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안무가들에게도 흥미로운 소재이다. 중세 유럽의 전설로 전해져 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는 서사시로, 소설로, 영화로 만들어졌고, 바그너의 오페라로도 제작되어 공연 마니아들에게도 이미 친숙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을 소재로 한 발레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평자가 연상한 작품 규모는 장편 전막발레 아니면 주인공들의 캐릭터만을 차용한 소품이었다. 그러나 유장일발레단이 1월 9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평자 오후3시 관람)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중편이었다.
프로젝트발레단 체제로 운영되는 개인 발레단이 1천5백석이 넘는 대극장 무대에서, 55분 길이의 작품을 공연한다는 것은 평자에게는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크게 다가왔다.
컴퍼니나 안무가에 대한 신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시행하는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 선정 공연이란 담보를 제켜두더라도, 15명의 출연진이 등장하는 대극장용 작품 제작을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제작비가 소요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번 공연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은 2년 전 서울무용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제작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잘만하면 재공연을 통한 예술적 완성도의 배가라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장일발레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
안무가 유장일은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는 것보다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작품의 뼈대를 구성하고 최소화시킨 군무진들을 활용한 움직임으로 무대를 채웠다. 중편 길이의 컨템퍼러리발레 작품을 염두에 둔 작업이라면 이 같은 구도는 예견된 것이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무가와 제작진들은 평자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꽤 탄탄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컨템퍼러리발레 작품으로 평균점 이상의 수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과욕을 부리지 않은 프레임 설정과 극장예술의 여러 요소―음악, 조명, 의상, 무대미술을 양질로 버무린 점, 그리고 댄서들의 캐스팅에 기인한다.
안무가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분명한 캐릭터 설정과 이들을 중심으로 한 춤과 연기의 조합, 탄탄한 기량의 군무 무용수들을 통해 춤뿐만 아니라 장면의 이미지 구현을 위한 코러스로 활용했다. 컨템퍼러리발레 작업에서 중요한 음악(홍웅)은 작곡을 병행한 데다 5.1채널로 음원을 제작, 대극장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사운드로 극적 효과를 살려냈고, 조명(신호), 의상(송보화 진영진), 무대미술은 상호 시노그라피적인 효과로 이어지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유장일발레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
트리스탄이 백부(伯父)인 콜웰의 왕 마르크의 명령으로 아일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왕의 신부가 될 이졸데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오던 중 사랑의 묘약을 마시게 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고… 마르크와 이졸데의 결혼 후에도 두 사람은 사랑을 이어가고 이를 안 마르크 왕은 트리스탄에 대한 믿음과 질투로 갈등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을 지키고자 함께 생을 마감하고 마르크 왕도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용서한다. 두 연인이 숨을 거둔 장소에는 뿌리는 다르지만 서로 엉키면서 자라나는 연리지 나무가 피어난다.
이 같은 내용을 안무가는 크게 3개의 프레임 안에 녹여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앞뒤에 배치하고 여기에 트리스탄의 아버지를 등장시켜 많은 이야기들을 함축시켰다. 어린 트리스탄을 안은 아버지 역 손관중은, 프롤로그에서는 음산한 블루 조명과 에필로그에서는 작품을 통틀어 유일한 무대미술이었던 연리지나무에 힘입어 주인공 트리스탄에게 다가올 비극적 사랑과 아픔을 이겨낸 연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정제된 몸짓과 몰입감 높은 연기로 상징화시켰다.
유장일발레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
안무가는 작품의 중심은 트리스탄(허서명)과 이졸데(김민정), 그리고 마르크 왕(이재우) 세 명 주인공들의 춤과 연기로 풀어냈다. 이 메인 장면은 그것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 발레였다. 세 명 주인공들은 각각의 캐릭터를 탄탄한 춤과 연기로 무리 없이 소화해냈고, 특히 김민정은 사랑하는 이졸데와 남편이 된 마르크 왕 사이에서의 복잡한 심리를 깊은 내면 연기를 곁들여 온몸으로 그려냈다.
김민정과 허서명의 파드되는 클래식 발레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춤 구성의 평이함을 뛰어난 기량과 유연한 파트너십으로 지탱했다. 안무가는 마르크 왕과 이졸데의 2인무는 짧게 구성하는 대신 마르크왕의 솔로 춤에 더 비중을 두면서 그의 고뇌를 드라마로 표출해냈다. 크리스탄과 이졸데, 마르크왕의 밀착된 장면은 드라마를 살려내기 위한 안무가의 계산된 구도였다.
해마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만만치 않게 무대에 올리는 메이저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약하는 댄서들답게 김민정 이재우 허서명의 움직임은 선명한 캐릭터와 만나면서 더욱 그 빛을 발했다.
유장일발레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
여기에 다섯 명 남성과 다섯 명 여성 무용수들의 춤은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했다. 안무가는 10명 무용수들을 남녀 2인 대무(對舞)로, 남성 5인무로, 때론 여성 5인무로 다채롭게 구성하면서 2인무에서는 긴 팔과 다리를 강조하는 지체의 라인을, 춤 남성 군무에서는 역동성을, 여성 군무에서는 앙상블이 돋보이도록 엮어냈다.
10명 내외의 댄서들이 출연하는 컨템퍼러리발레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같은 시도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10명 무용수들의 기량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는 점은 여타 한국 안무가들의 작업과 분명히 차별화되었다. 댄서들의 군무는 점프 동작에서, 회전 동작 등에서 춤추는 몸 그 자체를 음미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안무가는 열 명 댄서들의 움직이는 몸을 장면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구현하는 코러스로 활용하는 연출력도 보여주었다.
유장일발레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
초반부에는 검정 톤으로, 후반부에는 백색 톤으로 장과의 연계를 시각적으로 표출한 의상과 블루 톤과 오렌지 색깔을 주조로 한 조명, 무대 전체를 상하로 점한 나무의 뿌리를 댄서들의 몸으로 엮어 연리지 나무를 표출한 마지막 장면은 강한 여운을 남겼다.
아쉬움도 있었다. 공연 장소가 대극장이 아니라 중극장 규모였다면 드라마 발레가 갖는 맛깔은 관객들에게 더욱 오롯이 전해졌을 것이다. 세 명 주인공을 둘러싼 시기와 질투, 욕망과 회환의 정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때론 처연하게 표출되었더라면 극적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을 것이다. 주인공들의 2인무 춤 구성이 그 차별성에서 더욱 도드라질 수 있다면, 3인 캐릭터의 갈등 구조가 팽팽한 긴장감을 담아내는 3인무로 짜여 질 수 있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유장일발레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
이번 공연 출연자들 중에는 해외 컴퍼니에서 활동했거나 지금도 하고 있는 무용수들, 국립발레단의 주역급 무용수들이 여럿 있다. 이들 무용수들이 프로젝트발레단으로 운영하는 컴퍼니의 창작 작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댄서들의 층을 두텁게 한 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번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은 재능 있는 안무가가 탄탄한 기량의 댄서들을 만날 수 있다면 대한민국에서도 경쟁력 있는 프로젝트발레단의 운영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장광열
1984년부터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기자, 편집장으로 20여 년 활동했다. 춤비평집 『변동과 전환』 ,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 등의 저서가 있으며, 서울국제즉흥춤축제 예술감독 등을 맡아 춤 현장과 소통하고 있다. 한예종·숙명여대 겸임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