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체계의 균열들로 존재하기-
2021년이다. 지난해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고, 코로나 이후의 활동이 기대되는 두 안무가의 작품을 본다. 어려움을 겪으며 깊어진 사유를 담은, 새로운 춤의 답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비대면으로 공연한 김현태의 〈364일하고 하루를 더 살았다〉(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12월 18일)와 댄스필름으로 제작, 송출한 진영아의 〈수상개화〉를 영상으로 보았다. 매체적 차이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깊이 있는 이해가 동반되지 않으면, 온갖 매체들을 통해 대량 살포되는 무수한 춤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빈곤은 물론 춤의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란 걱정이 있었다. 염려와는 달리 두 작품은 내면을 그저 재현하기보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춤적 발화의 수행적 가능성을(〈364일하고 하루를 더 살았다〉), 그리고 멀티 컨텐츠와 스토리텔링 시대의 춤문화 모색과 실천에 필요한 춤의 서사(〈수상개화〉) 작업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김현태 〈364일하고 하루를 더 살았다〉 |
대구, 김현태의 〈364일하고 하루를 더 살았다〉(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12월18일), 진시황의 병마용을 연상시키는 머리장식과 부풀려진 치마를 입은 무용수들의 서성거림으로 무대를 연다. 이들이 서성거리는 공간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삶의 중간지대로 읽힌다. 자신이 왜 이 낯선 공간에 서 있는가를 묻고 있는 듯한 김현태(안무자)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존재들. 그에게 절을 한다. 마치 피할 수 없고 이젠 닫힌 문이니 받아들이라는 의미로 읽히는, 인상적인 장이었다.
이어진 남자(김현태)와 여자(김정미)의 춤이 갈등을 보여주고, 여자가 아크릴 봉을 손바닥과 어깨에 올려놓고 균형을 잡는, 서로의 관계와 위치에 따른 무게중심을 말하는 듯하나, 다소 상투적인 움직임이었다.
김현태 〈364일하고 하루를 더 살았다〉 |
무대바닥 설치가 달라졌다. 무대를 가르며 크로스형태로 깔려있는 흰색 길. 길 위에 서 있는 남자들과 그 길 바깥에 서 있는 남자(천기량). 일상복 차림의 천기량이 셔츠를 입고 단추를 목까지 채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 굳게 믿고, 매우 성실하게. 입었던 셔츠를 위로 뒤집어 벗는다. 목 부분에서 걸린다. 위로 세게 잡아당긴다. 고통, 굳게 믿고 있었던 책임감이 자신을 가두는 올가미가 된다.
셔츠를 입기 전 잠시 건너다 본 곳(길), 남자들이 서 있던 흰색 바닥(길) 한 쪽이 가파르게 커브를 그리며 위로 들려진다. 그(천기량)가 본 것은 (길)빛이 아니라 어둠이며, 그 곳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와 다름없는 폐허다. 설혹 그가 본 것이 빛나는 길이었다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 찬란한 길은 그의 길이 아니다. 그와 무관하게 거기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비루한 삶을 조롱하기 위해 거기 있었는지도.
걷기는커녕 오르지 못할 가파른 길 너머의 확실한 것을 (모호하게) 엿보게 하고, 젊은이들의 신산한 삶을 어떤 거룩하거나 순결한 뜻에 연결시키고, 가파른 길만 있는, 그 길 위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한 해에 2400명이 산재로 죽어나가는, 사람을 부품처럼 여기는 사회. 문득 ‘중대재해처벌법’ 입법과정 뉴스가 떠오른다. 춤 사회도 다르지 않다.
김현태 〈364일하고 하루를 더 살았다〉 |
마지막, 검정색 천(길)이 무대에 깔리고, 삶(죽음)의 끝, 다시 길 위에 선 남자들. 무용수들이 천을 잡아 끌자, 컨베이어 벨트를 탄 듯, 선채로 스르륵 빨려 들어간다. 한 남자가 힘주어 버틴다. 하루를 더 살아낸 것이다.
좋은 춤, 좋은 장치였다.
안도 밖도 아닌 경계에서 춤추기. 지나보면 다 바깥이었는지도 모르는데. 364일을 살고 하루를 더 살게 허락할지 말지 결정하는 주체 또한 범접해선 안 되었던 숱한 내부들은 아닐까. 허락하지 않는 내부는 늘 있었고, 한 번도 제대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는 이들, 그 많은 이들이 텅빈 바깥에 서 있고, 경계를 넘어서면 닫힌 문이 또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생각해보면 춤(삶)이 그렇고, 마음을 닦는 일이 그렇고, 무엇보다 무대에 선 이들이 관객의 마음을 얻는 일 또한 그렇다.
