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중력을 거스르는 도약, 관절이 자연적으로 굽어지려는 방향을 기어이 튼 고고하고 빳빳한 자세를 주무기로 삼는 고전발레는 애초부터 그런 기술의 습득과 과시가 유일한 목표인지도 모른다.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인간에게서 나왔으나 인간적이지 않은 그 춤의 미감은 그것을 감상하고 후원하는 제왕과 귀족들의 입맛에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한편 타고난 인체를 억압하고 과장시킨 의복의 대표적인 사례가 코르셋과 파팅게일인데, 그 실루엣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 클래식 튀튀라고 할 수 있다. 여성 무용수의 다리의 선과 테크닉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스커트가 점점 들어올려지다 보니 고전발레 작품이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이미 잘 사용되지 않던 르네상스 시절의 파팅게일 실루엣이 소환된 것이다. 그런데 이 클래식 튀튀에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는데, 파트너와 춤을 밀착해서 추어야 하는데도 그 형태가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유발한다는 것이다(실제로 앙리 3세의 정부들은 남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파팅게일을 착용했다고 한다).
테크닉이 많은 발전을 이룬 지금은 무용수들이 클래식 튀튀를 착용하고서도 피쉬 다이브 같은 고난도 동작을 소화하는 등 의상이 본래 지닌 문제점을 무마시키고 있지만, 홀로 고고해 보이는 클래식 튀튀는 아무래도 고귀한 신분이나 요정 등의 캐릭터가 착용했을 때 맥락에 들어맞아 보인다. 예외가 있다면 〈돈키호테〉의 키트리, 〈해적〉의 메도라 등을 들 수 있는데, 키트리의 경우는 그나마 춤과 스타일에서 스페인 특색을 비교적 명확히 간직하고 있는데 비해(경우에 따라 튀튀의 허리 수평선을 그리 강조하지 않기도 한다) 각종 콩쿠르와 갈라에서 선보이는 용도로 솔로춤이 주로 알려진 〈해적〉의 의상은 그것을 착용하는 캐릭터의 본래 신분이 무엇이었는지도 의문스러울 만큼 과하게 화려하게 발전되어 왔다. 에스닉한 요소를 그래도 가장 풍성하게 선보이는 볼쇼이 버전만 해도 메도라가 티아라를 쓰고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해적〉이라는 작품은 진정 춤의 테크닉을 과시하고 눈의 요깃거리를 충족하기 위한 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가 싶다.
국립발레단 〈해적〉 ⓒ국립발레단/손자일 |
〈해적〉이 이렇게 전막 작품으로서의 입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그나마 알려진 알리의 솔로나 파드트루아 등을 통해 봐도 등장인물들의 정체성이 희미한 고약한(!) 작품이 된 것은 워낙에 많은 안무가의 취향과 공연 당시의 사정에 따라 장면을 추가했다가 삭제하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변용이 가능했던 건 최초의 〈해적〉부터가 바이런의 원작 줄거리를 따라가지 않고 취하고 싶은 것만 따왔기 때문이다.
바이런의 시 원제 〈The Corsair〉(1814)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일반의 해적(pirate)이 아닌 코세어는 특정 지역(아프리카 북부 바바리 해안)에서 악명을 떨쳤던 무슬림 해적들이다. 이들은 백인 기독교인도 노예로 팔아넘겼으며 때로는 귀족 가문의 후원을 등에 업기도 했다.
그런 코세어, 백인이면서 무슬림 해적의 수장이라는 이중적 성격으로 설정된 콘라드가 이슬람 군주에 맞서 그리스 소녀 걸네어(귈나라)를 구출할 때(원작에서는 본처인 메도라를 고향의 탑에 가둬놓고 떠난 콘라드가 걸네어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다) ‘유럽 문명의 본원인 그리스의 수복’이라는 정치적·문화적 명분을 가능케 한다. 원작을 참고하여 발레에서 노예인 메도라의 치장이 극도로 화려한 것에 그나마 합리적 이유를 달아줄 수 있다면, 바로 유럽이 회복해야 할 아름다움의 근거, 그리스 소녀라는 설정에 답이 있을 것이다(물론 그렇다 해도, 복부를 드러내고 가슴의 관능성을 강조한 터키풍의 의상 또한 다수 존재하기에 썩 들어맞는 이유는 될 수 없다).
