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민중의 예술적 토대인 동시에
전통춤의 근간인 지역춤
한국인의 삶과 더불어 면면히 전승된 전통춤은 그 갈래가 다양하다. 故정병호는 무속춤, 불교춤, 유교춤, 농악춤, 탈춤, 소리춤, 허튼춤, 기방춤, 궁중춤과 같은 여러 갈래를 민속춤과 궁중춤으로 대극화하고, 이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의 하나로 연행의 주체가 민중임을 강조한다. 민속춤뿐만 아니라, 설령 궁중무라고 할지라도 직접 춤을 춘 사람은 왕이나 고관대작이 아니라, 이름 없이 살다간 민중이라는 것이다.
이 땅을 살다간 민중은 설, 대보름, 한식, 초파일, 단오, 유두, 백중, 추석, 동지와 같은 명절은 물론이고, 일 년을 24절기로 나눠 매 시기마다 크고 작은 마을굿을 열었고, 춤과 함께 신명나게 놀아 제쳤다. 또한 매일 매일의 일터에서도 신을 위해 농기(農器)를 세우고 풍물을 치고 술을 뿌려, 일상적 노동 전체를 농신(農神)을 모셔 노는 굿으로 전환시켰으며, 굿과 춤과 놀이가 일 속에서 넘실거렸다. 이와 같이 삶에 밀착된 각종 굿과 춤과 놀이는 연희의 주체인 민중의 예술적 토대라 할 수 있고, 이 점에서 우리 춤의 바탕인 동시에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의 예술적 토대인 동시에 전통춤의 근간을 이루는 춤과 놀이는 지역마다 특수성을 갖는다. 흔히 민요의 분류방식을 원용하여 경기, 전라, 서도, 동부(함경, 강원, 영남)로 그 권역을 나눈다. 각 지역은 굿 이외에도 고유한 자연, 역사, 기질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며 특수성을 확보한다. 동시에 지역 내부의 기층과 상층, 지역과 지역 간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춤의 내용을 보다 풍성하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지역춤은 몇몇 유파의 위세에 눌려 오랫동안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고, 학문적 논의 속에서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도외시되었다. 지역춤의 보존과 연구는 전통춤의 토대를 깊고 넓게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나아가 오늘 춤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재차 강조할 수 있다.
영남지역 전통춤을 재현한 진경화,
통영 기방의 기본무와 전쟁춤인 승전무
국립부산국악원무용단(예술감독 정신혜)은 7월10일과 11일 양일간에 걸쳐 〈영남춤 진경화〉를 연악당 무대에 올렸다. 작년 12월에 한 차례 공연한 바가 있는 재공연작으로, 영남지역 전통춤을 재현한다. 레퍼토리는 통영의 〈기방입춤〉과 〈승전무〉, 부산의 〈동래 한량춤〉, 진주의 〈살풀이춤〉과 〈검무〉, 대구의 〈금회북춤〉이다. 영남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시골촌부의 〈배춤〉 〈요동춤〉 〈엉덩이춤〉 〈갈짓(之)자걸음새춤〉 〈펑게춤〉 〈두꺼비춤〉 〈병신춤〉 〈공상춤〉 〈목메춤〉 〈도리깨춤〉과 달리 전문화‧무대화‧예술화된 것으로, 지역사회에서 널리 유통되고 있는 종목들이다.
〈통영기방입춤〉 ⓒ국립부산국악원/이호형 |
소리꾼의 단아한 노랫소리 들리고, 무대 중앙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지도가 펼쳐진다. 영남 땅이 줌 인(zoom-in)되고 춤꾼이 등장한다. 슬픈 상념에 젖은 듯 무대를 에돌다 후면에 위치한 긴 단상에 서면, 첫 번째 작품인 〈통영기방입춤〉이 시작된다. 이 춤은 통영권번에서 예기(藝妓)교육을 위해 추던 기본무로, 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북춤)〉의 예능보유자 엄옥자가 이전 보유자였던 故정순남에게 전수받아 재구성한 작품이다.
춤이 진행되는 동안 5개의 스크린이 내려오고, 간결하고 세련된 영상이 나와 병풍(屛風) 구실을 한다. 춤사위 구성이 비교적 단순한데, 팔 들고 내리기, 발 디딤, 이동하기, 앉아 손목 놀리기(坐舞), 이동하며 손목 놀리기, 쌍어리로 이어진다. 좌무 직전에 군무진이 등장하여 함께 춤을 추고, 어깨에 손을 얹어 맞춤을 추는 쌍어리를 둘 또는 셋이서 한 다음 마무리 짓는다.
