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와, 〈호이 랑〉! 조선조 광해군 시기 평안도 차성군에서 자기 아버지 대신 군 복무를 자처한 소녀 부랑이 국립발레단 〈호이 랑〉에서 재조명되었다. 조선시대 농민 장정들은 16~60살이면 군역(軍役)을 가야 하였다. 오빠가 전사하자 늙고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가 군역을 이어야 하는 처지에서 어쩔 도리 없이 부랑은 꾀를 내어 남자 장정으로 가장하여 아버지를 대신해서 군에 입대하였다. 이것만으로도 부랑은 효심의 귀감으로 칭송받기에 충분한데, 게다가 반란군을 제압하는 무공을 세웠으니 부랑의 행적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오늘의 발레 무대에서 부랑을 되살린 〈호이 랑〉은 국립발레단이 거둔 쾌거임이 분명하다(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11월 6~10일).
국립발레단 〈호이 랑〉 ⓒ국립발레단 |
실제 인조반정에서 일등공신이었던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획책하는 것을 군대에서 부랑이 알고 관에 알린다. 정충신이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우고, 그는 부랑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호이 랑〉에서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단서로 하되 각색하였다. 무자비한 부사령관 집단은 아버지가 노쇠한 집안의 사정을 아예 무시해서 소녀 부랑의 호소를 거절하며, 군에 가장하여 입대한 후 훈련 과정에서 부사령관에게서 시달림을 당하며, 인간적인 사령관과 무자비한 부사령관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결국 반란군으로 돌변한 부사령관 부대와 맞서 싸워 승리를 이끈다.
전체 2막의 〈호이 랑〉에서 부랑이 입대하게 된 연유, 군 복무 과정, 그리고 사령관과의 혼인이 기승전결의 플롯으로 펼쳐진다. 무대 장치와 음악 등 고전 발레의 일반적 포맷에 충실한 〈호이 랑〉은, 무엇보다도 캐릭터 설정에서 젠더 주체성이 뚜렷하여 발레에 관한 통념을 일신하였다. 예컨대 발레에서 자주 만나는 청순가련형의 인물상들은 거의 모두 수동적인 행동 전형을 반복한다. 이에 비해, 효심의 차원을 넘어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이다시피 한 군대와 전쟁의 세계를 진두지휘하는 능동성을 〈호이 랑〉은 적극 그려내었다. 부랑과 유사한 여성들이 실제 역사에서 드물지 않았음에도 발레에서는 이런 사실들이 소홀히 다뤄진 편이다. 〈호이 랑〉은 실제의 역사를 근거로 젠더 주체성을 착안하고 발레로 적절히 표현하였다. 이로써 우리 발레 역사는 한 페이지가 더 늘어날 것이다.
국립발레단 〈호이 랑〉 ⓒ국립발레단 |
〈호이 랑〉은 전투 장면 등 군대와 전쟁의 일들이 축을 이룬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호이 랑〉에서는 박진감이 상당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출연진들은 짜임새 있는 구도 속에서 에너지를 충실히 발휘하는 열의를 보이며 작품에 속도감을 더하였다.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점은 부랑이 남성들 틈에서 남성들에 못지않은 움직임으로 자신의 소임에 진력하는 모습이다. 이로써 움직임에서의 젠더 구분은 과감하게 파기된다. 인체의 태생적 차이로 인해 여성의 이러한 움직임을 가상적으로 처리하거나 상상에 맡길 수도 있었겠으나 〈호이 랑〉은 전혀 그러질 않았다. 젠더 구분의 벽에 정정당당하게 맞섬으로써 여성의 표현력은 이처럼 물 흐르듯이 넓혀진다.
옹골찬 부랑은 중국 태생의 뮬란에 비견된다. 엇비슷한 사연이어서 그렇게 비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랑을 발레로 발굴하는 데 뮬란이 자극을 주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그 연유가 어떠하든 우리에게 부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일이고, 이를 우리 손으로 발레화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누누이 지적되어온 바로서, 국립발레단에서 목전의 과제는 해묵은 일이지만 창작 발레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산출되는 창작 발레가 한국형의 발레라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한국의 소재를 담아야 한국형 창작 발레인 것은 아니다. 한국의 소재를 담아도 완성도가 낮으면 한국형 창작 발레의 구체적 사례로 내세워지긴 어렵다. 글로벌의 시각에서 세계 보편의 공감대를 배경으로 한국형 창작 발레를 모색해야 할 것이며, 〈호이 랑〉을 계기로 국립발레단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는 건 무리가 아니다.
국립발레단 〈호이 랑〉 ⓒ국립발레단 |
〈호이 랑〉에서 늙고 병든 아버지 캐릭터는 역할이 피상적이었다. 노쇠했으니 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무대 위의 픽션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도 춤으로 나름 역할을 할 길을 열어두었으나, 실제 아버지 캐릭터는 매사 느릿한 스탠딩으로 일관하였다. 그리하여 일례로 군 복무를 떠나는 부랑과 아버지의 이별이 단순하고 밋밋해서 부랑의 효심이 부각되지 못한 점은 퍽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공연에서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점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호이 랑〉은 부분에 따라서는 손질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음악은 브람스, 홀스트, 차이콥스키, 시벨리우스 등의 클래식 곡으로 편집되었는데,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왜소해 보이는 병정들의 검과 활 같은 무기, 얼마간 성글어 보이는 무대 장치, 전투와 훈련에 임하는 병정들의 소략한 군무 도형, 〈스파르타쿠스〉를 연상시키는 전투 대형, 여성 군무진들의 미약한 역할, 부분적으로 아련하며 산만해 보이는 듯한 인상의 의상 등이 그러하다. 전체 구성에서 부분 부분들이 정밀해야 작품이 농후해진다는 상식을 응당 염두에 두었을 테지만, 실제 무대는 그러지 못하였다. 특히 무술적 착상을 요하는 부분들에서 한국의 전통 무예 자산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제안이 될 것이다.
아울러 군 입대, 훈련, 반과의 갈등, 사령관 정에 의한 부랑의 성 정체성 탄로, 사슴의 보은 행동, 부랑의 고향 귀환 등등 작품의 여러 계기의 지점마다 춤들이 추가 또는 손질되어 다양한 부분들로써 작품의 농도를 높여가는 안무 전략도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안무 전략에서 굳이 디베르티스망보다는 스토리의 필연적 계기에 적절한 춤들이 개발될 만하다. 그리고 주요 캐릭터들의 성격이 부각되어 캐릭터들 사이의 갈등 또는 애증 관계가 명료하게 설정되어 작품 전개의 긴장감을 조성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국립발레단 〈호이 랑〉 ⓒ국립발레단 |
〈호이 랑〉은 이제 시작인 것 같다. 이 작품을 대서사 발레로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서사로 펼쳐지더라도 〈호이 랑〉은 일테면 가족 발레로서도 잠재력이 무척 커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작품 제목을 〈Hoi Rang〉으로 한 것을 눈여겨보고 싶다. hoi는 놀라움의 감탄사를 뜻하는 독일어다. 우리말로는 〈우와 랑〉에 해당할 텐데, 감칠 맛 나고 친근한 제목이라 하겠다. 〈호두까기 인형〉 말고는 가족 발레의 레퍼토리가 드문 국내 사정을 보면 〈호이 랑〉의 업그레이드는 미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가까운 장래에 〈호이 랑〉의 업버전을 만날 것을 기약하며… 분더바(Wunderbar) 〈호이 랑〉!
* 독일어 wunderbar는 영어 감탄사 wonderful에 해당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