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무용계에서 대중성과 개성을 갖춘 무용가로 떠오르는 사람으로 우선 김설진과 김보람이 손꼽보아진다. 무엇보다 이들은 진작부터 타 장르와 크로스오버를 실천한 안무가들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색깔의 춤적 정서와 춤적 역량을 쌓아오고 있다. 케이컬쳐(K-Culture)의 전성시대라 할 만한 요즈음에 이미 이 둘은 스트릿 댄스로 춤에 입문하였고 장르에 국한 없이 대중매체에서 활발히 활동한 이력을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김설진은 파격적인 현대무용(Mnet 예능 ‘댄싱 9 시즌2’)의 새로움을 알린 후 꾸준히 방송활동을 하고 있으며, 김보람도 이날치밴드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와 협업 행보로 대중들에게 현대무용이 고답적인 것이 아니라 아이돌 댄스 못지않게 신나는 장르임을 각인시킨 바 있다. 이들의 발랄하고 자유로운 춤 스타일은 무용계에서도 자신들의 춤영역을 굳건하게 다졌고 최근에는 온라인 스트리밍과 댄스필름 같은 분야에서도 선도적으로 활약하는 중이다. 좁은 무용계를 넘어 날개를 달고 대중문화계로 넘어가나 싶었던 즈음 김설진은 신작 〈풍경〉(12.16~19.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으로, 김보람은 2010년작 〈바디 콘서트〉(12.17~19.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로 각자의 초창기 모습을 되뇌게 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김설진의 작품 〈풍경〉은 동명의 댄스필름을 무대버전으로 옮긴 것으로서 병원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여러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억, 죽음, 관계를 다뤘던 그의 전작들(〈더 룸〉,〈등장인물〉,〈스토리 인 관악〉)과도 연계되어 보이고 김설진 특유의 연출력과 무버 무용수들의 춤과 안무로 고독 속에서 견디는 쓸쓸한 사람들의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일상적인 몸과 공간을 낯설게 보이게 하고 현실이 아닌듯한 극적 이미지 연출에 특화된 김설진이 이번 작품에서는 다소 초현실성을 걷어 내고 지독하게 현실적인 사람들의 서사에 주목하였다.
무버 〈풍경〉 ⓒBAKI |
작품 배경은 병원 실내로 그곳에서 일하는 간호사, 방문객, 환자들의 불안한 심리가 제어할 수 없는 몸짓으로 서로의 입장과 관계성을 나타낸다. 그 관계성은 담담하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쇠락해지는 몸(움직임)의 반응으로 서사를 구성하며 춤으로 밀도 있게 펼쳐진다. 무대의 가변형 셋트는 방안과 밖 또 다른 방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규정하는 공간으로 각 사람들마다 기다림의 실체가 무엇일지 상상하게 하였다. 병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어긋남에서부터 휠체어에서 빠진 머리카락을 쥔 노인의 행동까지 무대에서는 개별적인 스토리가 펼쳐진다. 구조적으로 계획된 무대 셋트(벽)가 전체 흐름을 주도하는 축으로 전환되는 매 장면의 내용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로 인해 배역들의 스토리와 정서가 그 그릇에 담겨 하나의 큰 풍경이 되는 것이다. 누구는 가족을, 누구는 퇴원을, 누구는 죽음을 기다리듯 각기 다르지만 같은 기다림일 것이다.
