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내 최대 현대무용 제전인 MODAFE(국제현대무용제)는 올해로 43회를 맞았다. 30회를 넘긴 춤제전들만 해도 국내에 더러 있고, 그것들은 우리 춤계의 축적된 자산을 상징할 것은 물론이다. 한편으로 외부 상황의 변동은 녹록치 않아서 제전들에 따라서는 변화의 방향을 찾아 고심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모다페의 경우 지난 몇 해 코로나 사태를 거칠 동안 무엇보다도 해외작에의 의존도를 낮추면서 국내작들을 다수 기용하는 계기를 가졌다. 그러다가 해외 의존도 낮추기는 모다페의 새 체질로 자리잡는 것으로 관측되며 올해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편이다.
이번 모다페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진행되었다(5. 8~26.). 예년과 유사한 형태로 열린 가운데 여느 해와는 좀 색다르게 올해 모다페는 거의 대부분 연초의 공모 과정을 통해 수십 편의 공연작을 선별한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경연제는 아니지만 공모제를 정착시킨 데서 주최측의 과감함이 돋보인다. 한편으로는 올해 대극장과 소극장의 프로그램들은 웬일인지 거의 대부분 1시간의 시차 간격을 두고 같은 날 열린 탓에 가령 두 극장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곤란함이 있었다. 평자는 대극장 프로그램들을 관람하였지만 주최측의 기획에서 배려가 요망된다. 올해 해외 초청작은 소극장에서 진행된 2편이었는데, 개인 사정상 관람이 어려웠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소극장 프로그램들에서는 다수의 소품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웬만큼 또는 상당히 경력을 쌓아가는 청년 세대는 물론 신진들을 위한 자리로서 소극장 프로그램은 특히 대형 춤제전의 일환으로 열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작지 않다.
대극장 공연들 가운데 일부는 재공연작들이었다. 국내 춤공연작들의 초연 일정이 전반적으로 짧은 현실정에서 재공연 기회가 잦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고조되고 있다. 이를 참작하면 소극장이든 대극장이든 재공연을 염두에 둔 기획이 강화될 만하다. 이들 대극장 작품들도 공모를 통해 선정되었다.
에리온 크루자 〈Metamorphosis〉 ⓒ김채현 |
재공연작이 아닌 대극장 공연작으로서 에리온 크루자의 〈Metamorphosis〉는 특이하다면 특이한 구성법으로 공연을 끌어가는 강단을 내비쳤다. 안무자 크루자에게는 근 50명의 한예종 무용원의 무용수 자원이 있었고 그는 대규모의 춤자원으로 무대를 요령있게 살려내었다. 검정색 웻슈트를 착용한 50명이 누비는 무대는 매스게임 같거나 자칫 촌스러워질 취약성을 갖기 쉽다. 아마도 그럴 위험성을 알고서도 공연을 무릅썼을 안무자는 우직하게 정공법으로 무대와 대면하였다. 어떤 면 단순한 구성이었으나 집중성이 효과를 발한 무대가 아니었던가 한다.
에리온 크루자 〈Metamorphosis〉 ⓒ김채현 |
무대는 시종일관 어두웠고 그 속을 헤쳐나가며 동작을 해대는 50명의 검정색 웻슈트들은 마치 인간/비인간의 구별을 초월한 생명체들처럼 돌진해왔다. 그들을 어떤 로봇이나 전사의 집단으로 대하는 것은 다소 편협할 것이고, 모종의 변화를 감당해야 할 상황에 처한 생명체로 폭넓게 읽어들일 필요가 있다. 그 변화라는 것은 안무자가 언급하는 기술 문명의 급속한 변동뿐만 아니라 마치 애벌레 같은 생명체가 성장기에 직면하는 새로운 도약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여기서 metamorphosis는 변형, 변화는 물론이고 허물벗기로도 해석된다. 대형 집단이 칠흑의 암흑 속에서 둔중한 굉음 및 음송(吟誦) 효과음과 더불어 에너지 충만한 움직임을 다채로운 품새로 속도감 있게 전개할 동안 생명력이 솟구친 〈Metamorphosis〉였다.