국립발레단 〈해적〉 ⓒ국립발레단/손자일 |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 도주〉(초연 1782)에서 이슬람 군주인 셀림이 노예로 사들인 스페인 귀족 처녀에게 신사적으로 대하고 그녀를 사랑함에도 그녀의 사랑을 위해 풀어주는 인격적인 모습을 보인 데 반해, 원작 〈해적〉의 세이드(파샤)는 걸네어를 얼마간 사랑하지만 소유하고 정복하는 노예로서의 의미 이상은 갖지 않기에 그녀로부터 살해당한다. 본처 메도라를 탑에 가둬놓고 온 콘라드는 그런 세이드와 완벽한 적대관계가 아닌, 서로 거울처럼 반영된 캐릭터라 볼 수 있으며 콘라드 또한 메도라의 죽음을 알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는 점에서 두 이슬람 집단의 지배자들은 모두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발레에서는 파샤를 원작보다 더욱 호색한으로 강조해서 그리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콘라드와 메도라의 애정관계를 굳건히 유지시키는 등 적어도 서양 지배계급의 시선에 거슬릴 만한 요소를 배제하였다. 사랑을 지켜낸 콘라드와 메도라가 난파를 당하면서 동료들을 잃고 둘만 남게 된다는 결말은 원작의 비극적 결말과 적정 부분 타협한 해피엔딩일 수 있으나 어쩌면 무법적인 해적(그것도 무슬림)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었던 자체적인 검열의 결과가 아닐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국립발레단 〈해적〉 ⓒ국립발레단/손자일 |
서설이 길었는데, 서양도 이슬람도 아닌 제3의 세계에 속한 우리가 그것도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던 발레라는 어법과 〈해적〉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 두 세계의 대치국면을 이해하려 든다면 애초에 어불성설인지 모른다. 각색자 정다영과 안무가 송정빈은 비교적 그 한계를 일찌감치 인식하고 작품의 개정에 착수한 것처럼 보인다. 작품으로부터 그리스와 이슬람이라는 배경을 삭제하고 아예 새로운 가상의 지역들을 설계하였다. 또 연극적 상황과 마임들-주로 호색한 파샤의 (성)노예 매매와 메도라에 대한 지독한 집착으로 이어지는-을 과감히 들어내고 그저 자신들의 사랑이면 족한 젊은이들의 가벼운 모험담으로 치환시켜 작품을 경량급의 근육질 선수로 만들고자 했다.
프롤로그 격에 해당하는 해적들의 선상 장면을 추가한 것은 그런 점에서 신선한 시도로 읽혔다. 충신 알리가 어떻게 충신이 되는지 전사(前史)를 부여한 것은 비르반토의 배신을 예고하는 복선으로도 효과적으로 작용했고, 앞선 버전들에서 정체성이 약했던 바로 그 ‘해적’의 모습을 모처럼 보여주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국립발레단 〈해적〉 ⓒ국립발레단/손자일 |
정다영은 〈해적〉 안의 섹슈얼한 이슈들이 그동안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었던 점이 불편해 여성들이 노예로 매매되는 설정을 바꾸었다고 밝혔다. 알리가 노예로 팔리는 대신 해적이 되기로 한 것을 보면, 노예매매라는 현실을 아예 없앤 것은 아니다. 메도라는 공물을 바칠 수 없어 끌려가고 귈나라는 사제로 설정되면서 극 안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 중 〈안나 카레니나〉와 〈마타 하리〉가 만 8세 이상 관람가라는 등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선정적인 장면을 포함하고 있던 것에 비하면, 이번 〈해적〉은 비교적 관람등급에 어울리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미약한 효과에 그쳤는데, 애써 만든 남성 군무가 결과적으로는 그리 다채롭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꼽고 싶다. 그들의 업이 해적이라는 점은 도입부에서 분명히 제시했지만, 그 설정이 춤의 색깔에서 제대로 드러나지는 못했다. 1막 마을 축제에 참여한 해적단들의 춤에서 유독 악보에 부점이 많이 붙은 리드미컬한 음악의 경쾌한 톤이 안무로 살아나지 못하고 다 깎여 나갔다. 특히 콘라드가 이끄는 해적단이든 랑뎀 왕자가 이끄는 마젠토스의 병사단이든 한결같이 단정한, 객석 정면을 바라보는 규칙적인 대형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어느 순간에는 소비에트 시절 체제 선전물의 매스 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작위적인 느낌이 들 정도였다. 콘라드의 지휘 아래 해적단이 매우 규율 있게 움직인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해적 집단의 거친 야만성은 실종된 것 같았다. 평자가 관람했던 11월 3일의 프레스콜에서 콘라드 역의 캐스팅은 이재우였는데, 해적단의 밋밋한 군무를 배경으로 두니 콘라드는 무늬만 해적일 뿐 어느 나라 왕자를 데려다 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국립발레단 〈해적〉 ⓒ국립발레단/손자일 |
한편 베일을 벗는 메도라의 아름다움에 남성들이 취하는 장면을, 귈나라가 베일을 벗을 때 메도라가 반하는 설정으로 바꾼 것도 나름의 참신함이 있었지만 이건 결과적으로 두 여성 캐릭터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각색자는 (성)노예 매매라는 설정을 없애면 여성들의 인격적 주체성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랑뎀 왕자와 귈나라의 애정 관계를, 그녀가 사제이기 때문에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추는 파 드 되나 탈주하려는 귈나라를 막아서는 랑뎀의 집착 어린 모습에서 적어도 한 쪽은 마음을 갖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귈나라가 입궁하기 전 빈민들에게 금은보화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고 메도라가 감탄하는 등 선행으로서 아름답게 그리려 했는데, 그 귈나라는 결국 어디에 속해 있는가?
