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 작품 속에서 춤작가는 늘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들이 춤으로 말을 하는데 적어도 어떤 춤을 추는 것 못지않게 그들이 그렇게 춤추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춤적 자질이 거기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자질은 작가의 내면일 뿐 아니라, 그것을 깊이 성찰하고 명징하게 춤으로 드러내는 남다른 능력이기도 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물론 쉽지도 않다. 순결한 감수성과 끈질긴 춤적 탐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남다른 춤적 자질과 감수성으로 독자적인 춤 세계 하나씩을 이룩한, 부산과 대구에서 그 위치가 결코 가볍지 않은 두 중견 작가의 작품을 본다.
새로운 춤의 깊이, 박은화의 〈불의 검(劒)〉
내면과 관련된 춤 작업의 성격은,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자기만이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 믿음은 그 작가가 가지고 있는 독자성으로 춤 작품의 성격과 그 과정을 결정하게 되고 작품의 모든 것은 이것에서 나온다.
박은화(부산대 교수)의 작품은 이 자아에 대한 성찰로, 그에게 자연은 생명의 예감이자 끈질긴 춤의 요소이고 삶의 변환이다. 그의 춤이 삶의 성찰을 담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날, 문득 더할 수 없이 안정된 자신의 삶에 오히려 위기와 불안감을 느꼈다는 예술가. 그에게 그 위기는 전면적이고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 위기가 대학 교수로서 자신의 춤 재능과 춤적 실천의 게으름에 대한 확인으로, 그가 추구하는 유일한 증명인 춤이 여전히 가능한가를 스스로 의심하는, 그것이 예술가라는 존재에 대한 결여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존재의식을 춤 작업의 전제와 결론으로 삼게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 존재 이유에 대해 위기를 느낀 이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에 대한 성찰로 시작된 춤적 실천의 작업이 ‘tuning’의 시작이다. 춤작가 박은화의 이야기다. 그의 열일곱 번째 작업 〈불의 劍(검)-tuning-ⅹⅶ〉(복합문화예술공간MERGE?, 11월 30일)을 본다.
박은화 〈불의 劍(검)-tuning-ⅹⅶ〉 ⓒ박병민 |
부산대학교 앞 골목, 오래돼 보이는 이층(흔히 양옥집이라 일컫는) 건물 벽에 노란색 불이 켜진 ‘?’, 앞 단어 ‘merge’는 어두워 보이지 않고, 외부에서 이층으로 오르는 철제 난간을 엮은 대나무에 불씨처럼 내려앉은 붉은색 천 조각들이 바람에 날리는 흥미로운 공간이 무대였다.
도로에서 건물을 바라보고 서자, 건물 뒤쪽 어둑한 공간에서 탈(12지신)을 쓴 무용수들이 건물 옆 벽, 좁은 마당을 두리번거리면서 나온다. 몇은 이층 난간에 숨듯 바짝 몸을 붙이고 관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뒤이어 나온 ‘붉은 천(바람)’을 쓴 박은화의 포효(소리 없는)하는 듯한 춤은 관객에게 불로 베푸는 세례이거나, 순수를 회복하는 원초적인 춤으로 생명(불)을 대하는 그의 주술적인 시선이자 춤 의식의 절대성으로 보인다. 캐릭터 해석에 깊이를 더해준, 12지신의 부풀린 목도리와 부피감 있는 뿔 달린 흰색 재킷이 주는 상징성과 조형미가 상당하다.
박은화 〈불의 劍(검)-tuning-ⅹⅶ〉 ⓒ박병민 |
실내로 이동하자 남자(박근태)가 쇠망치로 못질을 하고 있다. 쇠와 쇠가 만나 불을 일으키고, 불에서 담금질 될 검의 탄생을 예고하는. 무도복이 연상되는 통이 넓은 검정색 상하의와 흰색 셔츠가 은유하는 절제된 정신과 달리 분노와 열기가 섞여있는 망치질은 일시에 불(火)과 대장간 신(神)이 군신(軍神)과 비너스를 두고 다툰 신화를 소환한다. 불에 의한 창조(검)가 불에 의한 파괴 위에 그(군신)를 데려다 놓는 우화 말이다. 나선형의 실내 철제계단 난간을 두드리며 남자가 내려오고, ‘철 소리에서 쨍하’고 튀는 ‘하얀 빛’이, 공간을 날카로운 음악처럼 날아다닌다.
