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나브로가슴에 〈히트앤런〉
느긋한 시선이 야구에서 찾아낸 것은
김채현_춤비평가

야구는 계산이다. 구속(球速, 야구공의 속도), 타율, 타점, 출루율, 장타율, 홈런 같은 계산된 실적에 기대는 싸움 아닌가.
 야구는 9회말 역전극이다. 그 순간 승자는 장쾌장렬(壯快壯烈)을, 패자는 비분비장(悲憤悲壯)을 금치 못할 것 아닌가. 야구 팬들에게 9회말 대역전 홈런은 야구의 꽃들 중에서도 꽃이다.
 당신에게 야구는 무엇인가?
 안지형에게 야구는 인생살이의 축도(縮圖)이다. 야구든 다른 스포츠든 프로 경기는 특히 선수 개개인의 사회집단적 위상이나 정체성과 직결되므로 저마다 나름 실존적이다(아마들의 경기는 실존의 강도가 훨씬 떨어진다). 춤단체 시나브로가슴에(자기들 스스로 ‘시가’라 줄여 말한다) 안무자 안지형은 〈히트 앤 런〉의 끝을 홈인으로 장식하였다. 여기서 안지형은 야구를 삶의 각축장으로 확대해 보인다. 실존적이기 마련인 스포츠 경기에서 삶의 단서를 찾아내는 대중문화와 예술은 흔한 편인 데 비해 왠지 우리 춤 분야에서는 그렇지 않다.
 창작산실 선정작 〈히트 앤 런〉(4월 8~10일, 대학로예술극장)의 야구에서는 배트와 글로브도, 1회전 2회전 같은 이닝 구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인조잔디의 툭 트인 녹색 구장 주변의 덕아웃 벤치, 2개의 조명탑, 오른쪽 하수 모퉁이의 홈플레이트가 야구장을 구성하고, 구장 좌우 양편에 파울라인과 스리피트라인이 흰색으로 그어져 있다. 그리고 8명 출연자가 걸친 하얀색 야구복은 정비사들의 날렵한 작업복과 흡사하다.








시나브로가슴에 〈히트앤런〉 ⓒ김채현




 〈히트 앤 런〉에서 안무자가 맨먼저 등장시킨 것은 투수의 모습이었다. 투구하기 직전 갖은 지략을 짜내거나 감독과 사인을 은밀히 주고받을 동안 멀거니 선 투수의 그런 모습이다. 안무자는 오로지 이 모습만을 주제로 삼는 광경을 공연 초입부에 근 10분 동안 설정하였다. 한 사람의 출연자가 홈 앞에서 멀거니 서서 앞을 정시할 동안 다른 출연자가 반대편에서 등장하여 그를 정시하고 또 다른 출연자들이 하나하나씩 가세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팀을 이루어 어느덧 쌍방 간에 무언의 기세(氣勢) 시합이 연출된다.
 각 팀이 한자리에 머물며 취하는 자세는 첫 출연자의 그것과 동일하며, 잔잔한 타악에 맞춰 약간씩 함께 일렁이는 그 사이에 객석은 어느덧 관람석이 된다. 야구에 가장 충실한 자세일 터이나 도리어 움직임으로서는 어쩌면 가장 메말라 보일 투수의 그런 자세를 전(
轉有​)하고 반복하는 데서 〈히트 앤 런〉은 결과적으로 든든한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시나브로가슴에 〈히트앤런〉 ⓒ김채현




 둘로 나눠진 팀은 서로 서서히 근접하여 마침내 한 무리를 이룬다. 투구, 배팅, 출루, 도루, 터치, 슬라이딩 등속과 같은 야구 선수들의 행동들이 후속 장면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유된다. 여기서 각각의 행동들은 슬로모션에서처럼 느릿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행해진다. 서로들 사이에 간격이 없다시피 한 이 무리의 동작들은 언필칭 미니멀적이고, 동형의 동작들은 그런 양상으로 집단적으로 행해지며, 바로 그런 때문에 동작들이 제각각 줌인되는 효과는 강력하다.
 이미 팀 구분이 사라졌고 동류의 한 무리 속에서 갖가지 동작들이 전개되는 이제 야구장은 삶의 각축장이 될 것이었다. 삶에서의 다툼을 대하는 안무자의 시선이 어떠한지 그 양상을 얼마간 세밀히 들여다 보아야 겠다.










