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 창작발레를 보며 머리가 아닌 몸의 감각이 열리는 정서적 경험을 한 경우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드만 포겔의 오네긴과 알리샤 아마트리안의 티티아나의 엇갈린 운명의 비극에서 연민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고, 아서 피타가 영국로얄발레단에서 선보인 〈변신〉을 보며 소설보다 더 잔인한 고독과 소외,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를 향한 비판적 몸짓에 전율을 느끼곤 했다. 해외 작품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 주재만의 〈VITA〉를 보며 일깨워졌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우리의 일상적 고민과는 발레 장르가 다소 거리가 있다는 인식은 부인할 수 없다. 여러 요인이 있으나 무엇보다 한국에서 당대적 의식과 창작력을 갖춘 작품을 목격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크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공감되기 위해선 창작발레가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생각이 주재만의 〈VITA〉를 보며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주재만은 1996년 프랑스 바뇰레 국제무용축제에서 최우수예술가상을 수상 후 도미하여 뉴욕 컴플렉션 발레단과 히스파니코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동하였고, 현재 뉴욕 컴플렉션발레단 부예술 감독이자 전임안무가라는 것. 2009년 〈Surface〉를 뉴욕 조이스 극장에서 초연하였고, 미국 프린세스그레이스재단(Princess Grace Foundation-USA) 안무가 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2018년 와이즈발레단과 신작을 발표했고 2019년 대한민국발레축제 〈인터메조〉에서 주재만의 창작적 역량을 처음 확인했다. 이번 10월 23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선보인 주재만의 〈VITA〉는 그의 섬세한 감각뿐만 아니라 당대적 감성으로 소통할 수 있는 보편성까지도 확보된 작품이란 생각이다.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 〈VITA〉 ⓒ와이즈발레단 |
작품 제목인 ‘Vita’는 일상, 삶이라는 라틴어로 근 2년여를 코로나 이전과는 다른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서 누구나 질문해 봄직한 내용이다. 훼손된 환경과 질병의 연관성이 입증된 사회에서 자연과 인간과의 본질적인 관계성을 되묻는 것이다. 생명, 파괴, 회복, 환희로 진행되는 시공간에서 자연의 본성이 회귀되길 바라는 내용은 팬데믹 시기여서 더욱 공감되는 부분도 있다. 우회적이든 직접적이든 동시대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인류사의 대사건이 예술가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그의 〈VITA〉 작품은 일상의 회복을 바라는 우리의 심경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 〈VITA〉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 안무의 힘은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동고동락해야 하는 관계라는 분명한 자의식이 ‘발레다움’으로 구현된 점이다. 인류학적이며 본질적인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을 탐색하는 주제이나 전체이야기를 끌고 가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계절감은 영상과 무대연출로, 희로애락의 삶이 반영된 정서변화는 상징적인 미장센으로 채워졌다. 풍경화 같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음악과 극적인 오페라 곡에 우아함과 그로테스크한 내적 감정이 더해져 시청각적 만족감을 주었다.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 〈VITA〉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이 구현해 내는 발레다움은 최상의 테크닉으로 구성된 파드되보다도 느리게 진행되는 장면에서 타장르에서 범접할 수 없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에게만 풍기는 고고함에서 발현된다. 장송곡 풍의 오페라 곡에 맞춰 검정 드레스와 가면을 쓴 포즈에서 번지는 기괴함(grotesque), 두 남성 댄서가 까맣게 변해버린 지구를 감당해야 하는 포즈에서 풍기는 광활함, 영적 분위기의 공동체감도 발레로만 표현 가능한 강렬한 미장센으로 표현된다. 언뜻 마사 그레이엄과 앨빈 에일리의 응축된 미국적 정서가 포착되나 주재만의 자연스러운 동작 배열(sequence) 포섭으로 이내 해소된다. 일련의 표상마다 전형적인 발레 특유의 품격(aura)을 유지하면서도 절제된 정서 표현으로 확장성 있는 해석이 확보된다. 병들어 가는 지구의 현실에서 고뇌하는 삶을 재현하며 조화로운 일상의 회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 〈VITA〉 ⓒ와이즈발레단 |