박은화 〈불의 劍(검)-tuning-ⅹⅶ〉 ⓒ박병민 |
몸을 돌리자, 길처럼 놓여있는 북을 떼어 낸 북틀을 건너오는 이의 움직임이 벽(영상)에 일렁인다. ‘긴 역사’의 ‘칼을 품’은 채 다른 공간으로 건너오는 빛의 그림자가 마치 만다라 같다. 북틀을 빠져나와 이마에 손을 얹고 일렁일렁 추는(황정은, 권아름) 아름다운 춤에 이어 철판 벽에 쳐진 비닐(영상)막 사이, 철판 벽에다 몸을 내던져 부딪는 소리가 춤이(안선희) 되어 날아드는가 하면, 비닐을 잡아당기며 바닥에 눕자 바람을 안고 부풀어 오르는 비닐은 마치 불가항력인 삶 같다.
박은화 〈불의 劍(검)-tuning-ⅹⅶ〉 ⓒ박병민 |
관객들이 서 있던 한 쪽 벽을 밀어내자 유리 밖 좁은 정원에 탈(12지신)을 쓴 무용수들이 안쪽을 보며 서 있다. 테이블과 의자가 들어오고,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문은아의 춤을 토끼(탈)가 창에 바짝 붙어서 본다. 이어 원숭이와 닭과 쥐가 창에 붙어 서고, 그들의 뒤를 양과 말이 지나간다. 누가 누구의 풍경이고 욕망의 시선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그들의 등에 솟아 있는 아름다운 뿔은 안무자가 그들에게 준 초자연적이자 생명원리의 힘으로 읽힌다.
의자에 앉는 박은화. 그들이 서 있는 창을 가만히 바라본다.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닌 삶, 그 하나를 확인하는 것인지도. 그리고 그 삶을 내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세상에는 확실히 바깥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삶이 있다. 좋은 장치였다. 뒷걸음으로 말이 지나가고, 누군가 양손에 흙을 담아 박은화의 발밑과 무대 공간에다 쏟는다. 동상을 들고 들어와 머리를 흙위에 내려놓는다. 테이블 위로 훌쩍 뛰어 올라 앉은 박은화가 동상을 내려다본다. 흙으로 채워진 동상의 배 위에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
박은화 〈불의 劍(검)-tuning-ⅹⅶ〉 ⓒ박병민 |
‘순환의 대화 장’. 동상을 제작한 작가(성백)가 누워있는 동상 옆에 선다. “이것(동상)은 저의 이야기입니다...저의 어머니는 1999년 00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춤을 추며 박은화가 대화를 잇는다. “저의 어머니도 몇 해 전 오늘(11월30일, 공연 날) 소천 하셨습니다...불속에 몸을 활활 태우며...” 흙 위에다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작가(성백)의 어머니는 흙이 되셨고, 흙은 나무고, 공기고 그를 생존케 하는 것이자, 곧 우리라는. 그리고 우리는 그 공기를 마시고, 오늘을 살고, 나무를 심고,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동상의 풍요로운 배(흙이 길러내는 나무)의 형태는 모성적 이미지의 숲이자 삶과 죽음의 주변에서 말해지는 신비로움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두 작가의 이야기는 만난다.
붉은 셔츠와 양말을(불 에너지의 은유로 보이는) 신은 안선희가 흙을 바닥에 뿌리고, 원을 그리다가 동상의 등 밑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허리께가 걸려 주춤 물러난다. ‘낮게, 더 낮게...‘. 다시 바닥에 스미듯 몸을 붙이고 기어 들어간다. 그리고 공간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손을 잡고 돌아 나간다. 모두 제 마음속의 불(검)을 품고, ‘또 다른 검(劍)의 역사를’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박은화 〈불의 劍(검)-tuning-ⅹⅶ〉 ⓒ박병민 |
춤작가 박은화 또한 ‘tuning’의 연작으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과 만물을 하나로 융합하여 이로부터 예술가로서 내적 평화를 얻으며 새로운 춤의 깊이를 확보하며 춤(자신) 역사를 지나는 중인지도.
