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모다페 인 대구(MODAFE in DAWGU)’(4월27일~5월1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창단 40주년을 맞은 대구시립무용단의 축제 슬로건이다. 같이 40주년을 맞은 모다페(국제현대무용제)의 ‘베스트 컬렉션’ 다섯 작품과 대구시립무용단의 세 작품을 포함하여 총 여덟 편, 그리고 지역의 신진들 열 명의 작품을 소극장 무대에 올렸다. ‘의미’와 ‘잔치’에 역점을 두었다는 축제의 취지를 따르기엔 역부족인 행사로, 대구시립무용단의 행보(작품)에 따른 실망스러움을 완화시켜주지 못하였다.
첫날 Karts Dance company의 〈tHE bAD〉(안무: 호페쉬 쉑터), 블루댄스씨어터의 〈The song〉(안무: 김보라), 대구시립무용단의 〈월훈〉(月暈)(안무: 김성용)이 올랐고, 이튿날 엠비규어댄스컴퍼니 〈바디콘서트〉(안무: 김보람)와 툇마루무용단의 〈해변의 남자〉(안무: 최청자), 밀물현대무용단의 〈Reboot: 출발점 위에 서다2.0〉(안무: 박관정), 대구시립무용단 〈shot〉(안무:이준욱). 그리고 마지막 날, 대구시립무용단의 정기공연 〈존재; The stage〉(안무: 김성용).
사흘에 걸쳐 무대에 오른 여덟 편의 작품은 볼 만하지 않거나, 그나마 볼 만한 것도 춤 이미지의 나열과 그것조차 짧게 편집된 춤이었다. 잔치는 어떤 ‘의미’를 어떻게 담아내느냐가 중요하다. 40년 역사의 의미를 온전하게 녹여내지 못한, 이름만 무색한 잔치였다.
궁금했다. 모다페의 40년 역사가 축적된 컨텐츠 작품은 무대에 올랐는데 대구시립무용단 40년의 역사를 대표할 작품을 볼 수 없었던 이유가. 모다페 수준에 준하는 대구시립무용단 40년의 역사를 대표할 작품이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초대 예술감독(김기전)의 재직기간(10년)을 제외한 2대 구본숙, 3대 안은미, 4대 최두혁, 5대 박현옥, 6대 홍승엽 그리고 7대 김성용감독에 이르기까지 작품은 물론 무용단의 발전과 주춤거림까지 지켜봤다. 좋은 작품들이 있다. 그렇다면 40주년에 부친 예술감독(김성용)의 “앞선 여섯 분(예술감독)의 노고와 역사의 무게”를 생각한다는 인사말은 단지 주어진 세계의 권력에 대한 예절 바른, 다시 말해서 전략적인 겸손(복종?)에 불과한 것인가. 혹 베스트 컬렉션 Ⅰ,Ⅱ라 이름 붙인 자신의 작품 〈월훈(月暈)〉과 단원 이준욱의 〈shot〉이 40년 대구시립무용단의 대표 축적물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설마, 그럴 리가.
대구시립무용단 〈월훈〉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
잠깐 〈월훈〉(月暈)을 보자. 김성용은 “칠흑 속에서 만난” 그 “달은 물기 가득한 그 속으로 나를 머금고 흐르기 시작했고 나의 생각도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안무 노트(상념)를 그대로 춤으로 옮겨놓았다. 상의를 벗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시작, 달을 띄워놓은 어둑한 무대, 도포 같은 의상에 부채, 가야금 선율을 타고 남녀의 춤이 엉겨 30여분을 무대에서 이리저리 흐른다. 가야금(성금연 연주의 ‘눈물이 진주라면’) 선율은 더없이 아름답고 색채가 영롱하건만. 춤은 어찌 저토록 취기어린 ‘상념’같이 무대를 배회하는지. 여자의 소맷자락을 잡아 늘이며 놀이하듯 추는 춤의 끈적거림, 무슨 법칙처럼 남자의 어깨에 올라앉은 여자의 푸석한 긴장미로 춤은 달이 지녔을 유인력의 긴장은커녕 신파가 된다. 작품의 힘을 믿고(믿지 못하기에) 거기에 완전히 몸을 맡기려 하지 않은 몇 무용수의 춤은 언급하지 않겠다. 〈월훈〉(月暈)은 안무자(김성용)의 상념의 허술함과 그 흔들거림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춤추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인지도. 그에게는 이 움직임이야말로 “지금 내 삶 안에 담아낸” 흔들리지 않는 춤의 창조적 영감이고 계시라 스스로 조작하는, 또는 그 정황을 조작하는 낡은 형식의 상념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월훈〉(月暈)을 본 뒤 이런 의문이 더 깊어졌다.
어쩌면 대구 ‘Spark Place’와 서울 모다페 무대를 서로 품앗이(라고 하자)한 건지도. 맞다면 지방 젊은 작가들을 위한 예술감독의 그 눈물겨운 노력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바꿔 말하면 교환할 무대가 없는 지방의 젊은 작가들은 서울 무대에 서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교환해서 설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이라면 교환할 무대가 없어도 설 수 있는 자격과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나? 아무튼 역대 감독들의 역사와 그 노고에 대한 치하는 그들의 작품 사진 두 컷씩을 팸플릿 두 쪽에 궁색하게 나눠 싣는 것으로 대신한 듯하다.
