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예술)을 사랑한 효명. 효심이 깊어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해 ‘춘앵무’를 만들어 올린 세자.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정의 영향력을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22세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효명세자. 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그의 존호와 무관치 않아 보이는 강미리(부산대 교수)의 작품 〈익翼-빛과 어둠의 날개〉(12월1, 부산시민공연 사랑채). 전통춤 해체작업의 방향성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강미리 〈翼-빛과 어둠의 날개〉 ⓒ강미리할무용단 |
바로크 양식의 붉은 무대 막. 간이의자가 놓인 객석 앞에 쳐진 붉은 색 줄. 휑한 공간에 보석처럼 박힌 붉은 색의 아름다움이 공간의 순수성을 일깨워 준다. 디테일은 살리고, 색은 절제된. 흰색과 붉은색의 파니에 의상과 흰색 탈. 노란색의 긴 드레스에서 태양 왕 루이 14세와 효명을 떠올린다. 조명도 없다. 춤과 연회로 왕 중심 지배질서와 왕의 위상을 높이려 한 이들의 정치의도, 그 그림자가 무대에 어른거린다. 춤으로 역사를 넘나들며 생생하게 빛을 뿜게 하는 공간과 의상, 춤. 그 자체가 춤의 원리로 작동한 무대였다.
〈춘앵전〉의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 노랑색의 앵삼, 화관, 오색 한삼을 양손에 끼고 우아하고 미려하게 추는 춤사위 대신 흰색 의상의 여자 여섯 명이 한삼 없이 맨손으로 펼쳐 던지는, 지나간 역사의 속살을 헤집어 추는 듯한 깊은 고통의 춤이 있다.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 앵삼은 순원황후의 노란색 드레스로, 버드나무를 상징하는 초록색의 하피는 짧은 한삼에 표식처럼 한 줄만 남기고 붉은 색 허리띠는 효명의 붉은 마음, 폭이 넓은 바지로 풀어낸다. 범람하였던 은유들이 의례에서 색을 벗고, 탈을 썼다. 흰색의상과 탈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수의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은유. 감각적인 장이다.
부풀어진 흰색 치마, 어여머리를 형상화한 머리장식에 흰색비녀를 가로로 꽂은 여섯 명의 무용수. 붉은 색 의상에 탈을 쓴 열 두 명의 무용수가 도열하자 흐르는 바흐의 하프시코드 콘체르토. 바로크시대 악기다. 목이 높은 붉은색 의상에 흰색 한삼을 낀 효명이 무대 가장가지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오자 이들의 춤이 동시에 일어난다. 화려하지만 슬픈 춤.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강미리가 붉은색 막 가운데 조용히 서서 이들을 보고 있다. 모두 죽음을 건너온 이들이다.
레카토가 불가능한 악기 하프시코드의 황폐하고 건조한 연주, 기쁨도 슬픔도 없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악기, 음악의 배치에서 안무자 강미리의 치밀함을 본다. 이 치밀한 연출은 춤을 보는 이들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춤의 숨은 힘으로 작용한다. 관객들 내부의 감상체계 개편은 이렇게 시작되기도.
높은 머리장식을 한 여섯 명이 옷자락을 잡고 무대를 누빈다. 바흐에 얹은 한국 춤, 부푼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잡아 올린 채 호흡을 들었다가 훅 내려놓는가 하면 다시 뒤로 젖히는 데서 궁중무와 춘앵무를 추어 올렸던 궁의 지난 영광과 꿈을 채 펼치지 못하고 스러져간 효명의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힘이 있는 춤이다. 힘이 있는 춤 뒤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숨어 있는가, 이들의 춤은 공간과 의상으로 낯설어지고 낯선 만큼 의미는 더 날카로워진다. 익숙한 춤이 아닌 새로운 형식의 춤에 한동안 통증을 앓았을 무용수들, 하지만 자신의 몸(춤) 안에 숨어 있던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춤이 일어나고 그 춤이 관객을 놀라게 할 만치 많은 의미를 담아낸다는 것을 알까.
〈춘앵무〉의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성실성이 춤 의미의 재현을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가는 따질 필요조차 없다. 단순한 재현을 완전히 뒤집은 춤은 의미가 곧장 무의미에 이르도록 관객을 위협한다.
흰색 의상에 앙증맞게 짧은 길이의 한삼(노랑과 녹색, 붉은 색이 한 줄씩 있는)을 끼고 나와 손을 모았다가 뿌리는 군무. 빠른 음악에 잦은 발 디딤새. 배경의 붉은 막과 붉은 한삼의 조화에서 미적 감흥이 인다. 궁중의 화려한 복식을 간결하게 해석한 바로크 풍의 의상과 바흐의 첼로음악. 여섯 명(이혜진, 한지은, 류현정, 곽민지, 윤수양, 정서영)의 춤이 뿜는 에너지가 무대를 압도한다. 흰색 상의에 붉은 색 폭넓은 바지를 입은 효명이 막을 스치듯 가로 지르며 나온다. 효명의 붉은 마음을 위무하는 춤. 첼로 음악에 지전 춤을 얹었다. 발상이 놀랍다. 음악이 춤을 끌고, 슬픔을(지전) 들어올린다.
흰색 원피스의 안무자 강미리의 솔로. 비올라 음색을 선택했다.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천천히 궤적을 그리며 내려놓는 춤에 자식을 안아 내리는 힘과 품고 있는 깊은 슬픔이 보인다. 순정황후와 그녀를 추는 강미리.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이다. 강미리는 오래 고민한 춘앵무의 의미와 재현을 양보하고, 춤 속 순정왕후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관객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강미리의 단단한 내면이 춤으로 일어났다가 순정왕후의 슬픈 정서로 다시 툭 떨어진다. 막에 투영되는 춤 그림자, 어느 쪽이 강미리일까.
마지막, 군무 속 효명의 춤, 날개 짓을 하며 무대를 뛰는 효명(윤형삼), 봄을 노래하는 꾀꼬리는 없다. 안쓰러운 날개 짓에 희미하게 그 흔적이 남아있을 뿐. 날고자 하는 춤의 구체적 묘사. 이 구체성은 팽팽하게 잘 유지해온 춤의 추상성과 잘 융합될 때 아름답다. 안무자가 요구하였을 밀도 높은 감정의 춤이 은유의 힘을 얻을 때 아름답다는 뜻이다. 군무진이 맨발로 무대바닥을 뛰면서 내는 소리가 마음을 치고, 효명의 흰색 한삼과 탈, 덩실 덩실 추는 춤이 마치 자신을 위무하는 듯하다. 효명과 회색 드레스에 흰색 긴 장삼의 순원왕후, 그 만남의 환희와 이별의 슬픔을, 효심을, 대리청정으로 정치무대에 서야 했던 초조한 용기를, 스러져간 이상을 순원왕후의 시점에서 풀어낸,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翼-빛과 어둠의 날개〉. 강미리는 기호로 남아있는 전통이라는 주체의 상투적인 춤과 음악을 흔들고 비틀어 춘앵무의 의미, 그 한계에 이르기까지 춤 하나하나와 관련하여 그 의미 선택의 폭을 그 의미가 기화될 지경까지 몰아붙여 확장시켰다. 수작이었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