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툇마루무용단이 ‘맥’(脈)을 제목으로 최근 정기공연을 가졌다. 툇마루무용단이 동문 무용단으로 출발한 때가 1980년대 후반이니 이제 그 역사도 한 세대를 헤아린다. 같은 대학 출신 무용인들의 집단으로서 동문 무용단들이 우리 춤계에서 비단 툇마루무용단뿐 아니라 80년대와 90년대에 행한 역할이 실로 막중했다는 사실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2000년대 들어 무엇보다도 개인 창작을 위한 환경이 원활해지면서 동문 무용단들도 퇴조하는 추세였고, 지금껏 명맥을 잇는 동문 무용단은 모르긴 해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제는 동문 무용단이라는 호칭마저 무척 낯설다.
동문 무용단이든 아니든 공연과 창작을 뒷받침하도록 적합하면 존재 이유를 가질 것이다. 동문 무용단의 경우 창작 기회를 적당히 안배하는 관행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창조적 발상과 실험성이 낮아서 세월이 흐르면서 애당초의 결기를 상실한 채 이른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맹점이 없지 않았다. 요컨대 시대 정신과 공연 여건이 달라진 만큼 동문 무용단이 존속하려면 그만큼 내부 구조와 체질을 손질해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툇마루무용단은 2010년대에도 크고 작은 이벤트들에서 존재감을 견지해온 데 비해 이번 정기공연은 8년만의 일이다. 오랜 잠행 끝에 열은 이번 정기공연에서 이동하, 김규진, 김환희, 세 안무가가 작품을 내놓았다(서강대 메리홀, 2월 9~10일).
이동하 〈반복과 변주〉 ⓒ김채현 |
이동하의 〈반복과 변주〉는 〈볼레로〉 음악을 다른 감각으로 터치하였다. 11명의 출연진들은 일률적으로 하얀 캐주얼 의상을 갖추었고 움직임 또한 일사불란하였다. 춤에서 〈볼레로〉는 인간의 정염(情炎)을 묘사하거나 승화하는 데 활용되며, 그런 방식이 너무 잦다 보니 〈볼레로〉는 으레 그렇게 춤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고정관념마저 있지 싶다. 〈볼레로〉의 박제화라 부름 직한 이런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이동하는 다르게 해석해 보인다.
우선 그는 〈볼레로〉 박자의 규칙성을 바탕으로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인간 집단의 반복적인 움직임과 행보를 구현하는 데 활용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 무리들이 저돌적인 질주, 종종걸음, 퍼져 앉기, 바닥에 드러눕기 등의 움직임을 실행하도록 함으로써 〈볼레로〉에서 흔히 연상되곤 하는 젠더 구분을 뛰어넘는다.
〈반복과 변주〉에서 11명의 무용수들은 무대 바닥 전면을 쉴새 없이 누비고 다닌다. 조급한 강박증을 동반한 그들의 행태가 은유하듯이 구성원들이 시계 초침처럼 움직일 것을 강요하는 사회가 흔하다는 것은 오늘의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에 충실하여 안무자는 분주하면서도 숨막힐 것 같은 지금의 세태에 대해 한 마디로 직격탄을 가하였고, 그에게서 〈볼레로〉는 상식을 건너뛴 〈볼레로〉였다.
이동하 〈반복과 변주〉 ⓒ김채현 |
김규진은 〈산 것과 죽은 것 2〉에서 디지털 문명을 탐문한다. 스마트폰과 태블릿피시가 무대 앞 쪽에 도열해 있고 무대 오른쪽 상수와 하수에는 몸통 부분의 석고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같은 세상의 풍경을 배경으로 김규진은 디지털 문명을 진단한다.
밤색 계열의 레오타드를 착용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머리에 높은 상투를 틀어 어떤 요괴스런 아바타를 연상시킨다. 그들과 대조적인 두 사람은 동작이 불편해 보인다. 아바타들은 행동이 일률적이고 집단적이며 감정 표현은 배제되며, 이로 미루어 아마도 그들은 디지털(또는 기술) 문명에 흡수된 사람들일 것이다. 동작이 불편한 두 사람은 그 문명에 적응하지 못한 채 오히려 저항하는 탓에 불편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김규진 〈산 것과 죽은 것 2〉 ⓒ김채현 |
〈산 것과 죽은 것 2〉에서 아날로그 세계와 디지털 세계는 충돌한다. 디지털에 저항하는 그 사람도 결국 디지털 문명에 흡수되지만 그의 행동은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무대는 막을 내린다. 디지털 기기들에서 꽃이 피어오르는 장면들이 상징하는 가상 현실은 현실이기에 삶의 일부이다. 생과 사의 구분이 옅어지는 세상에 대해 김규진은 질문을 던진다. 오늘의 세상에서 오리무중 속을 방황하고 있기에 포스트휴먼의 실체는 답하기가 사실상 간단치 않다. 그렇더라도, 추후 작업에서 그가 무슨 해법을 내놓을지 관심사다.
김환희 〈결혼〉 ⓒ김채현 |
김환희는 오늘의 결혼 생태계를 〈결혼〉에 담았다. 무대 바닥 전체가 핑크색 꽃잎으로 뒤덮여진 분위기가 무색하게 안무자는 시종일관 경종을 울린다. 꽃 천지 속에 놓인 의자에 어느 여자가 반듯한 자세로 멍하니 앉아 있고 한 남자가 먼발치서 여자를 응시한다. 사람들이 한 사람씩 등장하여 그 여자 어깨에 손을 얹어 무덤덤하게 확인하고 퇴장하기를 계속한다.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으며 그 남자가 접근하자 매몰차게 의자를 들고 퇴장한다. 〈결혼〉의 이런 도입부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우리가 결혼의 갈등에 익숙한 때문일 것이다.
공연 말미에 유리볼에 담긴 물을 얼굴에 바르고 남성이 그 물로 여성의 발을 씻는 장면이 설정된다. 그 사이에 안무자는 결혼의 갈등을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으로 치환하면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빚어지는 여러 갈등의 양상을 환기하였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결혼〉은 핑크색 꽃 무대를 조성하여 결혼의 역설을 알렸다. 〈결혼〉의 냉랭한 스토리가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데 있어 탄츠테아터 식의 무대와 연출이 활용되었다. 탄츠테아터 양식을 추종할 것은 없지만 탄츠테어터 양식을 자기화하는 취지에서 〈결혼〉의 확대판을 고려해도 좋을 것 같다.
김환희 〈결혼〉 ⓒ김채현 |
이번 행사의 제목으로 택한 맥에 대해 주최 측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정체성과 욕망을 주제로 한다고 밝혔다. 해당 주제 아래 세 안무가는 위에서 보듯 오늘의 우리 세상 들여다보기를 제시하면서 현실감각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모두 신작인 세 작품은 제각각 개성이 뚜렷하여 이번 행사가 동문 무용단의 정기공연이라는 인상과는 꽤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춤계의 여느 그룹전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성과 느슨한 자유로움이 감지되는 정기공연이어서, 이런 성격의 동문전이라면 권장 목록에 오를 만하다고 본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