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도시 문명에서 암석은 파괴되어 제거되기 마련이며 또 돌은 다듬어지고 길들여져 그 실상이 감춰지기 예사다. 도시 문명의 콘크리트와 강철 문화 속 간혹 만나는 근사한 돌 조형물들 이면에서 일상적으로 우리가 구르는 돌, 차이는 돌, 이끼낀 돌...들을 접하는 순간은 얼마나 있을까. 돌을 향한 감성이 둔감해져 가는 오늘날의 경향을 벗어나 조재혁은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공연에서 돌을 춤 속으로 끌어들여 〈돌〉을 올렸다(2월 27~28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조재혁 〈돌〉 ⓒ김채현 |
〈돌〉은 돌에서 삶을 본다. 고래로 숱한 이들이 돌을 갖고 돌에 빗대어 삶을 말해 왔었고 돌은 인간의 피할 길 없는 영원한 아프리오리이다. 돌은 바스러져 흙이 되고, 때가 되면 인간은 흙으로 되돌아간다. 궁극에 인간은 돌과 하나가 된다. 〈돌〉에서 돌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자 분신이다.
어둠 속에서 열리는 〈돌〉 무대에는 포그가 운무처럼 자욱하다. 무대 전면 벽 가까이에 짙은 코발트 색조의 조명 광선들이 수직으로 길게 내려꽂힌다. 그 앞에서 둥근 트레킹햇에다 묵직한 느낌의 긴 코트를 걸친 여남은 사람들이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운 낮은 조도 속에서 아주 느긋이 서성인다. 그들이 서로 지나치거나 손짓을 하거나 손을 가볍게 맞잡거나 하는 포즈를 취할 동안 낮은 생황의 음에다 저음의 허밍이 섞인 반주음향이 고즈넉하니 들린다. 어둠 속 배회하는 그들은 순례자를 연상시키고 분위기는 꽤 아득하다.
그들은 천천히 사라지면서 여운을 남긴다. 그들은 무엇을 순례하려는 걸까. 이후 출연진들의 의상은 나염으로 물들인 가벼운 질감의 여러 가지 디자인들로 바뀐다. 순례자 같은 의상을 벗은 사람들은 순례를 멈추고 인생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순례자가 관찰하는 인생과 실제 겪어야 하는 인생은 차이가 크다.
조재혁 〈돌〉 ⓒ김채현 |
안무자는 돌의 이치, 즉 자연의 이치를 인간에다 대입하기를 의도하였다. 흙이 돌이 되고 돌이 흙이 되는 양상은 〈돌〉의 인간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모래처럼 저마다 점점이 흩어져 왕래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생명의 탄생, 인간 세상의 시원(始元)을 감지한다. 점차 고조되는 음향들은 다양한 음색으로 변주되며 그 크레센도의 기운이 높아갈수록 사람들 사이의 접촉과 소통도 빈번해진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만남과 이별, 애욕, 갈등, 희열, 번뇌를 은유하는 갖가지 몸짓의 움직임들을 그려나간다.
마침내 아비규환 같은 세상은 활화산처럼 어지러이 타오른다.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구도들의 집단무를 수행하는 그들은 춤에 몰입한 나머지 자멸의 나락에 떨어진다. 그 중 몇몇은 생존하나 세상살이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채 인간의 몰락을 속으로 삭이는 몸짓들을 보인다.
조재혁 〈돌〉 ⓒ김채현 |
이어지는 부분에서 무대는 정돈감을 되찾는다. 인간의 자기 회복 과정이라 칭함 직한 소재가 상당히 길게 지속된다. 여기서 이합집산의 구도와 상호접촉이 반복되면서 차츰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 뿔뿔이 정좌(定座)한다. 유동하는 자연의 섭리를 말하려는 듯 회전하는 무대에서 그들은 가부좌 자세로 내적 성찰에 빠져드는 듯하다. 서서히 일어서는 그들은 경련으로 몸을 정화시키는 의식에 접어들고 급기야 운무 속에서 엑스터시의 몸짓과 움직임으로 몰아적(沒我的) 해방감을 강렬하게 표출하며 객석을 동요시켰다.
이상으로 미루어 〈돌〉에서 주제는 욕망과 정화의 대조법이다. 안무자 조재혁은 이를 한 편의 서정적 서사시로 펼쳐보였다. 〈돌〉에서 관객이 환기받는 돌의 이미지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이었고 말하자면 폭이 넓었다. 이런 이유에서 오히려 돌의 이미지와 삶의 양상이 어느 방향으로든 압축되어 안무자의 시각을 보다 집약적으로 노출할 필요가 있었다. 〈돌〉에서 이야기되는 돌은 태초이자 영원인 돌이며, 그 돌을 무수한 무늬로 그려내는 움직임들은 미적 완성도가 높다. 한국무용 계열의 구태에 머물지 않은 현대적 감각을 바탕으로 정돈된 움직임들은 겹겹이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시하기에 족하였다. 춤꾼들이 간간이 큰 무리의 덩어리를 이루어 특히 상체 위주로 집단의 기를 발산하는 형상도 그에 속한다.
조재혁 〈돌〉 ⓒ김채현 |
〈돌〉 무대 오케스트라 피트에는 사각의 수조가 설치되었다. 수조에다 중간에 돌 하나를 떨어뜨리고 소량의 모래를 흩뜨리며 마지막에 출연자 한 사람이 그 속에서 신들린 몸짓을 보였다. 씻김과 순환을 상징하는 의미로 설정되었을 수조의 쓰임새는 약하였다. 그리고 무대 배경에 네트와 점들로 비춰진 유동하는 영상 이미지들이 돌과 모래를 상징하기에는 소박하여 아쉬움이 따랐다.
〈돌〉에서 설정되는 폭넓은 서사와 움직임들에 맞추어 잠비나이가 현장 연주한 음향은 퍽 매력적이다. 생황, 기타, 거문고, 드럼이 조합해내는 사운드들은 다채로운 양상으로 쌓여서 신중하게 축적되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다성음의 대목들이 수시로 개입하고 몇몇 굽이에서는 신들린 듯이 폭발하는 기세를 보였다. 아울러 생황의 싱싱한 음색은 여러 무대 상황을 흘러가듯이 물들이고 무대 위 그들은 물론 객석을 위무하는 효과도 있어 보였다.
조재혁 〈돌〉 ⓒ김채현 |
당초부터 〈돌〉은 한 편의 세련된 서정시를 염두에 두고 다듬어내어 공력을 들인 품이 완연해 보인다. 이런 류의 스펙터클을 평자는 근년의 춤계에서 오랜만에 만난 편이다. 한국무용의 재배치에 드는 유형의 과제를 미적 형상화에 방점을 찍어가며 풀어가는 흐름을 〈돌〉은 예시하였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