팸플릿은 대구시립무용단의 모든 역사와 춤 환경이, 거기 부여했던 의미들이 여기저기에서 끼어 들어와 부산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모든 말들을 소모하는 글들로 어지러웠다. ‘전통과 실력’을 갖춘 ‘독보적 단체’라는 상찬과 김성용감독의 기획력을 치하하는 글, 근사한 미래의 전망과 그 약속들로 넘쳐난다. 물론 40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단체라는 맥락에서 글을 이해할 수 있으나 역사를 발판으로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저절로 그렇게 되고, 팸플릿을 보는 이들이 그 내용을 모두 믿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지.
대구시립무용단 〈존재〉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
마지막 날, 대구시립의 정기공연 〈존재: The stage〉 무대를 보자. 지난해(2020) 스크린으로 상영했던 댄스필름 〈존재; 더 무비〉를 그대로 다시 무대에 올렸다. 춤의 “본질을 드러내는 기본요소” “복잡한 사회를 극대화시킨 단순한 구성” “개인을 주목하듯 춤의 기본을 들여다” 본 것이라고.
춤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춤의 기술적 형식적 측면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기본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여러모로 낡은 춤에서 춤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기본 춤을 가지고 연습을 하는 것은 춤이 가진 예술성의 잠재와 움직임의 제약의 실험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춤 언어에 잠재된 가능성 일체를 흔들어 깨우고 활성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감행한 일련의 실험이었다면, 특히 다양한 제약의 춤 언어의 창작을 통해 실험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그런데 〈존재: The stage〉는 늘 보던 동작을 무용수와 숫자와 구도만 달리하는 형태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것으로, 춤동작의 제약에서 오는 실험도 아니고, 잠재의 실현을 구현하는 작품은 더욱 아니었다. 적어도 춤의 잠재성을 모든 방향으로 밀어붙이며 그렇게 춤의 형식들을 고안해 내는 작업이었어야 한다. 말하자면 춤은 차이에 의해 분할되고, 반복에 의해서 끝임 없이 변주와 실험을 향해 열려있어,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무한한 텍스트여야 한다.
대구시립무용단 〈존재〉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
다시 말하면 〈존재: The stage〉의 전 작업은 지난 해 작업한 댄스필름 〈존재: The stage〉다. 〈존재; 더 무비〉는 ‘존재: The stage’ 춤을 단순하게 기록한 영상이다.
이 영상물을 언급하기 위해 필름 〈피나 Pina,2011〉의 소환은 차치하고, 국립현대무용단의 〈비욘드 블랙〉과 비교해도 다소 실망스런 결과물이었다. 이 영상을 문화예술회관에 관객들을 불러놓고 다시 상영을 했다. 이러한 작업을 두고 예술감독(김성용)은 “그것이 우리(시립무용단)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대구시립무용단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무용단의 ‘가치’와 ‘존재 이유’가 영상작업에 담겨 있으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존재: The stage〉는 영상미도, 춤 에너지도 보이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냥 무대에 춤을 올리면 될 일이었다.
또 하나,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겠다는 명목 하에 기획한 지난 해 11월 대구시립무용단이 대구MBC와 공동 제작한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참고로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은 1,008석이다. 대구MBC 영상팀과 공동제작이라는 특혜, 전 세계로 송출한다는 요란한 홍보. 결과는 500회 미만의 조회 수와 시민들에게 위로는커녕 그들(무용단)의 세계에 한껏 취해있다는 인상만 남긴 기획으로 끝났다. 지난해 〈존재: The stage〉 스크린 작업과 극장상영의 부정적 평가. 이에 아랑곳도 않고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의 프로젝트. 그리고 지난해 작품 〈존재: The stage〉를 〈존재: The stage〉로 또다시 정기공연 무대에 올린 것. 과연 이러한 일련의 작업 등을 들어 춤의 ‘현장성과 시간성’의 특징을 잘 살린 기획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대구시립무용단 〈shot〉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
대구시립무용단은 예술감독 개인과 단원들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가 아니다. 책임지기. 취기와(그것이 알코올에서 비롯되었건 오만함에서 비롯되었건) 객기가 아니라 이 책임지기가 예술가가 사는 일의 깊은 속내를 온전하게 받들고, 느리지만 단단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춤계를 바꾸어간다.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은 한국현대춤이라는 모자이크의 큰 조각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빛나는 큰 조각이 자신들만의 세상에 갇혀있는 이 단체 구성원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과 예술감독의 옅은 불안감으로 빛이 바래고 있다.
생각해보면 변화와 생성이라는 키워드로 덮지 못할 것은 없다. 현실의 고단함과 외로움이, 그리고 내가 한 말이 경계를 지우는 곳에서 나의 자아는 타자가되고 공적 자아가 된다.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고,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제 춤적 실천에 절대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실천이 불가능한 요구다. 그런데 이를 실천해내는 무용가도 있다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 개인의 원망에서 비롯되지 않는, 세상의 한 불행한 테마를 실현하는 대응 능력을, 그 지켜내기의 힘겨움을 춤으로 기꺼이 실현해내는 무용가를 안다. 그것이 인간의 위의(爲義)이며, 예술가다.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이들이 예술을, 이 세상을, 춤판을 조금씩 바꾼다. 그런 이들도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춤도 형식도 제각각인 실험들이 이어지고 있고, 그것이 21세기 춤을 읽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 범람하는 춤 이미지의 시대는 이미 가고 있는 중이다. 움직임의 기능에 집착한 나머지 춤의 정신과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한,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 이들 단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존재)은 무엇(누구)일까? 궁금하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