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술작품의 감상과 향수를 규정하는 말로 근현대에 와서는 대략 세 가지 언표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감상이란 작가의 의도와 형상과정을 추적하여 창작체험을 뒤쫓아 추체험하는 것, 둘째는 작품이 던져주는 메시지와 이미지를 감상자가 자기화하여 이를 소재와 주제로 삼아 새로운 자기작품을 재창조하는 것, 세 번째는 예술가와 작품이 던져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또는 거리를 두고 맛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생성과정에 적극 끼어들어 창작과 향수를 동시진행시키는 문화복합공간에 참여하는 것 등이다. 이를 줄이면 감상과 향수는 예술창작의 추체험, 보는 이의 재창조체험, 미적 현장의 참여체험 등이다. 비평이란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한 예술가치의 발굴과 이를 평가하는 논리 세움이라 할 수 있다.
정은혜민족무용단 〈날개, 학〉 1장 ⓒ정은혜민족무용단 |
지난 초가을(9월 26일) 대전시립연정국악원 큰마당에서 올린 정은혜민족무용단의 춤극 〈날개, 학〉은 우리의 학춤을 소통언어의 근간으로 삼아 이의 변형과 확충을 통해 시대상을 투영코자 한 고전발레 구조의 춤극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학춤’이란 학연화대합설로 귀착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의 궁중학춤도 아니고, 지역 향토적 색채가 물씬한 동래학춤을 비롯한 민속춤 갈래의 것도 아니다. 90여년 전 한성준 선생이 궁중학춤에 자신의 창의력을 더해 창안한 이른바 한성준 학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여기서 ‘변형과 확충’이란 춤사위 등 표현언어나 이미지의 질감, 전개구조에 모던 댄스적 질감을 입힌 최승희-김백봉으로 이어지는, 반쯤 신무용풍으로의 원형 변형과 확충이다. ‘고전발레구조’란 기승전결이 비교적 뚜렷하나 디베르띠스망적 삽입대목도 있고 다분히 설화 구조의 희비극적 낭만성을 품고 있음을 말한다.
또 여기에 ‘시대상의 투영’이란 DMZ로 표상되는 겨레 분단의 아픔과 학 서식지로서의 희망을 아울러 지니고 있는 ‘역사의 숙제’ 현장에 불로장생과 불굴 고결 평화의 상징인 학춤을 극 중에 투입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성준-김천흥으로 이어지는 학춤의 맥락과 최승희-김백봉으로 이어지는 신무용의 맥락을 정통으로 이어받아 자긍심이 이만저만이 아닌 정은혜에게 이 둘의 것이 어떻게 휘감아 물결치고 있는가. 그 창작의도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추적, 관찰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정은혜민족무용단 〈날개, 학〉 1장 ⓒ정은혜민족무용단 |
반쪽의 날개로 제대로 날갯짓을 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비극을 거두어 내고 희망의 굳건한 토대를 한성준학춤의 재생, 복원, 확충, 심화를 통해 구축해냄으로써 이를 밀고 나가 〈날개, 학〉을 산출, 이 시대의 새 학춤의 비상을 실현하는데 최종목표가 있는 것임을 이 춤극의 안내서는 예감케 하였다. 이로써 춤으로 이 시대의 숙제를 풀어내려 하였고, 이윽고 세계에 내놓을 또 하나의 새로운 한류 창조에 춤작가는 비감해 한다. 그뜻이 머지않아 성취되리라고 싶은 것은 90여년전 한성준학춤에 비친 춤의 정신을 이어받아 40여년 각종 우리학춤 연구에 매진해온 학구열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방면의 연구성과로 『한국학춤의 역사적 생성과 미』(보고사,2018)를 발간한 바 있다.
거기에다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춤 기획력과 춤예술에 대한 순정한 예술의지와 공감효율이 깊고 넓은 그이 특유의 서정적 기운이 밑받침하고 있기에 더욱 성취 가능성을 높인다.