이태상 〈헬로! 각속도〉 ⓒ김채현 |
이태상의 〈헬로! 각속도〉(角速度)에서 잔잔한 표면 속에 감춰진 그 무엇을 만나게 된다. 바로크 풍의 쳄발로 연주를 쫓아 소프라노가 부르는 흥겨운 노래가 막을 열지만 분위기는 음울해 보인다. 제 홀로 서서 양동이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는 이가 있고 이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그런 자세들을 무대 여기저기서 보이면서 오래지 않아 노래는 끊기고 사람들은 기우뚱대며 위축되는 듯이 점차 응결된다. 자신들의 의지 곧 자율성을 상실한 듯한 그들은 안무자의 소개를 따르면 디지털 가상 세계를 살아간다. 급기야 일렬횡대로 점점이 정돈되는 양동이들은 디지털 시대가 광속도로 가차없이 뻗어가는 직선의 세상이라는 것을 은유하는 듯하다. 소프라노의 노래를 압도하는 것도 디지털 전자음이었다. 새로운 이질적인 시간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그들의 삶에서 방황이 연속되면서 끝내 넋나간 듯한 순응들이 진행되고 그 한켠에서 그 누군가는 쓰러져도 외면당하는 낙오가 연출된다. 여기서 밀물현대무용단의 출연자들은 열과 성을 다해 몰두하는 재빠른 움직임과 느린 움직임으로 응대하며 물음을 던졌다. 당신의 디지털 세상은 어떠한가. 안무자 이태상이 디지털 세태의 감춰진 풍조에다 실상은 송곳을 들이대는 공연으로서 직선의 구도를 찾아가는 구성 또한 인상적이다.
김보라 〈물질이 물질이 되는 방법〉 ⓒ김채현 |
김보라 안무작 〈물질이 물질이 되는 방법〉에서는 인간과 얼음,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주역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안무자가 염두에 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공연에서 출연자는 어느 청년 한 사람이며 그가 얼음 덩어리 하나를 응시하는 것으로 공연은 열린다. 얼음 덩어리는 점차 수가 늘어나서 급기야 여남은 개가 난무하게 된다. 바닥에 말 그대로 냉랭하게 놓인 얼음들을 두고 인간이 대거리하는 것은 무모하지도 무의미하지도 않다. 주로 금속성의 부조화스런 굉음이 다소 혼란스럽게 울리는 속에서 상의를 탈의하고 대거리하는 그에게 얼음은 상대방 같은 주체로 등장한다. 그래도 얼음은 물질이고, 그것은 얼음이라는 물질의 속성을 견지하면서 인간의 상대자로서 능력을 발휘한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어느 물질이든 물질이 물질 고유의 속성이 없다면 능력도 전혀 발휘할 수 없다. 물질(얼음)은 물질(얼음)이기 때문에 인간(몸)에게 각 물질 특유의 작용을 발휘하므로, 물질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실상은 주체이다. 물질이기에 물질로서의 능력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인간은 얼음을 끌어안거나 물이 흥건해지는 가운데 얼음 주위를 배회하거나 얼음에 마음을 기울이듯이 주시하는 모습들을 보이는데, 출연자가 단 한 사람이었던 것은 못내 아쉬웠다. 포스트휴먼적 발상을 내장한 이 공연은 물(物)-아(我)가 경계 없는 하나라는 폭넓은 인식을 말해주며, 그 물아의 상호접속에서 춤이 발생하는 현장을 깔끔하게 예시하였다.
보라아트프로젝트×안드레아 마르티니 〈Animal In〉 ⓒ김채현 |
보라아트프로젝트와의 협력작인 안드레아 마르티니의 안무작 〈Animal In〉은 단적으로 말해 몸의 찬가이다. 안무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디지털 시대에 몸이 의미를 상실해가는 현상이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이는 공연을 일관하는 동기가 된다. 자신의 우울한 진단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몸의 긍정적인 정감들을 그려내는 데 열중하였다.