구 버전들이 오달리스크의 춤으로서 선보였던 것들을 송정빈 버전에서 여성 사제들의 춤으로 바꾸는 것까지는 가능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무대 후면 높은 단 위에서 내려다보며 감상하는 파샤의 시선 아래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귈나라와 여성 사제들이 그의 소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치장할 수 있던 원천도, 마젠토스 신민들의 자발적인 헌물이 아님을 이미 메도라가 끌려오는 설정에서부터 볼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런 설정을 진정 현실로 느끼고 동정하는 사제라면, 귈나라는 마음 편히 치장을 할 수 없으며 선행은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운 입지에 대한 반성이어야 한다. 누구보다 배금주의의 희생이 된 메도라 역의 박슬기가 화려한 궁궐과 귈나라의 성장을 동경하며 짓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면 과연 콘라드 일행이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설정변수들은 부피감을 과감히 줄이고 춤만으로 채운 전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속도감을 느낄 수 없게 지루함을 남겼다. 평자에게는 2막 해적단에 합류한 여성 사제 네 명이 추는 춤이 그 지루함의 절정이었는데, 머리의 보석 장식과 한껏 멋을 낸 클래식 튀튀를 착용한 채 여기 온 그녀들은 정말 자유를 갈망하기는 한 것일까? 춤의 결이든 시각적인 면이든 그저 예쁘장하길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해적에 섞여들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판타지라도 인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은 있어야 그래도 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을 텐데, 이번 〈해적〉은 그렇다고 하면 무조건 믿어야 하는 이상한 나라의 판타지, 진짜 판타지가 되어 버렸다.
국립발레단 〈해적〉 ⓒ국립발레단/손자일 |
국립발레단은 근래 몇 년간 〈안나 카레니나〉 〈마타 하리〉 〈호이 랑〉 등을 통해, 비교적 차근하게, 여성 배역을 다양하게 접근하고 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유불급 같아 이해할 수 없던 〈마타 하리〉의 라인업 조차도 여성성의 표현력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신작 〈해적〉은 그 모든 발걸음을 되돌려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비르반토 역의 변성완과 알리 역의 김기완이 불어넣은 활력만으로는 이 오도 가도 못하는 배를 전복시킬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원인은 전체를 통찰하여 주제에 수렴시킬 연출의 일관되고 합리적인 시각이 부재한 채, 젊은 각색자와 안무가의 손에만 이 문제작이 맡겨졌다는 것이다.
애당초 장대한 눈요깃거리를 위해 원작을 끌어들였던 발레의 태생적 원죄가 있으니 노예제도를 극도로 혐오하고 그리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바이런 본인의 절실함까지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유행처럼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하면서도 주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 못했다는 점은 너무나 아쉽다. 코로나로 번번이 공연이 취소되면서 모처럼 열린 무대이기에 관객은 즐기고 환호했지만, 사람들이 발레에 기대하는 건 결국 예쁘고 환상적인 페어리 테일(fairy tale)일 뿐이라고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시각적 쾌(快)가 줄 수 있는 감흥은 딱 그 정보가 눈에 머무는 시간만큼일 터. 더구나 아직 자신만의 춤체를 갖지 못하고 클래식 발레의 어법 안에서 좁은 운신의 폭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송정빈 안무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리에게 클래식 발레를 장기로 삼는 안무가가 귀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필수적으로, 그것도 속성으로 육성해야 마땅한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