〈통영기방입춤〉에서 특징적인 것은 단순한 춤사위가 매우 정제되어있다는 것과 곳곳에 박혀 있는 손목놀음이다. 전통춤 일반에서 한삼이나 수건을 이용하여 엎고 제치는 손동작을 빈번히 한다. 그런데 이 춤은 몸과 팔을 안으로 궁굴게 모운 다음, 첫 박에 강한 악센트를 주며 손바닥을 뒤집는다. 정면을 향해 제쳐 진 맨손이 강하게 부각되는데, 검무계열의 맨손춤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승전무〉 ⓒ국립부산국악원/이호형 |
백 스테이지(back stage)에서 4명의 춤꾼이 줄 지어 전진하고, 무대 중앙에 큰 북이 자리 잡으면, 〈승전무〉가 시작된다. 이 춤은 관청에 소속된 교방(敎坊)의 춤이다. 가무악(歌舞樂)을 관장했던 이 기관은 서울경기,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에 두루 분포했다. 소속 관기(官妓)는 궁중에 차출되어 의례에 참여하고 다시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이를 통해 궁중춤이 민간에 소개되기도 하고, 민간에서 널리 유포된 춤이 궁중에 소개되기도 했다. 즉 교방과 관기를 매개로 기층과 상층이 교류하고, 지역춤을 포함한 전통춤 전반이 풍성하게 발전 할 수 있도록 촉매 한 것이다.
통영교방의 〈승전무〉는 한산대첩 이후 삼도수군통제사의 각종 하례와 군사행사에서 연희되었고, 승리를 예축하며 전쟁에 지친 군민과 군사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았다. 이순신 장군을 위한 헌무(獻舞)이기도 했던 이 춤은 원래 북춤과 칼춤(통영검무)으로 구성된다. 공연된 것은 그 일부로 국가무형문화제 제21호로 지정된 〈승전무(북춤)〉이다.
무대 전면을 향해 전진한 4명의 춤꾼이 나란히 앉아 북채를 잡고, 좌우치기를 한다. 이어 북 주위로 이동하여 상대(相對)‧상배(相背)하며 대무한다. 그리고 이 춤의 하이라이트인 북치고 노래하며 춤추는 대목이 시작되고, 상당수의 군무진이 합류하여 협무(挾舞)한다. 중앙의 북을 에워싼 4명이 북을 치며 노래하고, 주변에 배치된 협무는 〈통영기방입춤〉의 동작을 반복하며 노래한다.
춤의 내력을 고려할 때, 〈승전무〉는 전쟁춤이다. 때문에 정제된 자세‧디딤‧사위 속에서도 당당하고 결기에 찬 기상을 강조한다. 그러나 무대를 가득 메운 춤꾼의 어깨, 걸음, 북채나 손목을 놀리는 사위에서 힘찬 기운을 찾기 어렵다. 국악원성악단이 가세해 함께 부른 노래와 북의 울림 또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채 의미 없이 겉돌았다.
부산 동래, 기방춤의 영향으로 예술화된 한량의 즉흥무
5개의 스크린이 내려와 다시 병풍을 만들고, 춤의 고장 영남을 소개하는 판소리 창자의 아니리와 함께 〈동래 한량무〉가 시작된다. 부산광역시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이 춤은 동래 지역 한량이 추던 즉흥무로, 기방의 영향 속에서 발전한 춤이다. 그런데 민중의 예술적 토대인 마을굿과의 상관관계를 배제하기 어렵다. 동래의 정월대보름 마을굿은 규모가 큰 행사로, 농경의례와 함께 각종 놀이가 펼쳐졌다. 메인 행사는 줄다리기이고, 행사비용 마련을 위해 지신밟기를 했다. 그리고 줄다리기에서 이긴 편이 축하공연으로 들놀음(野遊)을 개최했다. 탈춤의 또 다른 지역어인 들놀음은 본 공연에 앞서 앞 놀이판이 있었고, 지역민의 각종 장기(長技) 춤이 펼쳐졌다. 같은 한량의 춤으로 예술적으로 잘 승화된 〈동래학춤〉이 장기자랑 종목으로 빈번히 연희되었다는 점에서, 〈동래 한량무〉 또한 난장의 앞 풀이에 참여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동래 한량무〉 ⓒ국립부산국악원/이호형 |
〈동래 한량무〉는 굿거리장단에 맞춰 진행되며, 일자(一)사위, 어깨춤, 배김사위가 주를 이룬다. 이 중 배김사위는 낱낱의 동작이 아니라, 일정한 짜임새를 갖는 춤 단락이다. 즉흥성이 강한 영남춤 전반에 두루 나타나는데, 대체로 ‘어르고-맺고-어르고-푸는’ 짜임새를 갖는다. 예를 들어,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정거리며 놀고(어르고), 땅을 콱 내려밟아 긴장감을 부여하고(맺고), 긴장을 이완시키며 놀고(어르고), 마무리 짓는(풀고) 이 전체가 배김사위인 것이다. 예시한 형태는 기본형일 뿐이고, 표현내용과 공연환경에 따라 짜임새를 다양하게 변주하며, 테크닉(technic) 구사방법 또한 다채롭다.
