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을들의 세계를 정동의 사회학으로 비추다
비닐 질감의 그것을 백 혹은 자루, 푸대, 또는 뭐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속에 시신이 들은 그것 말이다. 주로 TV 뉴스 화면에 등장하곤 하는 그것의 정체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가. 검색창에서는 주로 시신백이라 하고 개당 얼마에 판매한다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 누구든 기피할 그 물건들은 정석순의 〈챌린저스〉 맨앞에 등장한다. 〈챌린저스〉는 단적으로 이 시대 이 공간에서 숨죽여 살아가야 하는 약자들이 자신들의 죽음에 맞서는(챌린지) 드라마를 그렸다(5월 5~6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정석순 〈챌린저스〉 ⓒ김채현 |
〈챌린저스〉에서 기승전결 투의 이야기는 묘사되지 않는다. 죽는 이(안남근 역)가 있고 그 죽음을 목격하는 자(정석순 역)가 있으며 죽음을 겪었거나 죽음에 직면한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 공연 시작 막이 오르자마자 시신백들을 끌고나와 그것을 풀고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그 순간들은 국내 춤 공연 관행의 상식을 건너뛰는 그 만큼 단도직입적이며, 앞으로 벌어질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진즉 예고한다.
동작에 에너지가 넘쳐 흐르고 캐주얼한 차림새인 그들은 단번에 청년 세대로 인지된다. 여성은 베이지 원피스, 남성은 검정 바지와 연회색 셔츠를 걸쳤으나 공연에서 성별 구분 없이 그들은 모두 앞서 언급된 그런 공동 운명의 사람들로서 일사불란한 집단 행동을 쉼없이 반복한다. 사람들은 격한 움직임과 가쁘게 숨넘어 가는 모습을 한꺼번에 드러내며 쓰러지기 일쑤다. 그 사람들은 지금 시중에서 말하는 이른바 을(乙)들일 것이며, 갑이라 해도 을의 운명이 상시적으로 그림자처럼 어른대는 그런 이들이다.
정석순 〈챌린저스〉 ⓒ김채현 |
공연 초반부터 쓰러진 무리 속에서 죽는 사람으로 특정되는 안남근의 그 순간을 정석순이 함께하는 것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는 안남근의 동작을 그대로 미러링하며 목격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어떤 의지를 몸으로 펼쳐보였다. 연기하는 두 사람의 단짝을 흔히 버디라 칭하곤 하겠지만 이 순간 정석순은 다정한 버디가 아니라 모종의 증언자가 되겠다는 결의로 가득차 있었다. 안남근의 몸짓은 널리 알려진 대로 평소처럼 미사일과 박격포 같은 고강도의 폭발성을 담았고, 이번에는 어떤 참담함과 결이 맞닿아 있었다. 두 사람 이외의 사람들은 시종일관 집단으로 움직여나간다.
정석순 〈챌린저스〉 ⓒ김채현 |
출연한 사람들 모두에게서 격한 움직임과 숨이 가쁜 모습은 격렬을 넘어 극렬하였다고 말해 과장이 아니라 본다. 각자의 에너지를 최대한 발휘해서 펼치는 그들의 움직임은 질주와 낙하를 때때로 왕래하는 가운데 스타카토 풍의 단절과 강한 스트레치를 덧붙이며 극점에 도달하곤 하였다. 이를 진폭이 큰 음향 그리고 코러스의 강렬한 허밍과 메탈 음향이 자주 뒷받침하면서 정서가 액셀레이트되고 객석의 호응을 자연스럽게 끌어내었다. 격한 움직임과 수시로 몰아치는 숨가쁨을 동반하는 사람들의 몸 양태들에서, 그리고 시신백이 수차례 등장하면서 우리는 그들이 삶의 코너에 몰렸다는 것을 직감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굳이 이렇게 언급할 이유를 댈 것도 없이 대표적으로는 노동 현장이 나날의 재난 현장이 된 세상에서 그만한 절규와 아우성, 외침도 일상이 되어 〈챌린저스〉 무대에 십분 반영되었다. 헤비메탈 음향과 더불어 찢어지는 비명과 고함이 잦고, 기진맥진하다 비틀대며 몸을 끌면서도 간혹 처연하게 전진하는 그들의 몸은 공연 제목처럼 열정과 도전이 무색한 삶을 그냥 그대로 감수하지 않겠다는 모종의 결기를 완강하게 표출하였다.
정석순 〈챌린저스〉 ⓒ김채현 |
최근 무대들 가운데 〈챌린저스〉는 극렬과 격정의 정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손꼽힐 터이다. 이를 바탕으로 담백하며 집중적인 대목을 여럿 설정하는 전개 구도를 통해 작품은 강도를 높여나갔다. 여기서 더욱 주시할 바는 그런 극렬과 격정의 이유를 우리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챌린저스〉가 우리 시대, 우리 세상의 드라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겠으나 작품에서 그것을 시사하는 구체성이 누락된 것은 아쉬운 점이어서, 이에 덧붙여 작품 속의 각 동향이 특정한 동향임을 어느 정도는 구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챌린저스〉가 근래들어 갈수록 청년 세대의 열정과 도전을 성원하기는커녕 손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가는 우리 세상을 향한 준열한 경고장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통찰할 계기를 가졌음 직하다.
정석순 〈챌린저스〉 ⓒ김채현 |
정석순은 10여년 전부터 엠극장 등지에서 〈For You〉 〈For Whom〉 등 소품 공연작을 통해 스타카토 풍의 움직임 운영으로 자기 특유의 스타일을 내놓았다. 그것이 오늘날 소리 없는 재난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념의 뜻으로 진화하는 모습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챌린저스〉는 2019년도의 15분 길이 공연작에서 지난해 서울무용제를 거쳐 이번에 또 다시 개작을 거쳤다. 이번 무대에서는 시신백 말고 일체의 장치 없이 몸과 음향만으로 공연을 풀어나갔다.
〈챌린저스〉에서 안남근은 현실에서 죽고 이승에 다시 부활하며 구원천사처럼 더 이상의 죽음을 자기 몸으로 막고 저항하는 다면적인 역할을 맡았다. 안남근이 더 이상의 죽음을 막으려 이승에 부활한 모습을 보며 드는 생각은, 산자가 죽은 이를 걱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죽은 이가 산자를 걱정해야 하는가. 이 거꾸로 뒤집힌 세상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챌린저스〉 종지부에서 사람들은 편곡 〈Sigara〉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서 서로 위로와 위무와 안위와 염려를 나누고 묻는 절차로서 접촉과 팔짱 끼기와 포옹을 행한다. 공연에서 안남근 역할은 표본으로서 안무자는 사실상 출연진 전원이 안남근과 같은 역할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정석순 〈챌린저스〉 ⓒ김채현 |
작품 전반에 걸쳐 안무자는 죽은 이들을 담은 시신백을 끌어와 다시 무대에 세워서 그들의 움직임과 몸짓, 외침을 재연하였다. 무대 위 사람들은 눌려 스러진 자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절절한 마음과 정서를 모아 그들을 대변하는 외침을 반복하였다. 이런 점을 다시 곱씹어 보면, 〈챌린저스〉에서 죽은 이와 살은 이는 사실상 구분되지 않아서, 세상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세상으로 고발된다. 〈챌린저스〉가 묘사해서 전하려는 바는 절실해 보이며, 그것은 재난으로 스러진 사람들을 위한 추도사로도 읽힐 수 있다. 한 마디로 〈챌린저스〉는 이 시대 (을들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관통하는) 정동(情動)의 사회학에 비유될 것이다.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