〈불의 검(劍)〉은 감각적인 춤과 음악은 물론 미감이 뛰어난 의상까지, 사실과 관념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생명의 초월과 순환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춤 창작의식에 관한 또 다른 모범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기록의 묵직함, 장유경의 〈사초(史草)〉
‘팬데믹의 과부하와 그로 인한 단절에 대한 기록’이며 지금 이순간이 역사로 남을 춤의 ‘초고이자 또 하나의’ 장유경(계명대 교수) 춤의 기록, 〈사초(史草)〉(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12월 16일)를 본다.
춤몸, 그러니까 몸(춤)으로 역사를 쓴다고 할 때의 몸(춤)은 하나의 비유다. 말하자면 (춤으로)역사를 쓴다는 실천을 겨냥하여 말하는 불분명한 표현인 것이다. 춤몸으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사초’를 쓴다고 우리가 ‘사초’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도, 알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이 사초(팬데믹)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 사초를 쓰는지도. 춤몸의 비유도 아마 그럴 것이다.
“사초, 초고... 역사의 기록이라 해도 결국 정리하고 매만져야 할 거친 형태일 뿐인 것”이라는 안무자의 말을 새기며 “팬데믹의 굴레를 헤쳐 나가려 노력했던 그 긴 시간의 얘기”를 (들어)본다.
장유경 〈사초(史草)〉 ⓒ옥상훈 |
상수에서 하수로 열여섯 명의 무용수가 길게 늘어서 있다. 열에서 툭 떨어져 나온 한 명의 춤을 다른 이들이 가만히 지켜서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뒤돌아서서 힘 있고, 빠르게 걷는다. 물이 밀려왔다가 나가듯 다시 돌아서 걸어 나오고, 다른 이가 나와 춤을 추다가 한꺼번에 다시 뒤돌아 들어가는 춤이 내내 이어진다. 무대에 ‘흩뿌려진’ 의 ‘거칠고 투박’한 ‘첫걸음’들이 쓰는 ‘사초’를 춤으로 잘 형상화 장으로 춤작가 장유경(안무자)의 세련됨과 단단함이 잘 드러난 장이었다.
장유경 〈사초(史草)〉 ⓒ옥상훈 |
풀과 볏 짚단(사초)이 뭉쳐진(실록) 듯한 덩어리, 정육면체의 검은색 큰 물체가 무대 가운데로 밀려들어 오는 것을 무용수들이 지켜본다. 조명을 받은 짙푸르고 검은 물체는 실록의 조영이며, 세 개의 형태로 나눠지는 조각들은 제각기의 세계이며, 그 내용을 구성하는 모든 기록도 제각기 독립된 하나의 세계로, 그 각각의 세계들은 처음의 보편적 세계의 조영이기도.
상수에서 등장한 김용철의 솔로에 이어 김정미가 하수에서 말아들고 들어온 종이를 길게 펼쳐 놓는 과정을 쪼그리고 앉아 보다가 나가면 김정미가 종이 위에서 발바닥으로 앞으로 뒤로 발로 종이를 구긴다. 발로 문지르며 쓴 사초(질박한 사초?를 뒤집어쓰고 구른다. 춤 한 조각 없이 발로 쓰는 사초라..., 지니고 있는 춤의 형식은 가냘픈데 감당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아 그것을 담아내기보다는 차라리 그 속에 묻혀버리는 것이 쉽다고 판단한 것일까?