공연된 〈한량무〉는 홀 춤에서 시작해서 남성군무로 이어진다. 몇 차례 반복된 배김사위는 대부분 기본형이고, 다른 변주를 확인하기 어렵다. 발 디딤새는 장단과 합(合)이 맞지 않아 불안하고, 흥이 오른 어깨는 작위적이다. 한층 밝아진 조명, 남성군무의 힘찬 도약, 휘날리는 도포와 함께 원형을 그리는 이동경로(path), 병풍을 가득 채운 대나무 영상은 시각을 자극한다. 그러나 덧배기춤의 묘미를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진주, 곰삭힌 한을 무심히 표현하는 살풀이춤과
싸움춤인 검무
자욱한 스모그 사이로 〈살풀이춤〉이 시작된다. 이 춤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이전 보유자 故김수악이 진주권번 故최순이에게 배워 재구성한 기방계열 춤이다. 영남뿐만 아니라, 이 땅 전역에 두루 분포하는 〈살풀이춤〉은 지역, 유파, 스타일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시작인 도입부, 맺힌 한을 표출하는 전개부, 한을 풀어 신명을 극대화하는 종결부로 구성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살풀이춤〉 ⓒ국립부산국악원/이호형 |
오늘날 많은 〈살풀이춤〉이 교태미를 강조하지만, 김수악류 〈살풀이춤〉은 잡다한 동작을 생략하고, 간결한 고갯짓과 어깻짓, 양팔을 옆으로 벌린 일자사위를 통해 곰삭힌 한을 무심히 드러낸다. 그리고 흥이 올라 우쭐거리는 어깨와 몸의 일부처럼 확산되었다가 수렴되는 수건을 통해 맺힌 한을 풀어낸다.
겹겹이 쌓인 한을 간결한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고개와 어깨로 장단을 타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스모그 사이에 홀로 선 춤꾼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춤이었다. 춤 전반에서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 고갯짓과 어깻짓, 수건을 통한 한의 표출을 찾기 어려웠고, 애를 쓰며 뿌려대는 수건만이 난무했다.
〈진주검무〉 ⓒ국립부산국악원/이호형 |
남색 전복(戰服)에 검은 모자를 쓰고, 색동 한삼 사이로 칼을 든 춤꾼들이 열을 지어 등장한다. 이 춤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로, 진주교방 출신 故최순이가 진주권번 기생들에게 전수한 춤이다. 검무는 신라 황창랑(黃倡郞)에서부터 교방의 검무, 기방의 검무, 궁중의 검무, 동학의 검결(劒訣), 무당의 칼춤, 상여 앞에서 양손에 칼을 쥐고 추는 휘쟁이춤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전승양상 또한 매우 역동적이어서, 고려시대 민간에서 널리 유통되다가 궁중에 편입된다. 이후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궁중검무는 자취를 감추지만,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서 널리 성행하여 궁중에 재진입한다. 이 중 〈진주검무〉는 임란 이후 교방에서 추어진 것으로, 당시를 생생하게 묘사한 정약용의 「칼춤 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舞劍篇 贈美人)」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후좌우 휘둘러도 칼끝 서로 닿지 않고
치고 찌르고 뛰고 굴러 소름이 쫙 끼치는 구나
회오리바람 소나기가 차가운 산에 몰아치듯
붉은 번개 푸른 서리 빈 골짝서 다투는 듯1)
시에서 〈진주검무〉는 ‘치고 찌르고 뛰고 구르는’ 격렬한 싸움춤이다. 이러한 양상은 또 다른 검무를 묘사한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에서도 여실히 확인해 볼 수 있다. 칼싸움은 생사를 건 문제해소의 극단적 방편이다. 여기에 강조점을 둘 때, 검무는 삶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게 하는 맺힌 한을 직시하고, 결렬하게 대적하여, 마침내 풀어내는 살풀이춤의 한 유형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진주검무〉는 매우 정제된 형태로, 한삼을 끼고 진행되는 한삼춤, 맨손으로 진행되는 맨손춤, 칼을 들고 진행되는 칼춤으로 구성된다.