안무가 김현태는 생존자체가 불확실한 춤의 토대 위에 늘 서 있으나 춤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아나려 하지 않는다. 안무가로서 춤 현실을 존중하며, 자기가 이룰 수 있는 것을 미리 검열하면서, 견고한 춤 의지로 춤을 춘다. 우연한 재능에 목매달고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해 그에게 있어 춤은 본질적이고 지속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렇게 하루를 더 살아낸다. 그가 가진 미덕이다.
진영아 〈수상개화〉 |
부산, 진영아(Random Art Project 작은방 주인)의 〈수상개화〉(樹上開化)(부산 다대포백사장 일대, 11월 1일)는 지난해(2019) 집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Incognita movement〉에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로 연결, 춤 작업을 확장시켰다.
〈樹上開化〉 ‘(죽은)나무에 핀 가상의 꽃’을 말한다. ‘병법 36계에 나오는 책략의 하나로 나무에 조화를 붙여 상대를 압도하는 전술’이라고. 가짜 꽃, 페르소나(persona), 즉 다른 이의 눈에 비치는 개인의 모습과 실존에 관한 이야기이다.
맨발로 피아노 건반을 밟는 여자, 마스크를 낀 남자, 모래에 심어진 (생명 없는)나무. 남자(신승민)가 마른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던 안경을 쓴다. 안경을 벗고 본 것처럼 사물의 윤곽이 번져나간 흐릿한 풍경 속에 잠겨 있는 바다. 온몸으로 안고, 손가락으로 움켜쥐지만 바람과 함께 이내 빠져나가는 풍경들. 그리고 안선희, 자연과 교감 하는 춤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그녀의 묵직하고 힘 있는 춤이 작품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고 있다.
진영아 〈수상개화〉 |
말 탈을 쓴 남자(조현배), 토끼 탈을 쓴 여자(이혜리). 탈을 쓰고, 이제 우리는 다른 것이 되었다고 춤출 때, 그들은 제 존재 속에서 혹은 제 존재들 속에서 또 하나의 존재에 각성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존재로 살기 위해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과 시련을 말한다. 가면(탈)을 쓰고 사는 일,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내는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자각하고, 하나의 목소리를 선택(가면을 벗는 것)함으로써 존재를 확인한다.
붉은 색 치마를 입은 여자, 죽은 나뭇가지, 모래 위에 날카로운 것에 베인 상처처럼 붉은 천(피)이 카펫처럼 길게 깔려있다. 상처가 여자(이언주)의 흰 셔츠로 옮겨 번진 듯, 이언주가 피 묻은 셔츠를 입고 춤을 춘다. 이윽고 붉은 천을 어깨에 둘러멘 정혜원이 모래밭을 힘겹게 걷는다. 새로운 바다와 뭍으로, 새로운 세계를 차례로 만나고 그 시련을 차례로 이겨내기 위해, 그 세계들의 무한함과 아울러 그 깊이를 말하기 위해. 여자는 상처로 피를 흘릴 때마다 내면의 세계로 되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은 내면으로 되돌아옴은 이탈이 아니라 자신과의 만남이 된다.
진영아 〈수상개화〉 |
춤이 카메라 바깥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다. 존재의 부조리를 붉은 색의 긴 천, 피 묻은 셔츠와 말과 토끼 탈을 쓴 남녀의 춤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춤(삶), 살아남기 위해 생명 없는 가짜 꽃을 매단 삶, 말과 토끼탈을 쓴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살아남는 삶, 그래서 형식을 갖출 수 없는 삶, 피 흘리는 삶을 페르소나로 말하는 안무자의 자의식은 패러독스이다.
춤이 경계 너머 바닥없는 이미지의 세계 속으로 수시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작가의 의도와 연출(카메라)에 따른 춤, 그 춤의 끝을 잡고 생각을 이어가다 (필자) 수시로 길을 잃는다.
진영아 〈수상개화〉 |
자연에 춤을 풀어놓는 것이 진영아 춤의 존재 방식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춤 정체성의 중요한 고비를 넘긴 작가의 정신으로 이 아름다운 춤의 끝에서 또 다른 모험을 할 것이라 믿는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무엇을 추겠다는 생각도 없이, 전혀 다른 춤에 도달하기도 할 것이다. 춤은 아는 것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시대 춤의 서사는 안무자 자신이 체계의 구축자인 동시에 파괴자로 만들고, 균열들의 체계이자 체계의 균열들로 존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춤영상은, 섬세한 감각으로 흩어져 떠도는 춤을 선택, 삭제하며 춤의 서사를 꿰는 작업이다. 그 작업으로 안무자의 변모를 보여주지만 또한 춤 작업을 통해 그 변모가 이룩되기도 한다. 춤 작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