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검정 모자, 검정 롱 코트를 걸친 무용수가 저만치 50미터 쯤 떨어진 숲속에서 천천히 걸어올 때, 10미터 앞에서 초록 눈동자의 남녀 무용수가 영접할 때, 적당히 단풍 든 산세를 배경으로 천천히 움직일 때, 잠시 침묵이 흐르고 트럼펫 소리가 합류할 때, 그녀가 완숙한 몸짓을 멈추고 집어 든 나뭇가지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 듯 자신의 얼굴을 가릴 때….
어느새 평자는 무용수가 아닌 자연이 춤추고 있음을 음미한다. 무용가 남정호의 유동하는 지체는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다른 춤의 잔향을 남겼다. 계룡산의 정기 때문이었을까? 아님 울긋불긋한 단풍 때문이었을까? 올봄 제주돌문화공원에서 보았던 돌과 하나 되는 그녀의 춤과는 또 달랐다.
〈죽음을 기억하라〉(momento mori). 25년 동안 안무가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더블베이스 연주가 사이토 테츠(Saitoh Tetsu)의 죽음을 애도하는 남정호의 춤은 떨어진 낙엽, 작은 돌멩이의 바스락 소리가 가득한 길 위에서 따듯하고 인간적인 춤으로 이렇게 관객들과 조우한다.
남정호 〈죽음을 기억하라〉 ⓒ신성호 |
남정호 〈죽음을 기억하라〉 ⓒ장광열 |
10월 20일 오후 계룡산국제춤춤제에서 만난 몇몇 춤 공연은 극장예술로서의 춤과는 확실히 다른 감흥을 선사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지역에서 열리는 국제 무용 페스티벌과는 달리 이 축제는 올해가 24년째였다. 사실 평자는 이 축제에 대해 외국의 무용가 몇 사람이 조인하는 국내 춤 단체 위주의 야외공연 정도로 알고 있었다. 올 7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무용제에서 만났던 중국의 안무가 Wu Bo가 이 축제에 초청받아 관객과 함께하는 작품을 공연한다며 관람 요청을 한데다 중견 무용가 박일규가 연출가로 참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궁금증이 생겼다.
10월 19일과 20일(평자 20일 공연 관람) 이틀 동안 펼쳐진 올해 축제는 ‘신들의 산_확장과 공존’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 공연장소는 동학사 인근의 세 개 지역을 주 장소로 설정했고, 그 공간에는 각각 문, 길, 원 공연장이란 타이틀이 붙어있었다.
제24회 계룡산 국제춤축제 ⓒ장광열 |
남녀 사이 복잡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소재로 한 미국 White Wave Dance Company의 〈영원한 이 순간〉(안무 김영순)은 작은 오두막 그 주변과 위를 배경으로 미국의 모던 댄스 유형의 다채로운 움직임 조합을 보여주었다.
터키 무용단이 이실 비카치 안무로 선보인 〈상황1〉은 한 명의 여성 무용수와 세 명의 남성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흥쾌한, 다소 빠른 패시지의 춤으로 관객들의 흥취를 고양시켰다.
White Wave Dance Company 〈영원한 이 순간〉 ⓒ신성호 |
이실 비카치 〈상황1〉 ⓒ신성호 |
필리핀 무용단은 90분 길이의 댄스 뮤지컬을 20분으로 축약한 작품인 〈다곤 사 호요호이〉(연출 루트가르도 루자 루바드)를 공연했다. 18-19세기 식민통치 당시 스페인이 맞서 항쟁을 벌인 영웅 다고호이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10여 명의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민속적인 노래와 춤으로 앞의 세 작품과는 다른 전통적 색채가 물씬 풍겼다.
중국의 안무가 Wu Bo의 작품 〈다 같이 볼을 굴려보자!〉는 두 명의 전문 무용수 외에 그녀의 어린 아들도 직접 출연, 풍선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관객들과 터치하는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날 선보인 5개국 외국 무용단의 작품은 콘셉트나 작품을 풀어가는 방식 등에서 각기 다른 차별성을 보여 축제의 예술감독이 프로그래밍 과정에서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루트가르도 루자 루바드 〈다곤 사 호요호이〉 ⓒ신성호 |
메인 공연 시작 전 참가 아티스트들의 헌무 광경 ⓒ장광열 |
Wu Bo 〈다 같이 볼을 굴려보자!〉 ⓒ신성호 |
Wu Bo 〈다 같이 볼을 굴려보자!〉 ⓒ장광열 |
국내 초청 아티스트로 참여한 정수동 안무의 〈터미널〉과 문진수의 〈상쇠춤〉, 엄정자 안무의 〈계룡산 야상곡〉은 외국 초청 아티스트들과는 다른 면면의 작품으로 야외 공연예술축제로서의 다양성을 살려내는 데 일조했다.