공연 초입에 엉거주춤 수그린 상태로 등장한 어느 출연자가 상체를 펴서 바로 서더니 양팔을 치켜들고서는 대뜸 ‘이곳에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매우 영광입니다’는 구호를 객석을 향해 또랑또랑 외친다. 어쩌면 당돌해 보이기도 하는 일이다. 이 일련의 순간들에서 평자는 짐승-몸-인간이 겹쳐진 인상을 받았다. 이어 하나씩 등장하는 출연진들은 그렇게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선 서로 유사한 자세의 몸짓으로써 공감하는 집단을 점차 키워나간다. 몸 동작에서나 효과음의 사운드에서나 그 분위기는 경쾌하며 역동적이다. 그럴 즈음 태블릿 피시를 가면처럼 얼굴에 걸친 사람이 등장하는데, 태블릿에는 맘씨 좋은 서양인 수염 아저씨 얼굴이 보인다. 이제부터 길게 들리는 남성 목소리는 그 태블릿 아저씨의 말일 것이다. 그 요지를 보면 “이곳에 모시게 되어 영광이고, 우리 몸을 찬미하는 데 함께하게 되어 기쁘고, 우리는 많이 움직일 것이고, 유쾌하게 즐겨주시고...”
보라아트프로젝트×안드레아 마르티니 〈Animal In〉 ⓒ김채현 |
이어 전개되는 다양한 자세의 동작들은 춤보다 자유로워서 설득력을 갖는 매끈하며 활기찬 움직임들이었다. 그 움직임들에는 상호 접촉도 있으나 대체로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편이고 굳이 박자를 맞추려 하지 않지만 서로 간의 동조(同調)는 뚜렷해서 그들은 몸의 찬가를 함께 나누는 하나의 동질 집단으로 인식된다. 움직임들이 고조된 후에 무대가 다시 리셋되어 한 사람씩 등장하며 신체 각 부위를 가리킬 동안 태블릿 아저씨는 “이것은 몸이고, 이것은 입이고, 눈이고, 손이고, 주먹질하고 부르고 박수칠 수 있고...이것은 뇌... 이것은 심장... 이것은 몸입니다. 이곳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요지의 대사를 읊조린다. 인간보다는 몸이 주체로서 내뱉는 발언처럼 들린다. 디지털 시대에 몸이 의미를 상실해가는 데 맞서는 공연에서 디지털 태블릿 피시의 인물이 몸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인 듯하다. 그러나 이 아이러니에서 오히려 안무자의 우려가 더 강조되는 효과가 있은 것 같고, 아이러니는 공연작 〈Animal In〉을 평면적인 몸 공연으로부터 한 단계 끌어올리는 주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Animal In〉의 전개에서 어느 정도의 짜임새가 없지 않았어도 느슨해 보였던 탓에 일정 부분에서는 좀 면밀한 구성이 더 필요해 보였다.
〈Metamorphosis〉 〈헬로! 각속도〉 〈Animal In〉, 이 세 작품도 물론 공모에 의해 선정되었고 단체와 외부 안무자가 결합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모다페에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안무자를 기용하는 데 있어 특히 해외 안무자의 해외 공연작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국내 춤제전들에서 해외 공연작을 그대로 초청하는 것이 지난 수십년 동안의 상례였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는 어떤 변화로 나아가는 조짐으로 주시될 만하다. 해외 중견 안무자들이 국내에 체류했거나 국내 단체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에 착안한 변화로서 긍정적이다. 올해 모다페 개막도 해외작이 아니라 ‘다시 보고 싶은 무용수’라 하여 신창호, 김수정, 최문석, 최수진, 김형남이 자신의 출연작이나 소품을 10분 안팎으로 올리는 식으로 펼쳐졌다. 하나의 비중 높은 또는 묵직한 작품에 치중하지 않고 주제를 설정해서 국내 무용수들의 다채로운 면면으로 공연을 구성해볼 만큼 국내 역량도 축적된 것으로 보인다. 모다페 50회를 내다보는 지금 이전에 쌓은 자산을 활용하는 동시에 보다 적극적으로는 시대 동향과 춤계 요망에 밀착된 기획으로 모다페 특유의 노하우가 개발되기를 기대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