이러한 확신은 대전시의 역사와 숨결을 춤문화사적 접근으로 열 개의 대형 옴니버스 스타일로 엮어낸 〈대전십무〉(2014년), 깊고 짙은 시대적 정서적 동감을 여러 가지 표현 스타일로 이끌어낸 4개의 소품 엮음의 〈봄의 단상〉(2007년), 지역 소재를 이야기화하여 화려한 스텍타클로 대중성을 파고든 〈유성의 혼불〉(2002년), 대립되고 있는 두 요소의 충돌과 지양과 균형과 화쟁을 동서고금 춤사위를 통해 과학적으로 살펴본 〈대무의 고찰〉(2017) 등의 공연에서 이런 가능성에 확신을 더해왔다.
정은혜민족무용단 〈대전십무〉 대바라춤, 호연재를 그리다 ⓒ정은혜민족무용단 |
정은혜민족무용단 〈봄의 단상〉, 〈유성의 혼불〉 ⓒ정은혜민족무용단 |
정은혜민족무용단 〈대무의 고찰〉 ⓒ정은혜민족무용단 |
〈날개, 학〉은 “분단의 아픔 DMZ에서 피어나는 서사”로서 말문을 열고 있다. 이 작품은 “분단의 상징 한반도 DMZ에 상처를 치료받았던 한 쌍의 학이 방사되었다. DMZ는 겨레의 아픔의 땅이자 학의 서식지로 지정된 희망의 땅이기도 하다. 날개를 다친 암컷을 두고 홀로 떠났던 수컷은 수 천 킬로미터를 날아 겨울에 되돌아 왔다”는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춤극은 이 현대설화를 극적 이야기로 엮어 크게 다섯 장으로 구성하였다.
분단과 죽음의 땅인 DMZ는 유해와 유물이 발굴 중이다, 죽음의 춤(1장 DMZ).
순백의 학이 날아 들어 학의 삶터가 되고 경이의 땅이 되었다: 맑고 밝은 학의 군무(2장 그곳에는 새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철책은 길고 길어 어린 학이 날개를 다쳐 추락한다: 동족상잔, 처절히 통곡하는 군무(3장 통곡의 벽).
펴고 접을 수도 없는 상실의 날갯짓 곁을 지켜주던 한 마리 학마저 무리를 따라 더 먼 추운 곳으로 날아가고 고립, 슬프고 고통스런 듀엣(4장 반쪽 날개).
희망을 노래하면 그러할까, 이천 오백리 먼길을 날고 날아 학이 기적처럼 다시 돌아왔다: 군무와 솔로와 군무(5장 모두는 기적을 노래한다).
사람이 학탈을 온몸에 뒤집어 쓰고 찬연한 햇살을 받으며 장중한 날갯짓을 한다, 무병 장수와 고결과 평화의 상징인 학춤으로 새 천년을 다시 흐르게 한다(에필로그 천년 그리고 학 천년학).
정은혜민족무용단 〈날개, 학〉 2장 ⓒ정은혜민족무용단 |
짜임새는 구성지고 탄탄하다. 선율은 다소 애상적이고 검푸르나 경쾌한 중량감으로 정서곡선을 주도한다. 그 음악에 그 춤이랄까 서로 죽이 맞아 춤이 선율에 실려 타고 노닌다. 특히 〈4장 반쪽 날개〉의 남녀 듀엣에선 과감하게 무대에 나와 앉고 선 첼로와 바이올린 연주자의 이중주에 극적 분위기가 고조된다. 이들이 슬프고 고통스런 애무와 짝짓기의 듀엣을 이끈다.
음향과 무대 소도구, 무대설비도 적절하였다. 〈1장 DMZ〉와 〈3장 통곡의 벽〉에서의 총소리, 대포소리, 폭격소리, 울음바다소리 등은 실감을 자아내는 그 이상의 아련한 시간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우리 전통춤으로선 드물게 하체를 드러내고 춤추게 한 궁중학춤이 그래서인지 하체 움직임도 자유롭게 허벅지도 통째 드러내었다. 부리가 뾰족한 고개와 길다란 모가지와 얼굴을 덮은 학탈의 가림새를 버리고 날개짓의 날개마저도 거두어냈다. 새로 입힌 현대 질감의 춤의상은 춤동작이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한 질감을 불러내려는 것이다. 이리해서 신무용류가 주는 저릿하고 검푸른 회한에 화사하고 경쾌한 리듬감을 타게 하고, 여기에 하이얗고 빨갛고 검은 민족 정서가 얽혀 복합미감을 자아내려 하였던 것이다.
