잦을수록 바람직스럽다.
〈상상되는 몸〉이 몸의 몇 가지 기본 자세들을 축으로 몸 형상에 집중한 이면에서는 관객에게 기존 관념을 털고선 일테면 자유롭게 지각할 여지를 가급적 충분히 부여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관객에게 그 자유가 매우 폭넓게 주어진 탓에 오히려 관객이 실제로 그 자유를 과연 어떻게 조리있게 향유했을지 의문이 떠오른다. 보편적으로 생각하여, 관객 앞에서 펼쳐지는 무대는 그 본성상 이미 자유를 제약하는 면이 있으며, 이번처럼 상상을 촉발한다든가 몸을 면밀히 관찰하며 몸을 함께 발견해가려는 공연 또한 과연 그런 전제를 벗어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무한정 열린 자유도 자유에 해당하는지, 자유에는 어떤 제약이 따라야 하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여느 춤 무대뿐 아니라 〈상상되는 몸〉에서도 다음의 생각은 참고가 될 것 같다. 무용수들이 몸을 사리면 관객의 상상력은 흩어지기 마련이고, 관객이 능동적이려면 아무래도 먼저 무용수가 능동적이어야 할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