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을 만들 건 추건 자신이 오래 추어오던 춤언어를 벗어나 다른 춤언어로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춤적 상상력의 내적 추동력과 같다. 서상재의 〈선을 넘다〉(아양아트센터, 8월 12일). 대구 춤을 단단하게 견인하는 춤꾼과 젊은 안무가들이 대구에 몇 있다. 그 중 서상재는 춤으로 무시로 ‘선을 넘’는 자유로운 춤꾼에 더 가깝다. 〈선을 넘다〉는 그가 춤꾼으로서의 목소리를 누르고 안무가로서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려준, 그 변환 지점을 분명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서상재 ART FACTORY 〈선을 넘다〉 ⓒ옥상훈 |
무대는, 도로를 차단하고 출입을 억제할 때 쓰는 삼각뿔 형태의 설치물이 42개 배열되어 있다. 붉은 색의 큰 천(보자기)을 끌고 나와 설치물을 싸듯 덮는다. 검정, 회색에 이어 색동 한삼 천으로 반쪽 공간을 덮는다. 색동 한삼은 자신의 춤 뿌리가 한국 춤 몸짓이 깃든 춤(몸)의 이성이자 민족 이성을 말하고 있는지도. 설치물을 싼 천에 물결처럼 이는 파동을 어둑한 무대 깊은 곳에서 남자가 가만히 지켜본다.
이어 무용수들이 설치물 사이를 넘나들고, 설치물이 놓인 질서 밖으로 선을 넘어 나가거나 올라서고 경계를 위반한다. 금지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위반의 춤에서 파생되는 잉여의 힘, 춤의 차별을 만드는 잉여된 춤의 에너지가 무대에 넘친다. 군무진이 내뿜는 서로의 춤 에너지의 발산과 흡수에서 비롯되는 춤은 또 다른 움직임의 파동을 일으킨다.
서상재 ART FACTORY 〈선을 넘다〉 ⓒ옥상훈 |
설치물이 상징하는 경계와 함께 군무가 일으킨 춤 에너지가 사라진다. 다시 숫자 하나에서 시작된 춤은 춤을 추고 있는 이의 팔을 다른 이가 맞잡고 숫자가 늘어나며 원심력이 생긴다. 용해된 춤 에너지의 폭발은 여섯 명의 남자 군무에서(최재호, 천기랑, 권지훈, 오동훈, 황창대, 황인찬) 다시 일어난다. 원초적인 몸짓 같은 동작으로 오롯이 춤(몸)에서 일어나는 흥에 몸을 실은 춤이 파동을 일으킨다. 아랍권 멜로디에 제기를 차는 변형된 동작, 변화와 변주된 춤에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더이상 춤을 추지 않을 듯,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서 가만히 객석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가 생각난 듯 다시 흩어지며 이어지는 춤, 좋은 장이었다.
손을 잡은 군무진이 무대 가운데를 가르면, 그 가운데를 다시 춤 선이 가로지른다. 그리고 또 다른 춤 선을 겹쳐 그려내는 춤 선의 배치. 번갈아 바닥을 구르듯 밟는 움직임에서 안무자의 독특한 춤 색깔이 드러난다.
서상재 ART FACTORY 〈선을 넘다〉 ⓒ옥상훈 |
한국창작춤이라는 춤동작과 음악의 특성을 제거하고, 춤동작 하나하나가 처음 만들어지고 추어지던 순간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춤이라는 움직임의 한계를 보충하고 완성한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춤이 가진 유용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고, 어쩌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하나일지도 모른다.
서상재에게 ‘선을 넘’는다는 것은 한국춤을 추는 동시에 반드시 배운 춤언어로만 춤을 추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이 젊은 안무자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한국춤 어법에서 벗어나는, 곧 탈선이며 한국춤 전공자가 춤이라 믿는 것에 대한 위반이다. 안무자는 한국춤 동작으로만 추지 않는다는 데서 위반이라는 가치를 붙잡아 내고, 그 춤 언어에 대한 해석을 통해 한국창작춤 동작이라는 익숙함의 선을 넘으며 그 가치를 다시 증폭시키고 있다. 위반을 통한 서상재의 춤으로 그 가능성을 끌어안는 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춤 동작에 대한 위반으로, 〈선을 넘다〉에서 서상재의 춤은 한국창작춤 방식으로 춤을 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선을 넘는, 위반의 춤 언어다.