정은혜민족무용단 〈날개, 학〉 3장 ⓒ정은혜민족무용단 |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 의미있는 가상적 힘의 역동적 공간을 형성한다”는 현대춤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를 토대로 해서 여러 인접 매체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군무를 만들어내고 이를 적절한 배치를 통해 역동적인 시지각의 에너지 흐름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군무의 형태와, 군무 대 솔로, 군무 대 군무의 대결상과 결합상은 그간의 여러 실험적인 군무짜기의 성과가 잘 배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무의 힘이 단일한 움직임의 양적 팽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 개별춤이 얽혀 교집합하여 불러일으키는 유동에너지의 창출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안무자는 이미 몸에 배여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자기류의 군무장면을 확보하고 있어 도상학적인 해석과 시지각적 형태감을 알기쉽게 보여주려고 한다.
전통적인 춤어법으로보다는 좀더 자유롭고 표현성이 강한 신무용 풍이나 모던댄스 어법으로 우리춤에선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던 비극적이고 장중한 정황을 어떻게 표현해내는가가 이번 작품에 기대를 거는 또 다른 주안점이기도 했다. 과연 그러한 의도가 고전발레의 구조에 힘입은 듯한 전개방식에서 얼마나 유효하게 실현되었는가.
정은혜민족무용단 〈날개, 학〉 4장 ⓒ정은혜민족무용단 |
유해와 유물로 뒤덮여 있는 DMZ의 발굴현장 장면은 다소 어둡고 칙칙한 것이었으나 우리춤으로서는 차라리 신선하고 그래서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분단과 죽음에 대한 통곡의 대목도 어떤 극적 역동성을 불러내었다.
이러한 장면이 받침되어 있어 이 작품에서 마지막 학춤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춤임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숨은 의도를 확대 상정해본다.
춤은 제대로 살아있음의 자기확인이다. 죽음은 춤출 수 없게 하는 것이기에 춤의 가장 강력한 주제는 죽음 저항, 죽음 퇴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춤출 수 없게 하는 분단과 죽음의 땅을 일으켜 무병 장수 평화의 상징인 학춤으로 살려내 춤추게 한다. 이것이 희망의 노래가 불러 일으킨 기적이고, 작품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에필로그로 배치한, 한성준학춤을 토대로 변형하고 새로운 창조의 손길을 가한, 정은혜화한 창작학 탈춤의 숨은 의도를 이로써 짐작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추정해 보아서야, 인간이 추는 학춤으로 학탈을 벗은 남녀 듀엣의 〈반쪽날개〉를 마지막 학춤과의 대비효과로서 두드러지게 배치한 작품구도를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정은혜민족무용단 〈날개, 학〉 5장 ⓒ정은혜민족무용단 |
이로써 본격비평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춤극 〈날개, 학〉에 대한 창작자 정은혜의 작품 창작의도를 뒤좇아 ‘창작적 추체험’의 과정을 서술해 보았다.
창작 의도의 추적과는 배치되는 한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안무자의 의도를 해석해 자기표현을 해내야 하는 임무를 띤 무용수(춤꾼이라 부르고 싶으나 여기서는 무용수라 불러야 될 듯하다)가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학춤사위의 다양하고 자기화한 몸짓 창조는 참으로 작품성을 드높이는 데 적잖이 기여한 바이었다. 그러나 어떤 장면에서는 그런 표현 의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밑도 끝도 없이 웃음을 흘린다든지 아예 처음부터 하염없이 벌여져 있는 입과 그 속의 이빨이라든지 이를 무심코 보노라면 어느새 줄거리나 흐름을 놓치고 만 때가 적지 않았음을 스스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가볍게 나풀거리는 의상 속들이 내비치는 허연 몸놀림에서는 작품 창작자가 예측하지 못한 비릿함을 던져주는 때도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지적한다.
이는 적어도 춘앵전의 백미라고 하는 ‘화전태’의 춤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돌아가신 한국음악학의 태두 장사훈 선생이 지적하셨듯이 그것이 결코 ‘화류태’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채희완
현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