시나브로가슴에 〈히트앤런〉 ⓒ김채현




 낮은 타악과 외마디 소리들이 배경 효과음으로 한없이 반복되며 들리는 가운데 그들은 앞서 말한 동작들을 전개한다. 기승전결과 캐릭터가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 관람자의 시선이 동작들로 쏠리는 것은 퍽 자연스럽다. 그린필드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리저리 섞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함께 위치를 이동해가며 마치 줌인하듯 보여주는 투구, 배팅, 출루, 도루, 터치, 슬라이딩 부류의 동작들은 아주 절제된 탓에 긴장감이 역력하고 야구에서처럼 계산과 지략을 깔은 듯한 인상을 던진다. 이어 한동안 전신을 뒹굴은 그들은 모두 벤치로 나가서 땀닦기, 물마시기 등 야구 선수들의 덕아웃 현장 모습을 재연하였다.






시나브로가슴에 〈히트앤런〉 ⓒ김채현




 새 이닝이 시작된 듯이 다시 등판한 그들은 앞서와 엇비슷한 톤의 집단 동작을 지속한다. 이 부분에서는 앉은 상대방의 어깨나 몸통에 내 몸을 앉히기, 상대방 어깨에 내 손 얹기, 바닥에 숙여 손짚기, 서로 간의 팔당기기, 서 있는 상대방의 다리 둘레를 누운 내 몸으로 감싸기와 같은 밀착 동작들이 추가된다. 여기서 두 사람씩 퇴장하는 순간이 두 번 있으나 그 퇴장 사유는 명확치 않다.
 이렇게 남은 네 사람은 육상 스프린터처럼 출발 대기 자세를 잠시 취해서 서로 경쟁 관계임을 암시하며, 그중의 한 사람이 서 있는 상대방들의 다리 둘레를 누운 내 몸으로 감싸는 동작을 수차례 반복한다. 그런 끝에 한 사람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걸어가면 한 사람은 바닥에 엎드려서 그 사람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려가서 둘은 마침내 홈플레이트에 도착, 홈인!한다. 엎드린 자세로 끌려가 홈인한 사람은 엎드린 그 자세로 홈플레이트에 양손을 짚은 모습을 한참 보인다. 엉거주춤 겨우 일어나서 홈플레이트를 밟은 그가 멀리 있는 상대 투수를 마주 보면서 두 사람이 기싸움을 벌이는 듯이 아니면 공허한 싸움을 왜 벌이느냐는 듯이 한동안 그 자세를 고수한 상태에서 무대는 암전된다.










시나브로가슴에 〈히트앤런〉 ⓒ김채현




 〈히트 앤 런〉에서 삶의 각축전은 잔상처럼 연결되는 무수한 이미지들로 묘사된다. 거기서 느껴질 구체적 의미들은 일단 관객의 수용 관점에 내맡겨지는 편이다. 이미지들이 많고 스토리나 캐릭터의 배역이 희미할수록 관객의 수용 관점과 해석이 일률적이지 않고 사실상 유동적이게 되는 정도는 높아간다. 그렇더라도 부드러우며 유연한 동작들은 삶의 각축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정서를 그와 유사한 범위 내로 한정할 것이다. 일례로 앞 사람을 붙잡고서는 아마도 훼방놓는 모습에서마저 〈히트 앤 런〉의 사람들은 퍽 젠틀해 보인다. 오늘의 세태에 비해 무대 위 그 사람들이 지나치게 젠틀해 보였다면, 그 대안을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히트 앤 런〉은 느긋한 전개를 통해 특징적인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공연에서 동작들은 몇 가지 패턴으로 분류될 만큼 단순하게 느껴질지 모르고, 앞서 누누이 묘사되었듯이 야구의 상징적인 순간과 포즈가 지겨울 정도로 반복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히트 앤 런〉은 오히려 야구를 벗어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삶과의 접점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평자의 판단이다. 이 같은 안무 경향이 우리 춤계에서 매우 드문 편이라는 해묵은 상식을 넘어 말하고 싶은 점으로서 서둘지 않는 구성 전략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고집스러움이 없으면 이런 공연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환기되어야 하겠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히트 앤 런〉이 삶을 대하는 시선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성공과 실패가 가로놓인 애매한 현실 속에서 어느 존재가 천신만고 끝에 역전만루 홈인하지만, 그가 상대방을 다시 응시하는 마지막 모습은 현실과 삶이 여전히 녹녹지 않다는 안무자의 관점을 다시 말해주는 대목으로 받아들여진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

2021. 5.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