자연과 인간의 순수한 관계는 무성한 숲 영상을 배경으로 파드되 하는 장면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발레다운 활력으로 펼친다. 동시에 인간이 행해온 환경훼손의 불감증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스로 성장하는 나무숲과 인위적으로 성취해낸 댄서 테크닉의 절묘한 대비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자생과 자립의 과정에서 획득될 수 있음을 상기하게 한다. 발레의 심미성이 완연하게 펼쳐지면서도 자연의 생동감은 파괴된 지구와 소생될 생명 순으로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며 안무가의 창작의도에 구체성을 더해 준다.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 〈VITA〉 ⓒ와이즈발레단 |
치유된 지구에서 다시 마주할 봄과 희망을 상징하는 꽃들의 난발(爛發)은 영상과 군무진의 합일된 동작만으로도 생동감이 있으나 천장에서 꽃가루가 떨어지는 스펙터클한 마무리를 보이며 아쉬운 결말을 보인다. 60분간 자연과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관계성을 적절한 거리감과 스케일(scale)로 유지했던 전체 흐름이 깨지는 작위적인 마무리다. 어릴 때부터 수십 년이 쌓여야 구축되는 곧은 선과 근육들의 빗장을 풀어 헝클어지고 흩뿌려진 동작을 할 수 있을 때, 코어(core) 힘을 풀어야 할 순간을 적확하게 알 때 자연스러운 현대적인 동작이 표현될 수 있는데 이 부분도 마지막 군무에서 보완되길 기대해본다.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 〈VITA〉 ⓒ와이즈발레단 |
클래식 발레의 유산을 보존하면서도 시대적 문제의식으로 관객과 공감대를 나누는 컨템퍼러리발레의 창작은 한국발레의 숙제이자 미래이다. 대중들의 취향에 맞춘 클래식 발레만으로 운신의 폭을 좁힐 수는 없는 일로 컨템퍼러리 발레로의 적극적인 진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와이즈발레단이 주재만과 작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창작의 방식을 경험하며 성장했음은 확실하다. 오페라극장과 같은 시스템과 실황으로 연주되고 군무진의 기량이 다듬어진다면 와이즈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로도 부족함이 없다. 와이즈발레단의 객원 안무 선택은 탁월했으며 민간단체로 여러 어려움이 짐작되나 김길용 감독의 컨템퍼러리 발레창작의 굳건한 의지가 보였다.
와이즈발레단 & 주재만 〈VITA〉 ⓒ와이즈발레단 |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춤은 자연에서 출발하였고 미래를 기원하고 감정을 소통하며 협력을 다지며 함께 존재해왔다. 주재만은 〈VITA〉 작품을 안무하며 “자연은 영감의 원천이며 최고의 스승이자 치료자”라고 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있는“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도이다”(여기서 ‘여성’은 대지이자 자연이며 생명의 힘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로 해석된다) 구절처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공존해가야 한다는 주재만의 자의식이 분명하게 작품에서 발현되었다. 무엇보다 주재만의 인간의 몸짓과 생명이 자연에 귀속된 일부임을 잊지 않는 한국적인 자연관이 수렴된 창작발레라는 점이 의미 있는 성취로 여겨진다. 자의식의 형상을 무대에서 형식화해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지 않은 창작이라면 어쩌면 클래식 발레만을 보존 및 고수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 하루아침에 완성될 수 없는 발레 기술의 특성상 창작에 대한 고민보다는 테크닉을 연마하는 데 오랜 세월을 들이는 현 발레계의 풍토에서 시대적 감수성이 돋보였던 주재만의 창작 역량은 한국 창작발레에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어쩌면 아직도 창작의식이 빈약한 안갯속을 헤매고 있는 한국 창작발레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서 상대적으로 주재만의 작품에 과한 감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객관적 평가를 해야 하는 비평가이지만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작품에서 느껴지는 설렘을 어떤 언어로 만족할 만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오히려 주재만이 안무한 작품은 1초도 망설임 없이 달려갈 것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