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자(死者)의 서〉라는 죽음에 관한 경전이 있다. 약 1500년 전 티베트 구루 빠드마쌈바와가 지은 경전. 사람들은 불교 관념에 따라 49재 동안 사자를 좋은 곳으로 천도하기 위해 재를 올린다. 49재 기간은 사자에게 일종의 갈림길이다. 49재라는 죽음의 세계 이후 사자가 해탈을 이루도록 소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로되 꼭 소망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경전은 사자가 유랑과 윤회의 고리를 끊고 중음을 벗어나 곧바로 해탈할 길을 열어 보인다. 〈사자의 서〉는 죽음을 둘러싼 상상록(想像錄, 또는 실제 체험록)으로서 무겁다. 그래도 해탈을 강조하며 심지어 생시의 수행이 없어도 49재 동안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지침서로서 〈사자의 서〉에 동감하는 이가 적지 않다.
국립무용단의 공연 〈사자의 서〉(국립극장 해오름극장, 4. 25~27.)는 이 경전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우선 경전 〈사자의 서〉를 더러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연은 시작 전부터 관심을 끌었다. 국립무용단의 지난 10여년 사이의 여느 공연작들에 비해 〈사자의 서〉는 넓은 시야를 드러내었고 공감대를 꾀하는 무대 전개에도 꽤 적극적이었다.
공연작 〈사자의 서〉는 3장으로 구성된다. 1장 ‘의식의 바다’에서 망자의 살아 생전의 감정들과 함께 망자들의 불안감과 황망함이 표현된다. 2장 ‘상념의 바다’는 망자가 이승의 삶을 떠올리고 되새기는 모습들을 펼쳐낸다. 3장 ‘고요의 바다’에서 망자는 이승에서의 집착과 욕망을 거둬들이고 이승을 하직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체 구성으로 미루어 티베트 경전 〈사자의 서〉는 공연에 대해 부분적 단서에 머물렀으며 공연작 〈사자의 서〉와 티베트 경전 〈사자의 서〉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편이다. 공연작의 사전 소개에 의하면, 몇 해 전 어느 대만 작가의 전시회였던 〈바르도〉(바르도: 망자가 49일 동안 머무는 세계나 시간)에서 타다 남은 재로 바닥을 채우고 경전 〈사자의 서〉를 낭송하는 데서 안무자는 공연을 착상하였다고 밝혔다.
국립무용단 〈사자의 서〉 ⓒ국립극장 |
〈사자의 서〉 공연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연 전부터 천장에 높이 내걸린 망자들의 연한 황토색감의 수의들이고 그 아래에서 여남은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서 다듬이나 타악기를 낮게 두들기고 있었다. 그들 모두 소복과 고깔을 착용하여 죽음의 의식이 장려하게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였다. 공연 중에도 고깔과 소복 차림의 집단무가 등장한다. 그리고 바르도의 세계가 펼쳐질 무대는 대형의 구조물이 무대의 3면을 에워싸는 벽체의 모양으로 구축되었다. 이들 대형 벽체 형태는 부대 장식을 배제하고 옅은 단색조로 처리되어 미니멀한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죽음을 주로 검정색 계통으로 연상하는 관념은 여기서 파기된다. 지난 몇 해 국립무용단의 공연 무대에서 유사한 모습을 종종 드러낸 바 있는 형태의 대형 벽체는 이번엔 스펙터클 효과를 배가시켰다.
망자가 49일 동안 머문다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거기는 윤회와 해탈이 판가름나는 갈림길이 놓여 있어서 실은 유동적이다. 더욱이 각자 이승에서 범한 탐진치(貪瞋痴)나 쌓은 공덕이 낱낱이 고해질 수밖에 없고 판결이 개입하므로 어떤 면에서는 긴장되며 치열한 세계라 상상되지 않는가.
그처럼 저승 가는 길이 적막하지도 평탄하지도 않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이 공연작 〈사자의 서〉는 빠르게 변하는 춤 이미지와 구도들을 구현하였다. 망자와 망자의 연인, 회상 속 망자와 회상 속 망자의 연인과 같이 더블 캐스팅하여 사자(死者)의 복합적인 상황에 방점을 찍으면서도 크고 작은 규모의 군무 대형들이 공연을 끌어간다. 안무자가 염두에 둔 망자의 집착, 욕망, 부정, 분노, 황망, 체념 같은 정서들은 단일한 개개의 정서가 아니라 서로 엉켜들은 복합적인 정서로 표출되었다. 특히 출연진들은 그간 국립무용단이 축적한 단단하고도 예리한 움직임을 순발력 있게 펼쳐나감으로써 정서의 표출에 잦은 변화를 주었다.
