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우리가족출입금지’
가족을 매개로 아시아를 다시 보다
김채현_춤비평가

국립현대무용단의 프로그램 ‘우리가족출입금지’에서 3편의 가족 드라마를 만났다(11월 19~21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 세 나라의 안무가가 내놓은 드라마들은 모두 ‘혈연관계’에 기반한 가족 형태에 질문을 던지지만 각기 전개 내용은 판이하다. 각 안무가의 시선에 따라 편차가 있은 것은 물론이며, 그에 더하여 나라마다 차이가 날 가족 실태와 사회적 맥락이 얼마간 착색된 것으로 보인다.




이민경 〈♡〉




3편의 드라마 가운데, 가족의 개념과 실상이 빠르게 변동하는 오늘의 흐름을 도드라지게 진단한 것은 이민경의 〈♡〉(이하 하트)였다. 공연 내내 대형 모니터와 노트북들이 널린 공간에서 사람들은 그(것)들과 공존하며, 그런 디지털 기기들은 그들의 동반자인 듯이 각자의 의사소통을 대리하는 구실을 해낸다. 사람들과 디지털 기기가 가까운 사이가 되면 디지털 기기가 가족처럼 된다. 이처럼 가족은 ‘동반자’와도 함께 구성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굳이 혈연관계만이 가족의 전부인 것은 아니고 또 가족의 기준일 수도 없다. 아울러 〈하트〉에서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긍정시하고 재설정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는 포스트휴머니즘 류의 시각이 감지된다.




이민경 〈♡〉




무용 실습용 이동 바를 세워서 차린 약식의 빈소에 동일 인물이 반복해서 3명의 상주(일상복 차림이다)에게 문상한 후 또 서로 뒤섞여 문상하는 장면들이 〈하트〉 공연 초입에 설정된다. 절을 하는 품새나 조문을 받는 모습이나 매사 가벼우면서도 다소 기계적인 이 부분은 무미건조하기까지 해서 일례로 애도의 분위기 같은 혈육의 감정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뜬금없는 이 부분에 이어 세 사람은 일상 공간으로 돌아오는데, 모두 한 공간에 있다. 이어서 전개되는 다음의 부분에다 안무자는 〈하트〉의 방점을 찍었을 것이다. 어둠 속 노트북들에 크게 업로드된 문자들로써 각자 소통하지만 뜬금없이 어수선한 분위기는 지속된다. 여기서 모니터를 보다가 채널을 함께 바꿔보기도 하지만 잠시 동안에 그친다. 끝에 이르러 게더타운 같은 디지털 이미지가 바닥에 비취진다.




이민경 〈♡〉




이 일상 공간에서 그들은 제각각 노트북으로 제 할 말만 드러낸다. 업로드되는 문자들을 옮기면 이런 내용이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해야 보네’ ‘♡’ ‘집이야? 뭐 먹고 싶어?’ ‘끄덕끄덕’ ‘나는 피자 너는 치킨’ ‘뭐 먹고 싶어?’ ‘오늘 날씨가 좋아요’ ‘보고 싶었어 그동안’ ‘건강은 어떠신가요’ ‘어릴 때 뭐가 유행했지?’ ‘LOVE’ ‘모해 맥주 마실래?’ ‘군대는 제가 알아서 갈게요’... 각자 자기만의 자세로 노트북을 만지작대고, 문자들 사이에는 인과성도 없으며 상대방의 문자를 의식하지도 않는 눈치이다. 그래도 이런 행동과 태도에도 내심 각자 자기만의 지향은 분명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의 상식이다. 조문을 받을 적에 보였던 함께 동조하는 태도는 여기서 사실상 사라졌다. 다시 말해, 혈연관계에 기반한 가족의 퇴조로 읽힐 만한 상황이다.

