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빼어났다.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는 높았고, 서로 다름을 비교하도록 한 프로그램 구성은 시너지 효과를 배가시켰다.
안무가 이어리 킬리안의 레퍼토리 세 편을 엮은 국립발레단의 〈Evening Gala〉(9월 27-29일 토월극장, 평자 27일 관람)는 공공 예술단체로서 국립발레단이 그 공공성을 수준 높은 예술공연으로 실현시킨 무대였다. ‘국립’ 단체로서의 공공성을 공연 횟수 등 양이 아닌, 예술성 높은 작품, 그 질(質)로 성취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쾌거였다.
국립발레단이 거장 안무가 이어리 킬리안의 춤 유산 세 편을 오롯이 원 나잇 공연무대에 올린 것은 세계 춤 시장을 향한, 메이저 발레단으로의 진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세 개 작품 중 한 편을 체코 국립발레단이 공연하고 이후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대한민국의 국립발레단이 다시 공연하는 이번 프로젝트는 거장 안무가의 레퍼토리를 통한 ‘국립’ 단체의 제작과 유통이란 점에서 진일보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국립발레단 Evening Gala 〈Forgotten Land〉 ⓒ손자일/국립발레단 |
국립발레단 12명의 남녀 무용수들이 여섯 커플로 나누어 춤춘 〈Forgotten Land〉(1981년 작)는 춤과 무대미술의 조화가 빚어낸 미장센이, 극장예술의 백미였다. 무용수들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각적으로는 신비로움을 더했고, 음악에 실린 춤, 춤에 실린 음악으로 생명을 불어 넣었다.
안무가는 어느 순간 무대를 바다가 집어삼킨 땅의 이미지로 치환하며 반전을 꾀했다. 순간순간 바뀌는 댄서들의 에너지의 박동을 체감하는 것도 관람의 재미를 더했다.
의상과 무대미술을 맡은 안무가가 선택한 화가 존 맥팔레인은 빼어난 시노그라퍼(scenographer)였다. 그는 킬리안에 의해 빚어진 댄서들의 동체를 시각적 예술로 업그레이드 시켰고, 극장예술로서의 무용의 경계를 한층 확장시켰다. 킬리안이 그의 안무작 〈결혼〉에서 보여주었던 악기 군에 따른 음악과 춤의 절묘한 분할과 조합은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했다.
여섯 커플 중 레드 커플에 출연한 김재민의 발견은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을 통한 스타 탄생의 예고편이었다. 거침없는 에너지와 음악을 따라잡으며 빚어내는 특유의 춤의 질감은 압권이었다. 블랙 커플 중 정은영의 긴 라인이 만들어내는 공간감, 화이트 커플 중 김리회의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리듬감도 컨템퍼러리 발레의 묘미를 선사했다.
국립발레단 Evening Gala 〈Forgotten Land〉 ⓒ손자일/국립발레단 |
네 쌍의 커플, 체코국립발레단 8명의 남녀 무용수들이 춤춘 두 번째 작품 〈Gods and Dogs〉(2008년 초연)는 작품의 제목에서 보여주듯 상반된 상황을 춤으로 엮어냈다. 안무가는 기쁜 일과 슬픈 일, 건강과 질병, 정상과 광기 등 우리 삶에서 만나는 서로 다른 경계를 다양한 움직임으로 변주시켰다.
국립발레단 Evening Gala 〈Gods and Dogs〉 ⓒ손자일/국립발레단 |
피날레 작품 〈Sechs Tänze〉(1986년 초연)에는 국립발레단의 13명 댄서들이 출연했다. 강수진 예술감독은 이 작품으로 트리플 빌로 짜여진 이번 이브닝 갈라 공연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그만큼 〈젝스 텐체〉는 앞서 공연한 두 작품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안무가가 선택한 음악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여섯 개의 독일 무곡’이었고 실제로 작품의 소재 역시 모차르트의 삶 속에서 찾았다. 킬리안은 모차르트의 환상, 익살, 광기를 코믹한 터치로 익살스럽게 표출했다.
음악에 담긴 유쾌함을 유머로 치환하기 위해 안무가는 짧은 극 형식을 차용하는 재치를 보였다. 김희선의 앙증맞은 춤과 코믹한 연기, 4씽 커플의 물 흐르듯 이어지는 바리에이션, 머리를 흔들 때마다 떨어지는 흰색 가루와 사과와 칼 등 소품을 활용한 극적 구성은 춤과 음악을 기저로 한 두 작품과의 차별성을 확연하게 드러냈다.
국립발레단 Evening Gala 〈Sechs Tänze〉 ⓒ손자일/국립발레단 |
이어리 킬리안의 두 편의 유산을 통해 보여준 국립발레단 단원들의 성장은 컨템퍼러리 발레 레퍼토리의 확장과 함께 그 질적 수준을 담보했다는 점에서 메이저 발레단으로의 진입을 확인시켜준 쾌거였다.
음표 하나하나까지도 분석해 음악과 움직임의 매칭을 절묘하게 버무리는 킬리안의 안무적인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작품에서, 비록 출연 무용수들 모두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무용수들이 순서만 나열하기 바빴던 종래의, 무용수로서의 단순한 춤추기에서 탈피해 리듬을 타고 음악에 따라 감성을 담아낼 정도로 예술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수진 예술감독이 부임한 이후 지난 5년 동안 국립발레단의 프로그래밍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신뢰를 갖게 한다. 세계적인 거장의 레퍼토리만으로 하루 프로그램을 구성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네트워킹과 한국적 소재의 전막 발레 제작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해 11월 정기공연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행보
모두 과시형의 컴퍼니 운영보다 메이저 발레단으로 도약하기 위한 내실을 곁들인 노력의 결과물이란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이렇듯 예술감독으로서 강수진의 능력은 다른 무엇보다 국립발레단의 공연들이 보여주고 있는 탄탄한 예술적인 완성도와 단원들의 질적인 성장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작품 지도를 위해 내한한 안무 어시스트들이 참여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이번 〈Evening Gala〉 공연의 메인 캐스팅 단원들 중에는 국립발레단의 군무, 솔리스트들도 적지 않다. 그들이 이번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을 통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국립발레단 단원들의 탄탄한 기반을 가늠할 수 있다.
안무가 이어리 킬리안. 그는 여전히 안무가로 세계의 춤 시장을 호령한다. 그가 남긴 레퍼토리들은 ‘유산’으로 칭해도 될 만큼 그 예술성에서 보배롭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축하해 출범한 모나코 댄스포럼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니진스키 댄스 어워드에 한국 측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나는 당시 영화의 아카데미 감독상에 해당하는 그해 최고의 안무가 부문에 이어리 킬리안을 추천했었다. 그리고 그는 초대 니진스키 어워드의 최고 안무가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이 열렸던 2000년 12월 모나코 그라말디 포럼에서 킬리안의 수상 소감을 들으면서 나는 언젠가 그의 작품이 한국의 무용단에서 오롯이 공연되기를, 그가 한국의 무용단체를 위해 안무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소망했었다.
그 때문 이었을까? 이번 이어리 킬리안의 세 개 작품이 한 무대에서 선보인 국립발레단의 질 높은 공연은 평자에게는 그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장광열
1984년부터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기자, 편집장으로 20여 년 활동했다. 춤비평집 『변동과 전환』 ,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 등의 저서가 있으며, 서울국제즉흥춤축제 예술감독 등을 맡아 춤 현장과 소통하고 있다. 한예종·숙명여대 겸임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