서상재 ART FACTORY 〈선을 넘다〉 ⓒ옥상훈 |
익숙한 한국창작춤 언어를 벗어나 위반의 춤언어로 춤을 춘다는 것은 그를 그 자신으로 바꿔놓는 작업이다. 자신만의 춤, 자신을 찾는다는 이 말은 안무가로서 취할 익숙한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뜻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는 안무자(서상재)의 솔로 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작은 삼각형에서 시작된 빛이 차츰 번져나가며 일으키는 조명효과와 연기가 만들어낸 홀. 홀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드나드는 경계의 문처럼 보인다. 서상재가 한 팔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온다. 팔에 걸쳐진 붉은 천, 천을 목에 건 뒤, 두 발을 벌려 밟고, 두 팔과 목에 천을 걸고 발을 모으면 만들어지는 크고 작은 삼각형의 프레임 안에 서상재의 몸 비례가 드러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비례도 〈비트루비안 맨〉이 연상되는, 춤을 추는 몸의 수학적 비례와 구조의 근원에 대한 고민으로 읽힌다.
에너지가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이어지는 춤은 금지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가 설정되던 처음의 그 순간에 다시 서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재설정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서상재의 〈선을 넘다〉는 금지를 보충하고 완성하는 춤이다.
서상재 ART FACTORY 〈선을 넘다〉 ⓒ옥상훈 |
마지막 군무진의 뭉크의 〈절규〉가 연상되는, 양손으로 얼굴을 싼 뒤 앞과 뒤로 연신 몸을 뒤집는 동작, 30명을 무대 바닥에 바둑돌처럼 앉힌 뒤 예상치 못할 위치에서 불쑥불쑥 솟으며 추는 춤.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서 있는 등에서 느끼는 미감과 달리 검정 상하의에 빨강, 파랑, 녹색 띠를 허리에 두른 군무진 의상, 열정에 비해 투박한 군무진의 춤 등은 춤적 미감을 상쇄시켰다.
춤에 있어, 상당한 미적 이미지들은 자본에 봉사한 지 오래다. 군무진의 투박함은 열정이 있는 한 곧 현란하고 섬세한 춤으로 이들을 성장시킬 것이나 형편없는 지원금(7백만 원)은 일종의 난폭함이다. 결코 개인의 열정만으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없는 춤 현실의 안타까움이고 쓸쓸함이다.
서상재 ART FACTORY 〈선을 넘다〉 ⓒ옥상훈 |
춤추는 이가 익숙한 춤형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춤에 대한 자신의 직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춤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무자(서상재)는 이른바 새로운 기류를 형성한다는 엠제트(MZ) 세대다. 무대 설치물을 보자기로 싸(덮)는 설치미술의 요소를 가져오는가 하면, 익숙한 춤에서 가볍게 벗어나면서도 ‘이렇게 추어도 될까?’에 대한 고민은 시쳇말로 1도 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만의 춤 어휘로 춤의 한계에 서 보려는 것이며, 또한 한계를 의식하지 않기에 춤으로 무시로 선을 넘는 것일 터. 춤으로 선을 넘는 춤은 춤으로 말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것이 새로운 춤의 기류건, 또 다른 가치건.
특히 겹겹으로 싼 선과 경계, 색동 한삼은 서상재가 가진 춤의 유전적 조건 속에서, 한국춤이 되게 하는 춤. 이 춤 풍토의 조건 속에서, 춤현실의 논리 위로, 한국춤이 주체고 권력인 춤의 논리 위로 서상재가 경계를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희망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희망이 발전하면 세계적인 것이 된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