〈하트〉는 말한다. 어떤 유대를 형성하는 장으로서 가족(가정)은 존속할 테지만, 디지털 기기가 깊숙이 개입하는 가족에서는 관계 맺기의 주체나 대상과 방식은 달라질 것이다. 〈하트〉가 울리는 변죽은 사소하지 않다. 이즈음 혈연관계를 비롯 인간 주체만이 가족을 구성한다는 통념을 딛고 인간이 의지하고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그(것)들이 가족 현장을 다르게 구성해가는 현상이 점차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가. 수긍할 만한 이러한 발상과 아울러,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춤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디지털 기기(와 예컨대 로봇) 같은 그(것)들이 수행함 직한 춤도 차제에 곁들여졌더라면 〈하트〉는 한결 풍부해졌으리라 생각된다.




퀵쉬분 〈마지막 인형〉




싱가포르의 퀵쉬분은 〈마지막 인형〉​의 소재로서 자식이 최선의 인간이 되도록 힘을 주는 선물을 부모가 선사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 소재를 그는 미얀마의 4개의 꼭두각시 인형 우화에서 취했다는데, 우화에서 주인공이 모험의 길을 떠날 때 받은 3개의 인형은 지혜, 힘, 지식을, 마지막 인형은 선-평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정통 혈연관계의 가족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소재이다.






퀵쉬분 〈마지막 인형〉




〈마지막 인형〉은 두 여성 무용수가 진행하는 듀엣작이다. 두 사람은 응당 부모-자식 관계를 은유하며 두 사람의 춤태는 화목한 가정의 부모-자식 관계를 저절로 연상시키듯이 빼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에 앞서 그들은 무대 앞쪽에 놓인 조그만 탁자에다 쇼핑백에서 끄집어낸 신발, 곰인형, 다듬은 머리카락 뭉치, 스카프, 보석 등속의 5가지 소품을 올려두었다. 곧 무대 중앙으로 나선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훈도(薰陶)하는 부모가 되며 한 사람은 부모의 훈도를 춤으로 따라 한다.




퀵쉬분 〈마지막 인형〉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가볍게 접촉하며 서로의 몸을 감싸는 모습들을 연출한다. 바닥에는 회오리 모양의 둥근 붓질 무늬가 디지털 이미지로 비춰진다. 탁자 위의 5가지 소품 가운데 유독 스카프를 골라 얼굴을 휘감고 회오리 가운데 앉은 무용수는 알을 깨고 나오려는 자식처럼 몸부림을 치며 다른 무용수는 회오리의 궤적을 쫓아 주변을 맴돌다 마침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같은 동작을 해보인다. 여기서 스카프는 여러 겹의 의미를 전달한다. 이경진과 정채민, 두 사람의 춤은 상체놀림 위주로서 하체의 진폭은 크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느릿하고 호흡은 깊고 품격이 역력하다. 마지막 인형이 상징하는 선과 평화를 찾아 두 사람이 수행하듯이 춤에 몰입하는 정도는 상당해서 일종의 경건한 분위기가 그 조그마한 무대를 감싸 안는 듯했고, 퀵쉬분 특유의 전아(典雅)한 정서는 인상적인 자국을 남겼다.




시모지마 레이사 〈닥쳐 자궁〉




일본의 시모지마 레이사는 가족을 거절하고픈 심사(心思)를 저돌적인 기세로 펼쳤는데, 제목 〈닥쳐 자궁〉에서부터 그럴 기미는 짐작되는 바다. 안무자의 말을 따르자면, 실제로 자기 아버지는 음주 폭력 행패가 심한 가정폭력범이었고, 5살 때 부모가 이혼했으며, 자기는 아버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으나 말과 행동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사랑을 빌미로 자행하는 가정폭력을 막기 위해 자기는 자신의 자궁을 어머니 배 속에 두고 나왔다고 자처한다. 그래서 닥쳐! 자궁인 모양이다. 내용 설명이 솔직하고 선명하여 아무래도 즉석에서 반응을 보여야 예의일 것 같다.