무버 〈풍경〉 ⓒBAKI |
무엇보다 명확하게 설정된 병원 공간과 배역이 있기에 작품의 정서적 흐름에만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댄서들의 절제된 표정과 동선으로 그러나 몸짓은 축 늘어진 ‘달리’의 시계 그림처럼 사람과 사람 감정의 틈새로 파고들어가 그들의 미묘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생명이 소진되어 가는 병원에서 극단적인 몸짓의 한계에 도전하는 댄서들의 표현이 작품에서는 대체로 어울렸다. 물론 김설진만큼 단원들이 관절이 휘고 몸통이 꺾이는 동작을 만족스럽게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무거운 주제이나 희극적인 요소가 적절히 조합되어 작품의 분위기는 그리 슬프거나 우울하지도 않았다. 각 방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적절한 거리감으로 감정의 구체성보다는 춤으로 기다림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본질(정수)이 작품에서 잔잔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무버 〈풍경〉 ⓒBAKI |
이번 작은 특히 벨기에 피핑톰무용단에서 활동한 김설진이 국내에 혜성처럼 등장해 신기한 동작과 댄스씨어터적 안무를 보였던 그의 초창기 모습이 생각났다. 그의 춤만이 범접할 감정의 틈새를 파고드는 집요함으로 무의식 같은 초현실의 세계도 극적으로 펼쳐내 보이며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때 말이다. 양날의 검처럼 그의 동작 구사법과 독보적으로 초현실적 영화적 무드를 구현하는 피핑톰 무용단의 방식이 유사하기에 자신이 몸담았던 컴퍼니를 뛰어 넘는 차별화된 김설진만의 창작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그간 어려움이 있어와 보였다. 연기와 영화적 기법으로 안무와 연출에서 신선함을 줄 때도 있었고 호기심에 그치는 작업들도 있어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 〈풍경〉에서는 다시 무버와 김설진의 정체성이 잘 드러났고 그들만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창작방식임에는 틀림없었다.
무버 〈풍경〉 ⓒBAKI |
김보람의 〈바디 콘서트〉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국내외 극장에서 러브콜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다. 최근에 TV프로인 ‘풍류대장’에서 국악과 현대음악이 협업하여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고, ‘스트릿우먼 파이트’의 인기몰이로 케이팝의 보조 역할이었던 스트릿댄스와 백댄서들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허나 김보람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스트릿 댄스에서부터 한국춤까지 망라하여 자신이 습득하고 경험한 모든 움직임을 안무했다 생각하니 참 선도적으로 크로스오버를 한 셈이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바디 콘서트〉 ⓒkim.seung.cheol |
전통이든 변방의 스트릿 춤이든 진심으로 춤출 때 대중들에게도 극장의 관객들에게도 울림을 주듯이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바디 콘서트〉는 여전히 관객과의 호응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춤의 맛을 진정성 있게 교감하고자 했다. 헨델과 바흐, 가요, 락, 일렉트릭, 아리랑에 이르는 음악을 움직임으로 해석해 낸 〈바디 콘서트〉는 10년 전만큼의 신선한 감흥은 아니었지만 인간고유의 리듬과 몸짓을 불러내는 춤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원곡의 리듬에 반하는 쪼개진 동작들로 불협화음을 대놓고 지향한 춤이 오히려 생체의 리듬을 자극하여 관객의 흥을 불러내는 것이다. 최근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발표했던 〈춤이나 춤이나〉에서도 민요와 타령을 춤으로 해석해 내었듯이 김보람은 소리와 몸짓의 원초적 소통을 꾸준하게 탐색하며 몸에 존재하는 리듬의 힘을 믿는 예술가이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바디 콘서트〉 ⓒkim.seung.cheol |
2010년에 발표한 작품이 다시 무대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김보람과 앰비규어스의 춤은 춤추다 헉헉대며 죽을 것 같은 동작의 파열이 보는 이의 춤세포를 자극하여 몸을 들썩이게 한다. 또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무용을 보며 지나친 겸손으로 자신의 무지를 자책할지 모르는 누군가에겐 편안함을 주는 춤이기도 하다. 고급진 브레이크로 모던한 발레 동작으로 아리랑 춤사위로 활개를 친 무대는 관객과 교감하며 순간적이지만 일탈과 해방의 시간을 선사하였다. 오롯이 춤만으로 객석에 앉자 있는 관객의 신체를 움직이게 하고, 춤추고 싶은 욕망을 건드리는 안무가가 몇이나 있을까. 김보람과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이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바디 콘서트〉 ⓒkim.seung.cheol |
이제는 중견 안무가로 진입하는 두 안무가들이 열심히 달려온 세월과 그간 작업을 한 바퀴 돌아보며 자신들의 방향성을 짚어보는 것일까? 이유는 다소간 불투명하겠지만 필자는 이들의 춤이 자기 옷을 입은 것처럼 자기다워 좋다. 김설진의 일그러진 비정상적 동작과 연출력으로 정상성을 환기시키는 창작법이, 김보람의 현대판 비장미로 장렬히 움직이는 모습이 초창기보다는 그 효력이 떨어졌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실 이들의 작품은 어느 정도 예측되는 면이 없진 않지만 달리 보면 그 만큼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춤어법이 구축되어 있다는 반증이라 여겨진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