〈진주검무〉 ⓒ국립부산국악원/이호형 |
색동무늬가 스크린 병풍을 가득 메우고, 두 줄로 도열한 8명의 춤꾼이 〈진주검무〉의 한삼춤 대목을 시작한다. 이렬, 일렬, 아(亞)자로 대형을 바꿔가며 대무하고, 한삼을 벗어 마무리 한다. 그런데 한삼을 벗은 것은 둘 뿐이고, 나머지는 퇴장한다. 조명이 만든 사각 프레임 안에서 남은 둘이 맨손춤 대목을 하고, 여성적인 손동작이 한동안 나열된다.
많은 수의 군무진이 재등장하여 춤의 마지막인 칼춤 대목을 한다. 한 팔 또는 양 팔로 칼을 놀린 다음 삼진삼퇴(三進三退)하고, 연풍대로 판을 휘감아 마무리한다. 좁은 보폭과 여성적인 상체 놀림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대열을 짓는 〈진주검무〉에서 격렬한 살풀이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인무로 재구성된 맨손춤 대목은 시각적 신선함을 제공했을지는 모르나, 흡인력이 약해 전체적인 몰입을 저해했다고 할 수 있다.
대구, 북 가락이 현란하고 한배가 빠른 금회북춤
국립부산국악원 연희부 풍물패가 한바탕 놀아 제쳐 분위기를 고조시킨 다음, 〈금회북춤〉이 시작된다. 이 춤은 대구 달군성 다사읍 일대의 각종 마을굿에서 연희되던 달성다사농악에서 분화된 것으로, 상쇠 배관호가 재구성한 춤이다. 우리 춤에서 북춤은 연주용 음악이 아니다. 어깨에 걸친 북을 치며 노는 춤이다. 해서 안정적이고 탄력적인 걸음새가 매우 중요하고, 흥이 올라 우쭐거리는 어깨와 북을 치고 자연스럽게 너울거리는 사위에서 묘미를 찾는다.
〈금회북춤〉 ⓒ국립부산국악원/이호형 |
〈금회북춤〉은 북 가락이 다채롭다. 그리고 북을 치는 호흡과 속도(한배)가 무척 빨라서 춤추기 쉽지 않은 북춤이다. 희고 큰 고깔을 쓴 단원들은 북을 두드리기 바쁘고, 대열을 짓기 위해 이리저리 내딛는 걸음은 불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놀이처럼 현란하게 몰아가는 북 가락, 연희단 풍물패의 합세, 많은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만드는 대형, 대단원을 향해 쏟아지는 조명이 관객의 눈과 귀를 빼앗았다. 덧배기춤은 영남 특유의 굿거리장단에 맞춰 추는 춤의 총칭이다. 과연 휘몰아치는 〈금회북춤〉을 덧배기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쉬이 대답하기 어렵다.
영남 지역 전통춤을 전진 배치한
진경화의 성과와 과제
영남 전통춤을 전면 배치한 〈진경화〉는 지역춤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국립무용단의 〈묵향〉을 연상시키는 스크린 병풍은 당대적 감수성을 반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성적 과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지역춤 레퍼토리 선정에 있어, 기방이나 교방계열 춤에 편중되어 있고, 예외라 할 수 있는 북춤마저도 무대화에 적합하도록 재구성된 것이다. 지역적 특수성을 배태하고 있는 여러 다양한 춤의 발굴과 복원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한편, 〈진경화〉는 영남춤을 재현함에 있어 고유한 정신 내지는 정취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규모를 키우고, 세련된 외피를 씌우고 있지만, 이미 널리 유통되는 춤을 단순 반복함으로써 덧배기춤의 멋과 맛을 선연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지역춤의 올곧은 재현은 전통춤 계승과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의 전승방식은 일체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 일본의 가원제(家元制)와 달라서, 전승자의 창조적 변용을 용인한다. 여기서 변용은 어떤 제약도 거부하는 자유로운 창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춤의 형식과 내용은 물론이고 본질을 꿰뚫어 알 때, 비로소 허용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역춤을 비롯한 우리 춤 재현은 옛 춤을 오랫동안 체득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형식과 내용, 역사적‧사회문화사적 의미맥락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춤의 본질은 지키되, 창조적 개성이 들어나도록 일정한 해석이 가해져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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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약용. 『여유당전서』, 권1.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것이고, 인용된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左鋌右鋌無相觸 擊刺跳躍紛駭矚 颷風驟雨滿寒山 紫電靑霜鬪空谷.
송성아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와 경상대학교에서 현대문화이론과 전통춤분석론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