〈터미널〉에서 3명의 무용수들은 각각 낮은 원형 무대의 비교적 넓은 공간을 사용하면서 정중동의 움직임으로 풀어냈고, 사물놀이 연주를 곁들인 문진수의 〈상쇠춤〉은 연주보다 절제된 춤으로 우리 춤의 멋과 흥을 조율하는 재치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순서를 장식한 〈계룡산 야상곡〉에서 엄정자는 5미티 공간 안 대지 위의 춤으로 계룡산 사계(四季)가 품은 자연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표출했다. 가수의 라이브 연주는 감성적인 저음으로 분위기를 더했다.
정수동 〈터미널〉 ⓒ신성호 |
문진수 〈상쇠춤〉 ⓒ신성호 |
엄정자 〈계룡산 야상곡〉 ⓒ신성호 |
초청 아티스트들의 수준은 다소 편차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세 개의 다른 공간에 다른 색채의 작품을 버무리는 시도와 함께 개개 작품 사이에 브릿지를 만들어 연계성을 살려내는 박일규의 연출은 공연 프로그램의 차별성을 살려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연출가 박일규와 드로잉작가들 ⓒ신성호 |
1996년 시작된 계룡산국제춤축제(GIDF)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 24년째가 되었다는 것은 이곳에 와서 알았다. 계룡산 국립공원 안 동학사 인근에서 해마다 10월 셋째 주말에 열리는 축제는 ‘자연은 최대한으로, 인위적인 것은 최소한으로’ 라는 슬로건’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예술감독은 엄정자한국춤무리(전, 대전 대덕대 교수)가 맡고 있다.
올해의 경우 외국팀 4개국 40여 명과 국내 초청 8개 팀의 춤 공연과 신현국 화백 등 지역 작가 7명의 춤 드로잉 전시 및 부대행사가 주요 프로그램이었다. 조직위원회 운영, 예술감독, 해외팀의 프로그래머 역할을 더한 연출가 등의 업무 분담 등 외형적으로 국제적인 야외 무용축제를 운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 축제는 그동안 ‘계룡산에서의 춤’이란 명칭을 사용했었어요. 19회부터 마을 이장님을 비롯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019년 현재는 원로 화가인 신현국선생님께서 조직위원장을, 마을주민들과 이 지역 예술가들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올해를 기점으로 국제적 춤축제로 도약하기 위해 명칭을 ‘계룡산국제춤축제’로 바꾸고 국제행사 경험이 많은 박일규 교수님을 연출가로 초빙했습니다.”
축제 현황을 들려주면서 엄정자 예술감독은 “이 같은 노력 때문인지 많은 분들이 올해 행사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문, 길, 원 공연장에서 펼쳐진 총 열두 개에 달하는 공연들을 한데 아우르게 하는 힘을 발휘한 것은 연출가 선생님의 공이 컸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올해 축제 예산은 5천만원.
“지난해 2천 8백만원에서 증액된 것입니다. 2백만원의 예산으로 시작했는데 5천만원이 되기까지 24년이 걸린 셈이지요.” 한 축제 관계자는 “만만치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개인적으로 떠안은 엄정자 예술감독의 희생이 없었다면 축제는 벌써 중단되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정도 규모의 국내외 단체들이 참여하는 국제 축제 예산을 5천만원으로 치러내기에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것은 자명하다. 결국은 축제 운영을 책임지는 조직위원장과 예술감독, 초청된 예술가들이 항공료를 부담해야 하고 운영 스태프들의 지원봉사 등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은 행사의 질을 저해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도 이에 대한 보완책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제24회 계룡산 국제춤축제 ⓒ장광열 |
우리나라에서 열리고 있는 야외 국제 춤축제는 해운대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부산국제무용제와 제주의 돌문화공원에 산재한 돌을 배경으로 한 제주국제즉흥춤축제가 대표적이다. 본격적인 국제 야외 춤축제를 표방한 만큼 계룡산국제춤축제는 향후 계룡산의 자연 속 춤을 표방한 쪽으로 분명한 노선을 정하고 더욱 확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전 성남국제무용제가 환경무용(Green Dance)을 표방 성남 분당의 모란시장, 탄천, 그리고 율동공원 등에서 동틀 무렵, 정오, 해질녘, 한밤중 등 각기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국내외 춤들을 연계시킨 사례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계룡산국제춤축제는 충남 공주 지역을 기반으로 오래동안 활동하고 있는 무용가가 공공성을 띤 무용 인프라로 성장시키고 있다는 점, 난립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제춤축제 가운데 자연과 함께 하는 장소 특정형 공연으로 차별성을 부각하고 있다는 점, 상대적으로 취약한 충청권의 무용 활성화를 위한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그 행보에 주목하게 된다.
프로그래머, 예술감독, 행정감독, 조직위원회의 역할 분담과 사무국 활성화를 통한 효율적 운영방안 모색, 예산 증액 등 당면한 과제가 해결된다면, 예술축제를 통한 지역문화 활성화와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 고양 측면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장광열
1984년부터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기자, 편집장으로 20여 년 활동했다. 춤비평집 『변동과 전환』 ,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 등의 저서가 있으며, 서울국제즉흥춤축제 예술감독 등을 맡아 춤 현장과 소통하고 있다. 숙명여대 겸임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