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다. 탄생에서부터 인간은 온갖 관계를 맺는다. 학연·지연·혈연은 생존 과정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겠으나, 그것들은 자연스러운 인연(因緣)의 선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오용되기 일쑤여서 오랜 세월 비판받아왔다. 적폐 청산을 갈구하는 이 시대 정신에 오히려 역행하여 그 악용의 정도는 갈수록 심해지는 듯하다. 사회적으로 오용되는 인연을 대개들 연(緣)줄이라 해서 부정적으로 대한다. 가령 부모와 자식 간의 혈연을 연줄이라 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부모 찬스로서 사회의 공정성 등을 해치는 순간 연줄로 전락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컨대 도덕성의 여부가 인연과 연줄을 가르는 한 가지 기준이라 하겠다.
김남진의 〈라인〉은 연줄에 초점을 맞춘 신작이다(1월 15~16일, 일민미술관). 그는 2017년에 청년의 취업 포기를 다룬 〈무게〉를 발표한 바 있다. 〈무게〉는 여차하면 못난이로 따돌려 젊은층의 의욕을 꺾는 풍조를 건드렸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번의 〈라인〉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연줄 우선주의(혹은 절대주의?)를 정면으로 소환하였다. 이전에도 소개되었듯이, 김남진은 남북 분단, 환경 위기, 세상의 위선 등에 걸쳐 우리 세상을 비평해내는 퍽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해왔었고, 〈라인〉은 그 연속선상에 있다.
김남진 〈라인〉 ⓒ김채현 |
〈라인〉에서 전체 8명의 출연진은 대금연주자 1인, 발성 배우 1인, 서커스인 3인 그리고 춤꾼 3인으로 구성되었다. 관객과의 소통 면에서 배우, 서커스와 춤의 만남으로써 춤의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그의 의도를 짐작하게 된다. 〈라인〉은 5부로 진행되는 전체 가운데, 4부가 탯줄, 동아줄, 나일론줄, 새끼줄이라고 소제목들이 붙여진 대로 ‘(연)줄’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였다.
갤러리 입구의 넓지 않은 라운지에서 고즈넉한 대금 소리가 한동안 울려퍼지는 것으로 공연은 시작된다. 라운지의 천장 저 높이 매달린 붉은 천을 여성 퍼포머가 올라타서 에어리얼을 펼치는 부분은 생명의 탄생으로 가는 솔로 의례에 해당한다. 이 장면이 진행될 동안 미술관 바깥 쪽 인도에서 행인들이 구경하는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에어리얼 서커스에서 으레 연상하기 마련인 아슬아슬한 곡예를 과시하기보다는 여성 퍼포머는 공중의 천 속에 자기 몸을 가두어 넣어 그곳이 마치 자궁인 듯한 이미지를 연출하였다. 그 천에서 내려와 퍼포머는 천을 수차례 잡아당긴 후 다시 타고 올라가서 생명의 탄생을 마무리한다. 그림처럼 다가오는 다양한 공중 이미지는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됨 직하다. 이 부분의 끝자락에서 퍼포머가 하강하여 바닥에 쓰러지듯 누우며, 새 생명의 탄생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지만 막상 그 모습은 보기에 편치 않다. 꼬부라진 모양으로 말없이 누운 그에게 정장 차림의 배우가 다가가서 “이 세상에 온 기분이 어떠한가요? 이제 어느 라인을 잡을 것인가요? 혹시 낙하산 아닌가요?”라고 힐문하지만 쓰러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이다. 여기서 세상의 연줄은 이미 가엽게도 탯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안무자의 측은지심이 드러난다.
김남진 〈라인〉 ⓒ김채현 |
대금 독주자의 인도를 받으며 모두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간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설 때 바닥 중간에 놓인 훌라후프 모양으로 서커스에 쓰이는 시어휠(cyr wheel)은 공연의 마지막에도 다시 바닥에 놓인다. 그것은 둥근 원으로서 ‘라인’(연줄)이 없는 어떤 원만한 세상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탯줄의 마지막을 점찍은 안무자의 측은지심은 그 다음 부분들에서 완강한 결기로 탈바꿈한다. 미술관 안에서 관객들은 한국 사회에서 일상의 입버릇이 되고도 남는 학연·지연·혈연의 현상들과 정치, 사회 비리 사건 그리고 따돌림 같은 현상들과 줄줄이 맞닥뜨리게 된다. 일테면 연줄의 종합 세트를 의도한 듯이 〈라인〉에서는 다양한 연줄이 호명 소환된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금속성 음향이 주조를 이루면서 부분적으로 대금 소리가 전개를 뒷받침하고, 서커스의 디아볼로와 박스가 활용되었다.
이런 속에서 배우의 선명한 발언과 춤꾼 및 서커스 퍼포머들의 격한 움직임은 연줄 현상을 거듭 호명하고 비판적으로 풍자하였다. 이런 연줄 다음에 저런 연줄들이 이어지고, 그 부조리한 세상에 결국 남겨진 것은 텅빈 무대이다. 이미 희생과 자멸을 겪은 세상에서 제 홀로 덩그러니 가라앉는 시어휠은 연줄 없는 세상은 공허한 소망이니 꿈을 깨라고 객석을 질책하는 것 같다.
김남진 〈라인〉 ⓒ김채현 |
한국 사회에서 연줄과 불공정은 동전의 양면이다. 현실적 사실주의자로서 과단성을 견지해온 작풍(作風)에 걸맞게 김남진은 장식성을 배제한 거칠은 움직임들로써 사회에 대응해왔었다. 이 사회를 주목하는 〈라인〉의 시선은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하며, 청년층의 냉소마저 대변하는 것 같다. 다만 여기서 숱한 연줄이 잇달아 제시되는 부작용으로서 연줄들이 다소 피상적으로 처리된다는 인상이 들었다. 여러 연줄을 여과해내면서 좀더 집약하는 방향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김남진 〈라인〉 ⓒ김채현 |
〈라인〉에서는 서커스 전문 퍼포머의 비중이 꽤 높고 실제 진행에서도 그러하였다. 태양의서커스단을 계기로 서커스에 대한 인식이 대폭 개선되었을지라도 춤과 서커스의 접속은 우리 주변에서 만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서커스 전문인들이 춤에 참여하는 경우가, 과문의 탓인지, 사실상 전무한 데 비하여, 〈라인〉에서 그들은 작품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었고 앞으로 기대되는 바이기도 하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