장유경 〈사초(史草)〉 ⓒ옥상훈 |
춤으로 쓴(1장) 사초의 덩어리가 네 개의 형태(책으로 보이는)로 갈라진다. 갈라진 형태지만 다른 깊이와 다른 위치의 동일한 존재의 기록으로 빛나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그것(실록)은 처음의 ‘사초’가 쓰이던 춤몸을 이반하지 않는다. 갈라진 형태는 각기 세계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내용들 또한 제각기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듯 펼쳐진 조각이 이어지며 생긴 벽에 애서 춤으로 사초를 쓴 이가 스미듯 기대어 선다. 제각기 쓴 기록이 이어져 ‘사초’가 된다는 것을 무대장치로 잘 보여준 장이었다. 그것이 넘어지고 깨진 상처에서 난 피(跌撲)로 쓴 사초든, 꾸미지(質朴) 않고 쓴 사초든.
장유경 〈사초(史草)〉 ⓒ옥상훈 |
3장, ‘기록의 이면(裏面)’. 무대 안의 무대, 사각형의 박스 안의 물체(대 여섯 명의 무용수가 웅크리고 있는)를 보랏빛 조명이 닿자 물체가 신비한 색으로 변하면서 번지듯 무대를 덮는다. 깜찍한 왕관의 모양을 하고 있는 바이러스처럼. 검정색 천을 뒤집어 쓴 이(김용철)의 춤은 제 춤(몸)속에서 제 춤을 보고 마치 그 속에 들어가는 듯하다. 마치 기억의 상징주의가 춤의 시간의 어둠을 건너 자아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방법처럼. 사유를 확장하자면 ‘사초’의 기록은 죽음의 칼질, 고통의 칼질로 씌어 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이었다. 그것이 마침내 죽음을(바이러스) 몰아내기도.
‘기록의 이면’은 김용철의 춤으로 춤 해석이 쉬운 반면 일관성 없이 오르내리는 대본의 내용과의(앞장 김정미의 춤과 바꿔도 무관한) 그 거리를 파악하기 어려워 춤을(맥락)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장유경 〈사초(史草)〉 ⓒ옥상훈 |
마지막 장, ‘시선(視線)’. 베잠방이 같은 흰색의상을 입고 추는 듀오(김현태,서상재)의 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자면 ‘눈으로, 가슴으로, 체온으로’ 서로의 춤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 의미 확장은 가능하나, 그들이 가진 춤 역량과 달리 〈사초〉가 그리고자 한 깊은 의미는 읽어낼 수 없었다. 흰색 벽이 막처럼 중앙에 배치되고, 듀오와 같은 의상을 입은 이들이 하나씩 나와 선다. 다시 새로이 씌어질 ‘사초’로, 춤을 배열하지 않아 오히려 많은 의미를 상상하고 읽어내는, 탁월한 연출이었다. 검푸른 역사의 덩어리만 무대에 덩그러니 남는다. 오래도록. 묵직한 울림을 주는, 작품 〈사초〉가 획득한 무게였다.
장유경 〈사초(史草)〉 ⓒ옥상훈 |
춤의 출발점이 되는 음악의 선택은 춤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징이 출발점이 되는 음악에 내재되어 있다. 출발점이 되는 춤은 즉자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며, 전체의 가능성의 관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춤의 주제가 제기하는 요구에 음악이 충실하다는 것은 모든 모멘트들에 주제가 개입하여 주제를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춤에 있어 음악은 춤 속에서 흐르면서도 춤에 대해 이처럼 새로운 관계를 갖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음악은 더 이상 춤에 대해 어떻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게 무음일지라도.
이렇듯 춤 작품에서 음악은 의상과 더불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철학과 사상, 안무자의 미적 감각과 무용수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요소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시청각적으로 잘 표현하는 요소다. 춤을 분석하듯, 필자가 음악과 의상을 분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춤(몸)으로 쓴(1장) ‘사초’를 지나면서부터 장마다 툭툭 끊어졌다 이어지는 음악은 사초가 실록이 되고 역사로 ‘이어’진다는 춤의 메시지 연결은커녕 오히려 춤(주제)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반면 같은 조명 조건이지만, 장면별로 다르게 다가오는 조명의 질감과 느낌으로 〈사초〉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와, 장과의 대비를 통해 그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 조명과 무대미술은 〈사초〉가 묵직한 울림을 가지게 된 데 상당한 기여를 한 요소로 근사했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