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이들을 배려하는 자세로서 눈높이는 상식이다. 국내 예술계 어딘가에서도 눈높이를 실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춤계에서 눈높이는 얼마나 실행되고 있을까.
무대 위의 춤예술인, 말하자면 전문 무용인이 눈높이 활동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소년을 위한 춤 교육이 그런 범주에 들 테고, 청소년을 위해 전문 무용인이 공연작을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동향을 참작하더라도 전문 무용인의 눈높이 활동은 일단 미미한 것으로 짐작된다. 오마이라이프무브먼트씨어터의 〈과일·악기·그림책〉(성수아트홀, 11. 30. ~ 12. 1.)을 보면서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안무: 인정주+밝넝쿨).
〈과일·악기·그림책〉은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춤 공연물이다. 〈과일·악기·그림책〉의 제목 그대로 공연은 과일, 악기, 그림책을 3가지 주요 소재로 한다. 이들 소재를 응용한 그것은 우선 아동에게 적절한 것은 물론이고 청소년, 중장년층 부모들, 심지어는 노령층도 재미를 느낄 공연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과일·악기·그림책〉에서 세대 구분 없이 동심의 세계에 머물 수 있다.
오마이라이프 〈과일 악기 그림책〉 ⓒ김채현 |
일반 주택의 1/3 크기로 축소된 미니어처 주택이 대형 장난감처럼 오른쪽에 놓인 무대는 공연 전부터 노출된 상태다. 유리창이 큼지막한 그 미니어처 주택은 아동물에서 흔할 초원의 집 같은 모양이고 지붕과 벽에는 물고기 무늬들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미리 전한다. 공연 맨앞에서 유모차를 숲 속으로 밀어가는 동영상 화면이 무대 정면에 비친 후, 무대 양쪽의 윙에서 출연자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다 사라지면서 ‘까꿍’ ‘까꿍’ 소리쳐서 공연 시작을 알린다.
〈과일·악기·그림책〉에는 한 편의 동화 이야기 같은 일관된 줄거리가 없다. 반면에 인과 관계가 없거나 옅은 장면들이 예컨대 다음의 식으로 이어진다. 무대 바닥으로 떼구루루 구르는 사과를 집어 들어 출연자들은 마치 과수원에서 율동하듯 갖고 논다. 그들은 수북이 쌓은 바나나, 감귤을 갖고 갖가지 모습과 상황을 연출한다. 동화책 몇 구절을 낭송해서는 동물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집을 꿈꾼다. 미니 기타, 미니 피아노가 예쁜 음감을 자극한다. 동네 아저씨가 많은 아이들을 태워 자동차 나들이를 하는 내용이 낭송되는 동안 테레민(고주파 신시사이저)이 아저씨의 손동작들에 따라 다르게 내는 묘한 음향들로 그 내용을 보조한다. 이외에 많은 장면들이 등장한다.
오마이라이프 〈과일 악기 그림책〉 ⓒ김채현 |
〈과일·악기·그림책〉은 전문 무용단의 공연작이다. 현대무용 계열 다섯 명의 출연자들은 춤 전문 경력이 짧지 않다. 그들은 모두 흰색 계통의 스포티한 캐주얼 차림으로 재빠르며 발랄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눈높이에 맞춘 깜찍스러움을 때마다 간결하게 놀이해내었다. 아동물로서 장면 장면을 이어가는 공연의 특성상 일반 무대 공연의 기량과 전개가 필수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지라도 출연진들의 무대 움직임은 자신들의 전문성에 힘입어 〈과일·악기·그림책〉이 여느 아동물의 차원에 맴도는 것을 원치 않아 보였다.
오마이라이프 〈과일 악기 그림책〉 ⓒ김채현 |
춤뿐만 아니라 장르를 막론하고 아동물들은 일관된 줄거리를 취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동물에서 일관된 줄거리가 일장일단이 있음에도 일관된 줄거리를 고집함으로써 억지스러운 스토리를 자초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아동의 눈높이에서 스토리를 이해하려고 해도 억지스러움이 눈에 띈다는 말은 스토리 구성 작업이 그만큼 치밀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스토리를 고수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과일·악기·그림책〉에서는 아이들과 친한 소재로 재미난 장면들이 연속될 뿐이다. 이 점은 〈과일·악기·그림책〉의 전개 구도가 느슨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를 주었고, 공연에서 이 점은 십분 활용되었다. 그렇게 느슨한 구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춤의 강점일 수 있다. 이런 느슨함 속에서도 〈과일·악기·그림책〉은 일관된 주제로서 아이들 사이의 즐거운 어울림을 맘껏 꿈꾸고 강조하였다.
동심의 세계, 억지스럽지 않은 구성, 전문성에 기반을 둔 깜찍한 전개, 매끈한 무대 분위기는 〈과일·악기·그림책〉을 아동뿐 아니라 여러 세대가 함께 즐거워할 공연물로 만들었다. 아동 이외의 세대가 동화를 통해 아동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이치는 〈과일·악기·그림책〉에서도 바로 통하였다. 이 공연에서 더 눈여겨볼 점으로서, 〈과일·악기·그림책〉은 아동물이라 하여 마냥 상상의 세계에 머물지는 않는다. 수건으로 두 눈을 동여매고 길 잃은 아이를 재현하며 그 아이를 아이들이 무언의 몸짓으로 에워싸는 부분은 고립과 왕따 등 여러 가지를 환기한다.
오마이라이프 〈과일 악기 그림책〉 ⓒ김채현 |
지난 12월 국립현대무용단이 아동물 〈루돌프〉를 자유소극장에서 올렸다. 그리고 12월이면 국내 발레단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올리는 것은 90년대 이래 일종의 세시풍속으로 자리잡았다. 10년전 인천시립무용단이 〈호두까기 인형〉을 한국무용 버전으로 몇해 한 적 있다. 이외에도 눈높이 춤 공연이 어딘가에서 올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눈높이 춤 공연의 중요성은 인식되는 반면에 〈호두까기 인형〉 말고는 현실적으로 그 실행은 간간이 포착될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온가족이 함께 수용할(관람하고 공감할) 눈높이 춤 공연이 많아져야 한다. 〈호두까기 인형〉이 그렇게 장수해온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아동물이면서 가족물이기 때문이다. 아동물이 아동물에 그친다면 아무래도 유치해서 장수하기는 힘들다. 또한 아동물에 그치는 아동물은 여러 면 프로 의식이 미약할 테고, 완성도도 낮을 것이며… 그래서 비평 네트워크에 포착될 확률마저 낮다. 아동물도 프로 의식으로 무장되어야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원인이 겹쳐 눈높이 춤 공연은 사실상 전문 무용인의 관심권 밖이었다. 지금껏 눈높이 춤 공연은 춤계에서 사각(死角)지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두까기 인형〉은 눈높이 춤 공연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할 것을 진즉부터 말해왔었다.
판단컨대, 〈과일·악기·그림책〉은 아동물이면서 가족물이며, 현대무용 기반의 소품으로서 충실도를 갖춘 눈높이 춤 공연물이다. 더욱이 이 공연물이 구립 단위의 군소 극장에서 개발된 사실은 이제 지역의 극장도 얼마든지 나름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