국립무용단 〈사자의 서〉 ⓒ국립극장 |
1장에서 망자를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바닥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동작이 종종몰이로 상승함으로써 조성되는 효과는 다면적이며, 음향 측면에서 그것은 무채색조로 들려온다. 또한 이번 공연에 쓰인 김재덕의 음향은 둔중한 사운드가 화려함을 배제하고 규칙적으로 흐르면서 부드러운 타악의 음색을 표출하여 죽음의 세계를 다소 경건한 상태에서 긴박하게 접속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연에서는 우리 전통의 장례 풍속을 응용한 부분도 더러 삽입되었다. 예로서, 1장에서 고깔과 소복 차림의 집단이 막대기를 아래위로 휘저으며 이동하는 것은 장례 행렬에 해당할 터이고, 사람들이 발구르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매장 의식을 암시할 것이다. 공연의 서사를 용이하게 전달하는 장치로서 눈에 들어오는 대목들이다.
국립무용단 〈사자의 서〉 ⓒ국립극장 |
망자가 되는 그 순간부터 바르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은 망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겪을 실존이 걸린 일대 사건이다. 망자가 되기 전 살아 있을 동안 사람들이 경전 〈사자의 서〉를 탐독해서 바르도에서의 사건들을 미리 깨우친다면 일상의 삶을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가 있을 법하고, 공연작 〈사자의 서〉 또한 이런 비전을 지향한다. 그래서 공연작 〈사자의 서〉는 안무자에게도 관객에게도 일생일대의 사건이 될 법한데, 이런 점에 비추어 공연작 〈사자의 서〉에서는 크게 다음과 같은 과제가 남겨진 것으로 생각된다.
국립무용단 〈사자의 서〉 ⓒ국립극장 |
공연작 〈사자의 서〉에서는 바르도의 세계를 떠도는 망자의 모습이 이승에서의 욕망과 이승을 향한 미련을 축으로 전개되고 마침내 체념하고 저승을 향하는 것으로 형상화되었다. 그 저승이 극락일지 지옥일지가 공연에서 분별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경전 〈사자의 서〉는 바르도 세계를 거치며 해탈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비록 경전 〈사자의 서〉에 동감하지 않는 쪽도 거기서 논해지는 해탈의 가치만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어서, 이 경전은 마음을 끈다.
국립무용단 〈사자의 서〉 ⓒ국립극장 |
이런 측면에서 다시 보자면, 공연작 〈사자의 서〉와 경전 〈사자의 서〉 사이에는 작지 않은 간극이 발견된다. 극락과 지옥을 굳이 특정해서 공연의 서사를 펼쳐갈 일은 아니겠지만, 해탈의 기미는 암시될 필요가 있었다. 공연작 〈사자의 서〉는 세련된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죽음에 관해 밋밋하며 일반 관념을 맴도는 인상을 주었다. 욕망과 미련을 그려내는 정경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런 정경들이 나열되어서 죽음의 모습은 평면적이고 상식적이었다. 말하자면, 굳이 경전 〈사자의 서〉를 떠올리도록 하는 공연작이라 한다면 대표적으로는 해탈에 이르는 서사가 미흡하진 않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와 아울러 〈사자의 서〉에서도 뚜렷했던 순발력 있는 움직임들은 최근 몇 해 국립무용단의 간판처럼 떠오르는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해 정중동 유형의 춤의 미적 범주가 밀려나고 호흡이 얕아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런 면면들로 인하여 주역들의 날렵한 춤을 비롯 출연진들이 다양한 구성의 볼거리를 다수 제공하고 때때로 장려한 느낌을 유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작품과 작품 메시지의 중량감은 옅은 편이었다. 공연작 〈사자의 서〉가 경전 〈사자의 서〉를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전의 초점을 떠올려보면 공연의 서사에 해탈처럼 우선 또 다른 서사가 추가됨 직하고 그리하여 깊이도 더해질 것이라 본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