시모지마 레이사 〈닥쳐 자궁〉




키보다 높은 나무 막대기 2개가 날카로운 철조망이 둘러쳐진 형태로 무대 앞뒤에 세워져 있다. 일본 가요를 뚝뚝 끊기는 어조로 신나게 부르며 세 사람이 뛰쳐 들어온다. 행진하듯이 한 줄로 서서 일본 민속춤을 추며 경쾌하게 들어오는 그들은 아이, 엄마, 아빠의 일가족이다. 세 사람은 은빛의 대형 기저귀를 걸쳤다. 경쾌한 분위기는 곧장 사라지고 부모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며 그 틈바구니에서 아이는 마구 당하기 마련이다. 폭력과 일시적 후회 사이를 오가는 아빠의 상태가 곧 이 가족의 일상이다. 〈닥쳐 자궁〉에서는 우리 가요 〈임진강〉뿐 아니라 아래에서 보듯 우리말 욕설도 길게 삽입되었다.




시모지마 레이사 〈닥쳐 자궁〉




아빠 역을 맡은 배효섭은 행동이 그로테스크한 데다가 하체가 강건하고 아이 역의 시마지마와 엄마 역의 이경구는 발랄하다. 손과 팔의 잔재주를 섞은 연기와 함께 그들은 격한 움직임들로써 함께 휩쓸리는 광란도 연출한다. 기이하게도 이 가족은 기저귀 속으로 각자 손을 넣어 자궁을 꺼내는 시늉을 몇 차례 함께 해보였다. 폭력, 갈등, 다툼으로 지새는 이 일가족이 비틀대며 배회하고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이던 끝에 아빠는 다시 제정신을 잃는 곤경에 빠진다.




시모지마 레이사 〈닥쳐 자궁〉




어둠 속을 헤매는 아빠를 향해 아이는 한국말로 이런 욕설들을 참으로 거침없이 잘도 퍼붓는다. “아빠, 이 XX야, 꺼져 병신아, 닥쳐 미친 놈아 지랄하네, X 같은 새끼야, X도 못 하면서 지랄하네, 꺼져, 사랑한데이, 미친 XX야!” 이 순간 아마도 객석에서는 후련해했을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욕설의 수위로 치자면 국내 무대에서 〈닥쳐 자궁〉은 역대급 중의 역대급에 꼽힐 것이 확실하다.




시모지마 레이사 〈닥쳐 자궁〉




〈닥쳐 자궁〉은 신랄하고 당돌하다. 자신의 체험을 과감하게 들춰 보이는 안무자 시모지마 레이사의 결기가 칭송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의 춤 스타일을 저돌적인 사실주의라 이름 붙여도 무방하겠고, 이 정도로도 시모지마는 어느 면 일가견을 이룬 편이라 하겠다.

가족을 지탱해온 가족 신화는 지금 아시아 나라들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벗겨지고 있을 것이다(특히 아프가니스탄은 예외로 지켜봐야 하겠지만). 〈우리가족출입금지〉에서 만난 3편의 공연작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나라마다 차이가 날 가족 실태와 사회적 맥락이 어렴풋이나마 읽힌다. 디지털 기기의 확산 속도가 빠른 한국, 유교식 혈연주의가 아직 상대적으로 강력한 싱가포르, 한국에 못지않게 가족 해체가 진행되는 줄로 아는 일본처럼 각국의 현실이 부분적으로 각 공연작에 서려 있지 않은가.

아시아 전체를 통괄할 아시아적인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아시아의 춤을 하나로 묶어 재단하고 판단하려는 생각은 무리를 낳기 쉽다. 그보다는 이번의 ‘가족’처럼 아시아의 춤이 공유할 만한 익숙한 이슈를 함께 예술화하기를 모색해봄으로써 서로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터득해나가는 것이 상호 이해와 교류에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국립현대무용단은 그간 교류 사업을 통해 다수의 유럽과 미주의 예술인들을 초빙하여 협업 등을 모색한 바 있다. 아시아권 안무가들만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은 이번 〈우리가족출입금지〉가 처음인 줄로 안다. 아시아권 춤에서 한국의 위상이 낮지 않은 터에 이제는 그에 걸맞은 행보를 다그쳐나갈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한다. 전세계를 범위로 하는 막연한 목표보다는 아시아권의 춤플랫폼에서 한국 나름대로 수행할 만한 플랫폼을 구체적으로 상정해보는 것이 현실적이며 보다 실질적인 결과를 낳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의 프로그램은 그 방면의 시금석으로 참고될 만하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1. 12.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